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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장면연구회

張勉의 생애와 신앙에 관한 연구 - 趙 珖



     1. 머리말



1) 연구의 범위

 
이 논문은 운석 장면의 생애를 간략히 조감하고자 한다. 또한 많은 연구자들은 그가 교육사업, 문화사업 등과 정치활동을 전개하는 데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주요 요소 가운데 하나로 그의 가톨릭신앙을 주목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그의 신앙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검토하여 그의 생애와 업적을 이해하는 데에 기본적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2) 연구사적 검토

 
장면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를 전후하여 한국정치학계에서 진행되어 갔다. 장면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상당수가 결과론에 입각한 연구였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즉, 장면이 영도하는 제2공화국 정부는 5․16 쿠데타를 통해서 좌절되었다. 그런데 일부 사회과학 분야에서의 연구에 있어서는 민주당 정권에 강요되었던 비정상적 좌절의 당연성 내지는 필연성을 밝히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연구에서는 민주당 정권이 몰락한 이유만을 사실 이상으로 과장되게 서술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식은 결과론적 인식이 아닌 인과론적 인식이 되어야 한다. 역사학에서는 사실 자체를 정확히 밝히고, 각 사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충분히 밝혀나가야 함을 강조하며, 사건에 대한 결과론적 해석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경계한다. 바로 이와 같은 역사주의적 입장에서 장면과 그 제2공화국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강조되던 제2공화국의 무능이나 부패정권이라는 지적이나, 장면 개인에게 강요되었던 優柔不斷이라는 잘못된 비난도 당연히 재검토되어야 한다.

3)연구의 의의       

 
민주당 정권은 단군이래 처음으로 민주주의라는 신화를 이 땅에 실현했던 정권이었다. 제2공화국은 민주주의의 희열과 좌절을 거의 동시에 경험했다. 특히 제2공화국을 통해서 우리는 올바른 민주주의를 체험해 보았다는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소중한 경험과 함께 민주주의의 좌절과 그에 따른 파행적 역사의 전개라는 사실도 체험했다. 그러므로 제2공화국 장면에 관한 연구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생애에 관한 연구


1) 가계와 출생

 
張勉은 1899년 張箕彬(레오)와 黃루시아 사이의 3남4녀 가운데 장남으로 서울 三軍部後洞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仁同이었고, 8世祖 때 인동에서 평안도 成川으로 이거했다. 그후 7세조 때에는 成川으로부터 中和郡 斗澗으로 이사했다가 曾祖父 시에 中和郡 唐井面 儉岩里로 이주했다.그리고 그의 부친 때인 1894년에 검암리에서 인천항으로 이전했다.

 
인동 장씨는 원래 영남에 세거하던 거족이었다. 그러나 인동 장씨의 경우에도 조선후기에 이르러 극심한 분화의 과정을 겪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동일한 관향에 속한 혈연 집단이라 하더라도 여러 사회 계층으로 분해되어 갔다. 이 분해의 과정에서 원래의 사회적 지위에서 탈락되어 가던 집단은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이주함이 일반적 현상이 되었다. 바로 이와 같이 주민의 지역간 이동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특히 18세기를 전후해서 강화되고 있었다.

 
그의 8세조는 인동에서 성천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先代를 보면 성천으로의 이주 후에도 3회에 걸쳐서 다시 이동을 단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감안할 때 그의 선대는 경제적 기반이 강하지는 못했지만, 자립적 양인으로 당시의 세파를 이겨나가고 있었던 존재라고 생각된다. 그의 선대는 조상이 물려준 토지에 안주하며 한 지역에 정착하여 살기보다는 스스로 삶의 길을 개척해 가던 진취적 인물들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향리를 떠나서 새로운 세계로의 이주를 단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그의 부친 대에 이르러서는 갑오개혁이 단행되고 있었던 1894년 당시 개항장 인천으로 이주했다.  

 
그의 부친 張箕彬은 인천으로 이주한 직후 다시 서울에 있던 관립 영어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영어학교는 개화기 변동하는 사회를 이끌어 갈 인사들을 양성하던 곳이었다. 장기빈이 이곳에서 수학했다는 사실 자체는 개항장 인천으로 이주한 이후 개화의 물결에 본격적으로 접하고 나서 개화의 중심부로 진입하려던 소망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준다.그후 장기빈은 인천세관을 거쳐서 1911년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스텐다드 오일 회사의 인천지점에서 근무했고, 1918년에는 요코하마에 본사가 있었던 타운센트 회사〔世昌洋行〕의 인천지점에 근무하는 등 구미 열강계열의 상사에서 근무했다. 장면은 이러한 연고로 소년시절을 인천에서 보내게 되었다.

