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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장면연구회

일본 정계의 제2공화국관 1 (들어가는말, 정치인 池田수상) - 高崎宗司

 

* 〔 〕안은 역주임. ‘일한’, ‘조선’ 등의 용어는 원문 그대로 두었음.


들어가는 말

 

 1960년의 4월혁명을 배경으로 8월 23일에 탄생한 장면 정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 것이었다. ①권위주의로부터의 탈각 및 민주주의 제도화가 지향되고 의회 중심의 정치운영을 실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리더십을 약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하였다. ②다원적 외교의 추진을 내걸었다. ③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틀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루어질 경제건설이 지향되었다. ④신체제의 구축을 지목하는 다양한 대중운동이 분출했는데 그것들은 반정부운동으로부터 나아가 통일문제를 과제로 삼음으로써 정치적 불안정을 가져오게 되었다.[각주:1]

 이보다 앞서(1954년 11월 10일) 미국과 일본은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일본경제를 진흥하는 것의 최대 급무임이 넌지시 확인되고”, “여태까지 방위 제1주의의 태도로 임한 미국이 아시아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아시아의 경제발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한 吉田․아이젠하우어 공동성명을 발표하였었다.[각주:2]


 그리고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그 후 이른바 로스토우노선이라는 형태로 공식화되었다. 上原一慶 외, 『東アジア〔아시아〕近現代史』(有斐閣, 1990. 187~189쪽)의 깔끔한 요약에 의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특히 아시아에서는 아시아․아프리카의 ‘연대’의 핵인 중국에 대항할 수 있는 경제성장의 실례를 만드는 일이 초미의 과제로 간주되었다. / 로스토우에 의하면 50년대 중반의 아시아 민중은 소련의 경제적 성공과 중국의 경제 건설 계획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아시아에서 ‘자유세계’의 경제성장의 실례를 만들고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에 대항할만한 경제성장 이론을 제시하는 일이 요청되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장면 정권 즉 제2공화국의 특징을 좀더 집약한다면, 그것은 ‘경제제일주의’와 ‘민주정치의 구현’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등에 의한 군사 쿠데타로 미완으로 남겨진 채 부득이 좌절하여 버렸다. 그 뉴스를 들은 장면의 장남 張震은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가 30년은 후퇴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각주:3] ‘30년’인지 어떤지는 제쳐두더라도 “민주주의가 후퇴한” 것만은 틀림없다.

 
본고는 일본의 정계(정치가와 관료의 세계)가 제2공화국의 성립으로부터 종언에 이르는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참고로, ‘일본인의 조선〔한국〕관’에 관한 연구는 『近代日本人の〔의〕朝鮮認識に〔에〕関する〔한〕研究文献目録』(園部裕之 편, 緑蔭書房, 1996.)이 간행될 정도로 많은데 현대 일본인의 조선〔한국〕관이라는 주제가 되면 몇 가지밖에 없다. 특히 ‘일본 정계의 제2공화국관’이라는 주제로 말하자면 이것을 정면으로 취급한 선행연구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現狀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가․관료가 제2공화국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검증한다. 史料로서 정치가에 관해서는 주로 국회의사록, 관료에 관해서는 잡지논문을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제5차 일한회담의 일본측 수석대표 沢山廉三(외무성 고문)가 제2공화국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史料는 찾아지지 않았으므로 언급하지 못했음을 미리 말해둔다.


I. 정치가 


    
1. 池田수상 

 일미안보조약 반대운동에 의해 岸信介내각이 무너지자 대신해서 ‘低姿勢’와 ‘소득배증 정책’을 내건 池田勇人 내각이 성립되었다. 1960년 7월 19일이었다. (제1차 내각은 1960년 12월 8일까지, 제2차 내각은 1963년 12월 9일까지, 제3차 내각은 1964년 11월 9일까지 계속되었다.)

