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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8. UN군의 6·25 전쟁 파병을 이끌어내다.

 여기서는 운석 선생이 동서간 이데올로기 대립의 산물로서 한반도에서 벌어진 국제전인 6·25 전쟁을 맞아, 그의 정치적 신념인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활동을 전개했는지를, 선생이 남긴 “우리는 자유를 수호했다―피어린 6·25 동란의 회고”라는 부제가 달린 「화부서 겪은 6·25」(1954)와 「(한국의 은인) 덜레스 씨를 추억한다: 상 」(1959), 「6·25 동란과 워싱턴」(1965)이라는 3편의 6·25 전쟁 관계 기고문과 당신의 긴박한 현장을 담은 사진과 문서들을 곁들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운석 선생은 6·25 전쟁 발발 두 달전 미국 국방장관 애치슨의 아시아지역에 있어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애치슨라인’으로 야기된 국방상의 결함을 태평양 연안국가간의 집단안보체제인 ‘태평양 동맹’의 결성을 통해 보완하려는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호주와 뉴질랜드 등을 방문해 교섭을 전개했으나 구체적인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귀국한 바 있었다. 이후 선생은 수주간의 서울 체류 기간 동안 북한군의 심상치 않은 동향과 이에 대한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38선 방어 실태를 목격하고 미국 측에 군비 증강에 대한 지원을 교섭하고자 급거 임지로 귀임했다.

1950년 6월 3일 운석 선생 가족

≪1950년 6월 3일 가족을 동반하고 워싱턴으로 귀임하는 도중 로스앤젤레스에 잠시 기착한 운석 선생≫

[왜 선생은 급거 임지로 돌아갔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6·25 사변 돌발 두 달 전인 사월에 필자는 대통령특사로 태평양동맹의 가능성을 타진키 위하여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정부를 역방하고 그 전말을 보고차 귀국하여 수주간 묵는 동안 38선의 수비상태를 보고 돌아와 그 공소(空疎)한 실태에 자못 우려를 금치 못하였었다. 38선 수비의 강화를 건의하고자 이 대통령께 시찰 보고를 드리고 있을 즈음 수 명의 국군 고급참모들이 들어와 대통령께 38선 부근에 적군이 집결하는 징조가 보인다는 보고가 있었다. 가뜩이나 38선 수비가 거의 영이라는 실태를 목도하고 다시 이런 불길한 정보를 듣고 보니 더욱이 초조감을 금할 길 없어 하루 바삐 화부로 귀임하여 미 당국에 군비 증설을 교섭할 심산으로 6월 초순 화부로 향발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미국 도착 즉시 제3차 유엔총회 때 깊은 인연을 맺은 자칭 “대한민국 탄생의 산파”였던 덜레스 미국무성 고문이 방한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위한 만찬을 열어 38선 시찰과 국회 개원식에 참석해 “유사시 미국이 한국을 즉각 지원하겠다”는 언약을 해줄 것을 부탁하는 막후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의 교섭은 효력을 발휘해 덜레스는 38선 시찰과 국회에서 “한국이 어떤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받을 때는 홀로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연설을 하고 3일 간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6월 22일 한국을 떠났다.