 
장면은 1899년 8월 29일 서울의 三軍部後洞에서 출생했다. 당시 그의 부친은 인천 海關에서 근무하며 인천 典洞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그는 모친의 본가에서 태어났고, 2개월 후에 인천으로 귀환했다. 그후 그는 인천 花村洞으로 이주했고 여기에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는 인천을 떠나서 1916년 서울 貞洞으로 이주했고, 그 생애의 상당 부분을 서울에서 보냈다. 

2) 학업

 
장면은 1906년 4월에 인천 성당에서 운영하던 私立 博文學校에 입학했고, 1910년 同校 尋常科를 졸업하고서 고등과로 진학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1912년 인천 공립심상소학교 6학년에 편입했고, 이를 마친 후에 1913년에는 동교 고등과로 진급하여 1914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가 사립학교를 다니다가 공립학교로 전학했던 것은 상급학교의 진학자격을 얻기 위해서 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그가 이수했던 초등교육과정을 박문학교에서의 4년 및 인천공립심상소학교에서의 1년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중등교육기간으로는 인천박문학교 고등과 2년 및 인천공립심상소학교 고등과 1년에 걸친 3년의 과정을 마쳤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 자신은 각 단계의 학교를 언제나 최우등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學制과 고정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자격을 인정받아 일종의 고등교육기관이었던 수원농림학교에 최우등관비생으로 1914년 입학하여 농학을 연수했다.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8년 서울중앙기독청년회관 영어과에 입학했다. 이곳에 입학한 다음해인 1919년 그는 영어과 야간부에서 계속 수강하면서, 중등교육기관이었던 용산 천주교 신학교(소신학교) 강사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그는 2개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1920년 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는 미국에 도착한 직후 메리놀선교회의 도움으로 동 선교회의 예비신학교인 Venard School에서 교장이였던 Byrne 신부의 지도 하에 반년간 영어를 비롯한 기타 과목을 학습했다. 그후 그는 맨허턴 대학에 입학했는데 이 대학은 ‘그리스도교 교육수도회(Frateli delle Schuole Christiane)'에서 운영하던 4년제 정규대학이었다. 그러나 이 대학은 장면이 입학했던 1921년 당시는 기본 교양교육을 중심으로 한 고등교육기관으로서 특별한 학과가 구분되어 있지는 아니했고, 이 대학의 졸업자에게는 문학사(BA) 학위가 수여되었다. 장면은 이 대학에서 3개년 동안 종교․철학이나 영어․프랑스어 등과 같은 기본적인 과목 이외에 역사학을 비롯홰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여러 학문을 수강했고, 자연과학에 관한 학점을 취득했다. 이러한 그의 수강과목에 입각하여 추론해 보면, 그가 재학했던 당시의 맨허턴 대학은 고등 교양교육에 치중하여 교육하던 문과 과정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맨허턴 대학에서 장면이 전공했던 분야를 구태어 논하자면, 그가 취득했던 학점이나 당시의 관행을 감안할 때, 그는 맨허턴 대학 문과를 졸업했다고 표현해야 한다.

 
맨허턴 대학의 학적부에 의하면 장면은 1921년 9월 학기에 맨허턴 대학(Manhanttan College) 1학년에 입학했다. 입학당시 그의 거주지는 메리놀 선교회였고, 3년 6학기간에 걸쳐 수업을 듣고 1924년 6월에 질병으로 인해서 학교를 떠났다. 그에게 문학사 학위가 수여된 것은 그가 대학 3년 과정을 수료한 다음 해인 1925년 6월 4일이었다. 이 때 그는 그의 입학 동기생들과 함께 문학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따라서 장면은 맨허턴 대학의 1925년도 클라스로 분류되고 있다. 최근 맨허턴 대학 총장은 서한을 통해서 장면이 4개년 8학기를 마치지 않았음에도 3년 과정을 수료한지 1년 후에 문학사 학위를 수여받았음을 밝히면서, 아마도 4학년 과정은 지도교수의 특별지도를 받아서 문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장면은 맨허턴 대학을 입학하기에 앞서서 이미 수원농림학교(SooWon Agricultural College)를 졸업한 바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3년의 수학기간을 수료하고도 1년후에 문학사 학위를 받았던 것은 아마도 수원고등농업학교에서 취득한 학점을 뒤늦게 추인받을 수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함이 더 타당할  것이다. 맨허턴 대에서 그에게 영어를 교수했던 Bonaventure Thomas 수사는 장면이 장면이 학창시절에 동료 학생들 가운데 특출한 인물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후 그는 1949년 맨허턴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의 학위를 받았고, 1950년 훠담 대학과 1957년 시튼홀 대학에서도 명예법학박사의 학위를 취득했다.

3) 생애

 
교육을 마친이후 그의 생애는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우선 종교운동가로 활동했다. 그가 수원농림학교를 마치고 소신학교의 교사로 취임했던 것이나, 미국 유학을 마치고 평양에 있었던 메리놀회 한국지부에서 활동했던 경력 그리고 가톨릭평신도운동에 투신하여 노력한 사례 등은 종교운동가 내지는 신앙인으로서 그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일이다.