 
정치문제 대신 경제문제를 간판으로 내건 것은 안보반대 운동에 상징되는 반체제운동으로부터 체제를 지키고, 나아가서는 반체제운동을 해체할 것을 강하게 의식한 것이었다. ‘경제성장에 의한 勝共’을 구상하였다고 말해도 되리라. 그러한 과제의식은 池田내각보다 약 1개월 늦게 성립한 장면 내각의 그것과도 공통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池田는 일한교섭에 소극적이었다. 허정 과도정권이 池田수상에게 “친선사절단을 이끌고 방한할 것을 요청했”을 때에도 池田는 가지 않았다.[각주:4]

 신문기자인 石川眞澄에 의하면 구태여 일본이 손을 대지 않아도 한국은 “저만큼 교육정도가 높고 경제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북한에 대해 남한 쪽이 “경제적인 우월성을 보이게 되면 정치정세도 안정되고 일한관계도 정해져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탓이다.[각주:5]
 

 
또 비서관이었던 伊藤昌哉에 의하면, 한국에는 “근면하고 교육정도가 높은 훌륭한 노동력이 있다. 이것이 자본과 결부되면 반드시 번영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일본이 이룩한 바와 같은 경제성장 정책이 실현되면 마치 東獨에서부터 西獨으로 유입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북한에서부터 남한으로의 이동이 일어날 것이다. 아니면 그것이 발생하지 않다고 해도 북한은 그 강경한 전체주의 정책을 약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각주:6]라고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지로 池田는 後述하는 小坂방한에 관해서도 소극적이었다. “장면 신정부가 만들어지고 나는 좋은 기회다, 한국과의 문제를 이 기회에 현안을 다 一掃하고 싶다는 염원으로써 외무대신(외무부 장관)으로 하여금 저쪽과 교섭시킨 결과, 외무대신이 오시면 어떻습니까 하니 외무대신을 가게 한 까닭입니다.”[각주:7]라고 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小坂는 “당초 방한 찬성”이었던 池田가 그 후 “점점 소극론”이 되고 小坂의 의원사직을 건 설득으로 “가게 하마〔行って貰おう : 네가 가서 나에게 이익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이 깔림.〕”라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증언하고 있다.[각주:8]

 1960년 12월 15일, 일한회담 한국측 수석대표 유진오의 방문을 받고 “장차 정치적 해결을 필요로 하는 시기에 있어서의 총리의 배려를 요청”당했을 적에도 池田는 “양국간에는 과거 오랜 기간에 걸친 복잡하게 얽힌 문제가 있으므로 바삐 다그쳐도 무리할 것이니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대답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각주:9]


 
池田는 1961년 5월 16일, 한국에서의 쿠데타 당일, 국회에서 자유민주당 대표단의 한국방문에 대해 질문을 받고 있었다. 그 때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 또 각계 인사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또 한국의 경제사정, 민생사정도 십분 조사해주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나는 부탁을 한 것이올시다. 앞서 小坂외무대신이 가셨을 때에 장면씨한테서 메시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野田단장에게 내 메시지도 위탁하고 한국방문에 관해서는 십분 알고 있었던 것이올시다.”[각주:10]하고 무미건조하게 답변하기에 머물고 있다. 

 
 일한회담에 대해 신중하였던 池田가 적극론으로 전환한 것은 5월 16일의 쿠데타와 6월 20일의 일미수뇌회담 사이의 짧은 기간이었다. ‘親朴派’인 吉田茂 전직 수상이 岸信介 전 수상, 石井光次郞 전직 부총리와 연락하고 “미적지근한 池田수상을 설득했”기 때문인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일미회담 때에는 일한조약의 체결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1. 森山茂徳, 『韓国現代政治』, 東京大出版会, 1998. 71~76쪽. [본문으로]
  2. 吉田茂, 『回想十年 1』, 中公文庫版, 1998. 267쪽. [본문으로]
  3. 김용삼, 「탄생 100주년 --장면의 67년의 생애」, 『월간 조선』, 1999. 3. 217쪽 [본문으로]
  4. 鄭一亨, 「왜 박정권의 한일회담을 반대했나」, 『신동아』, 1984. 10. 275쪽. [본문으로]
  5. 後藤基夫․内田健三․石川真澄, 『戦後保守政治の軌跡 --吉田内閣から鈴木内閣まで』, 岩波書店, 1982. 206쪽. [본문으로]
  6. 『池田勇人とその時代 --生と死のドラマ』, 朝日新聞社, 1985. 208쪽. [본문으로]
  7. 『第三十八回国会衆議院予算委員会議録』제3호, 1961. 2. 4. 12쪽. [본문으로]
  8. 小坂善太郎, 『あれから これから --体験的戦後政治史』, 牧羊社, 1981. 144~145쪽. [본문으로]
  9. 前田利一, 「日韓第五次會談再開 --財産請求權と漁業問題とをハカリに」, 『世界週報』, 1961. 1. 24. 58쪽 [본문으로]
  10. 『第三十八回国会衆議院予算委員会議録』제22호, 1961. 5. 16. 6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