1950년 6월 9일 한국으로 떠나는 덜레스를 환송하는 운석 선생

≪1950년 6월 9일 한국으로 떠나는 덜레스를 환송하는 운석 선생≫

[덜레스는 한국에 비상 사태 발생시 미군의 개입을 최초로 언명한 미 정부 관계자다. 덜레스의 미국 개입 발언을 유도한 운석 선생의 만찬 로비 성공담. "때마침 덜레스 씨가 한국 실정 시찰하러 국무성 고문격으로 도한(渡韓)한다는 말을 듣고 화부 도착 즉일로 동씨와 회식하면서 도한 후 반드시 38선 방비상태를 직접 시찰할 것과 만일 유사시에는 미국이 틀림없이 한국에 내원(來援)하겠다는 보장을 새로 열릴 국회 개원식에 나가서 공약(公約)하여 달라는 두가지 특청을 강요하다시피 했다. 덜레스 씨가 한국시찰을 마치고 이한한 지 불과 이틀만에 6·25 동란이 터지고야 말았다."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후일 "덜레스 씨는 6·25 직전에 한국에 다녀온 회고담을 하면서 '한국으로 갈 때에 당신의 부탁으로 애치슨 장관의 양해를 얻고 한국 국회에 나가서 미국 원조를 약속했는데 며칠 후에 6·25 공산군 침략이 발생하여 꼼짝 못하고 미국의 대한 출병을 건의하게 되었던 것이니 미국 출반 전에 당신에게서 얻어먹은 저녁 한끼 값이 굉장히 비싸더라'고 농담"을 하였다 한다. 여하튼 선생의 만찬 로비는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러면 운석 선생이 민족사의 최대의 비극, 그의 표현으로는 “청전벽력”의 6·25 전쟁을 맞아 워싱턴에서 어떠한 활동을 전개했는지를 그의 회고를 통해 들어보자. 당시 선생은 “이 대통령으로부터의 장거리 전화로 급보를 듣고 즉시 국무성으로 달려가 철야하면서 UN안보리에 호소할 대책을 세우고 익일 미 군용기로 Lake Success의 UN본부에서 열린 긴급안보이사회에 참석하여 당사국 대표로서 북괴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하도록 호소”하였다. 당시 선생은 “6·25 사변은 청천벽력으로 전세계를 진동할 만큼 그 파문의 미친 바 또한 전무한 것이었다. 동란이 발발되자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만큼 주미대사 겸 유엔 한국 대표이던 나로서는 단신으로 임기응변의 기지를 하다여 국난을 타개하는 중책을 자부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다음은 전란 발발의 소식을 접한 순간부터 UN안보리 제소에 이르는 긴박한 과정에 대한 회상.

 “동란 첫 뉴스가 워싱턴 대사관으로 들어온 것은 24일 밤 9시경(미국은 하루 늦다), AP통신으로부터의 전화이었다. 연달아 UP통신의 전화도 들어왔다. 이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시각을 머물지 않고 국무성으로 연락해 보았으나 마침 휴일인 토요일 밤인지라 고관들은 다 주말휴양차 시외로 나가고 없었다. 10시 반경 서울로부터 대통령의 긴급전화가 왔다. 노(老) 대통령은 황당한 어조로 ”북한 적군이 탱크까지 가지고 대거 침입하여 국운이 위급하니 즉시 미 대통령과 UN에 호소하여 구국의 방도를 강구하라“는 명령이다. 나는 천지가 아득한 가운데 즉시로 차를 달려 국무성으로 직치(直馳)했다. 때마침 급보를 듣고 참집(參集)한 고관들과 정좌(鼎坐)하여 이 대통령의 긴급 메시지를 전달하며 대책을 세우기로 하되, 우선 시외에서 휴양 중인 애치슨 장관에게 급보하고 동장관은 미주리 자저(自邸)에서 휴양중인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화로 보고하여 본건을 급속히 UN안보이사회에 제소하기로 건의하여 그 구두재가를 받았다. 국무성 UN담당 힉필슨 차관보는 벌써 취침중인 UN사무총장 리 씨를 장거리전화로 깨워 한국사변 긴급제소건을 당일로(벌써 자정이 지났다) 안보리에 상정 처리할 것을 요청하고 리 총장은 안보의장에게, 안보의장은 각 이사에게 통고하여 일요 하오 3시에 레익썩세스에서 긴급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날 밤 미국 측에서는 무초 대사에게서 아무 연락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이 대통령으로부터의 전화가 유일의 신빙할 만한 제소근거이었다. 우울과 긴장 가운데 철야를 하고 조조(早朝) 비행기로 레익썩세스를 향하여 급항(急航)하는 도중 한국대표로서의 대안보제소문을 작성하였다.”

 다음은 운석 선생이 작성한 제소문이다.

 “국제연합의 승인을 받은 우리 대한민국 정부는 바야흐로 북한 괴뢰군에 의한 불의의 공격에 대항하여 고전분투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우리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통지를 받았습니다. 즉 1950년 6월 25일 평화스러운 일요일 새벽 적의에 찬 북한 괴뢰군은 여러 지점에서 우리 영토를 침범하면서 사면팔방으로 공격을 개시해 왔습니다. 수도 서울 북방 약 40마일 지점에 있는 개성시는 공격을 받았으며 옹진반도에서는 철퇴를 당했습니다. 일부 북한 전투기들은 서울 근교에 있는 김포공항을 포함한 우리 영토를 침공하면서 공항의 비행기들을 총격하였습니다 … 북한 괴뢰군은 이 침공 행위에서 전차, 대포, 6인치 포와 전투기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대규모 침공은 그들이 침략전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 침략의 목적은 재론할 여지없이 우리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키고 우리 나라를 북한 공산 괴뢰정권 치하에 몰락시키려는 것입니다 … 남침은 하나의 엄연한 침략행위일 뿐 아니라 국제평화와 안전에 대한 명백한 위협입니다. 본인은 국제평화에 대한 이 위협을 당장 제거해 줄 것과 이 침략자들로 하여금 모든 공격을 즉각 중지하고 우리 영토로부터 철퇴하도록 강력히 조처해 줄 것을 귀 안전보장이사회에 호소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현존은 국제연합 덕분입니다. 세계 평화유지를 위한 기본적 책임을 지고 있는 귀 안전보장이사회는 이 긴급한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리라고 본인은 확신합니다.”