 
그는 동시에 교육운동가였다. 이 교육운동은 종교운동과 밀접한 관련하에 진행되었다. 그의 교육자로서의 면모는 소신학교 교사로서의 경력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일이지만, 1931년 이후 해방 직후까지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던 기간에 집중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이 기간동안 그는 식민지하의 조선인들에게 근대교육을 수행하고 있었다.

 
장면은 특출한 외교관이었다. 그의 외교적 활동은 1948년 제3차 유엔총회파견 대한민국 대표단 수석대표로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유엔으로부터 대한민국정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 테러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바티칸 등의 협조를 이끌어 내며 많은 노력을 전개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은 가능했다. 또한 그는 1949년 대한민국 주미 특명전권대사로 부임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그의 외교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은 30여개국으로부터 대한민국에 대한 개별승인을 이끌어 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본국정부의 훈령마저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유엔군의 한국참전을 이끌어 내는 데에 특출한 공을 세웠다. 그후 그는 바티칸 및 호주, 뉴질런드에 대통령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활동을 전개한 바도 있었다. 이러한 그의 외교적 업적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유지에 있어서 초석이 된 것으로 평가해 줄 수 있다.

 
한편, 장면은 정치인이었다.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행적은 그가 1946년 民主議院의 議員, 立法議院의 議員으로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1950년 11월 국무총리가 되어서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들의 생활보장을 위해서 양곡배급을 단행했다. 국민방위군 문제를 처리했고, 국익 수호를 위해서 외국과의 접촉을 계속했다. 그는 1955년 민주당 창당과 더불어 최고위원에 부임했고, 그 다음해에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자유당 치하에서 반독재투쟁의 최일선에 서서 민주주의의 신장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4․19혁명 직후 부통령직을 사임했고,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로 선임되었다. 그는 이 기간동안 민주주의를 실천했고,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워 경제개발계획에 착수하는 등 효율적으로 정부를 이끌어 오다가 5․16 쿠데타에 의해서 실각했다. 그는 정치 일선을 떠난 후 종교적 명상과 활동과 전념하다가 1966년 6월 4일 서거했다.


    
3. 신앙


1) 신앙생활의 배경

 
그가 천주교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부모의 영향이었다. 그의 부친 張箕彬은 1886년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당시는 종교신앙의  자유가 공인된 직후였고, 그가 관립영어학교에 재학 중이던 때였다. 그의 신앙은 母系에 의해서도 강화되었다. 그의 외가는 외조부모 시절부터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그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사립박문학교를 다니면서 신앙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소신학교 교사 생활을 하면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엄격한 신앙생활을 목도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바로 잡았다. 또한 그는 맨허턴 대학에서의 교육을 통해서 전통적인 가톨릭신학과 철학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 그의 신앙은 다져지고 있었다.

2) 신앙의 특성

 
그의 신앙에서 드러나는 특성으로는 순교자 영성과 수도자적 복음3덕의 영성을 들 수 있다. 그는 1925년 조선순교복자 79위 시복식에 조선 신도대표로 참석한 후 순교자 신심을 더욱 강화해갔다. 그의 이러한 순교자 신심은 1931년에 『조선천주공교회 약사』를 저술하면서 조선 순교복자에 대한 지극한 상찬을 통해서 존경을 표시하고 있었던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또한 그는 1921년 8월에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했다. 이 이후 그의 생활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영성에 의해서 이끌어져 가고 있었다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복음3덕으로 칭해지는 ‘청빈의 덕’을 그는 정치인이 된 이후에도 실천하여 부정과 부패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정하고 이를 실천해 갔다. 그는 ‘정결의 덕’을 실천해서 자신의 평생동안 천주십계의 6계명을 단 한번도 범한 적이 없음을 자신있게 말한 바도 있었다. 그는 ‘순명의 덕’을 실천해서 교회의 일에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그의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특성을 살펴보면 그가 수도자적 영성을 세속 안에서 실천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근본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신앙에서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결정된 전통적 신앙을 받드는 측면이 당연히 지배적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호교적 글을 통해서 천주교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타종교에 대해서도 개방적 자세를 견지했다. 그가 평양에서 활동하던 시절 당지의 주기철 목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나, 개신교 신도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은 그의 신앙이 편협하지 않고 개방적 것이었음을 나타낸다. 그는 평신도사도직 운동의 선구자가 되어서 활동했다. 평신도사도직 운동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를 보급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다.

 
그는 신실한 신도요, 양심적 교육자였다. 그는 탁월한 외교관이었고 권모술수를 버리고 정도를 걷던 정치인이었다. 그는 민주주의의 신봉자였으며, 경제개발계획의 선구자였다. 그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인이 나아갈 길을 몸소 제시해주었다. 한국현대사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다행이다. 그의 성공과 좌절을 거울삼아 우리는 우리 앞에 당면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더욱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