미국의 한국 전쟁 참가 경위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 낸 선생의 외교 활동을 정리한 "미국의 한국 전쟁 참가 경위"≫

[총 4쪽에 이르는 이 문서는 6·25 전쟁 발발 직후로부터 6월 30일에 이르는 기간 미국의 참전이 어떻게 결정되었는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고 있다.]

애치슨 국방장관

≪6·25 전쟁 발발 하루 뒤에 워싱턴의 공항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도착을 맞이하는 애치슨 국방장관(Dean Acheson)의 긴장된 모습≫





 안보리의 결의가 끝난 다음 날 선생은 백악관으로 트루먼 대통령을 방문해 군사원조의 지연으로 인한 한국군의 전력약화, 즉 “소총 한 자루 보내지 아니한 미국의 냉정태도로 인하여 거의 무방비 상태로 오늘날의 침략을 당하게 된 책임”을 트루먼에게 추궁하고 미국 언론을 상대로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 데 주력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트루먼 대통령은 “낙심(落心) 말고 UN의 총의로 결정짓자”고 위로했으며, 그 다음 날로 “해·공군의 급파를 단독 발표함으로 안보리 결정”을 촉진시켜다 한다.

 이와 같은 운선 선생의 미 정부에 대한 6·25 전쟁 개입 요구와 덜레스와 맥아더의 미군 파병 건의가 잇따르자 트루먼 미 대통령은 중국이 공산화된 마당에 한국마저 공산화되면 월남을 위시한 필리핀과 태국 등 동남아 국가들이 차례로 붕괴된다는 “도미노 이론”에 의거해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세력의 평창을 저지해야 한다는 새로운 동아시아 정책을 세웠다. 이에 따라 종래의 모해했던 국무성의 애매한 자세는 사라지고 미군의 참전이 결정되었다. 이에 미국의 영향력이 행사되는 가운데 6월 27일에 열린 안보리 2차 회의에서 북한군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회원국들이 이를 격퇴시키는데 응분의 협조를 할 것이라는 결의안이 7대 1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선생은 1951년 초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귀국하기까지 주미대사로서 “UN군 총사령부 설치, 대한구호안(對韓救護案) 가결, 안보회의 참석 활동, 대본국 방송 계속, 가톨릭 교회를 통한 구호금품 급송 추진” 등 전쟁에서의 승리와 전쟁으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명렬한 외교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안보이사회 소집 요청 소한

≪그로스(Enest A. Gross) 미국 유엔대표가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낸 1950년 6월 25일자 안보이사회 소집 요청 서한≫



유엔 결의안

≪1950년 6월 25일에 열린 473차 안보이사회 회의에서 미국 대표에 의해 제출된 한국에 대한 침략행위에 대한 제소에 관한 결의안≫



제473차 안보이사회 표결 순간

≪제473차 안보이사회의 북한의 침략행위에 대한 미국대표의 제소에 대한 표결의 순간≫

[거수한 각국 대표들의 모습이 이사회의 결정이 임박했음을 보여준다. 사진 우측 맨 끝에 운석 선생과 한표욱 1등 서기관의 모습도 눈에 띈다. 소련 대표가 불참한 이 회의에서는 북한국의 남침을 불법행위로 규정하였다. 그러면 운석 선생의 입을 빌어 당시 상황을 들어보자. "전례 없는 일요 개최의 긴급회의를 방청하고자 광장에는 벌써 수천 명의 군중이 쇄도해 있었다. 긴장한 분위기 가운데 정각 3시에 개회되자 제안자 미국의 제소 이유 설명이 있은 후 당사자인 대한민국 대표를 초청하여 발언권을 주자는 결의가 통과되어 필자는 정식으로 제소 연설을 행하여 적군(赤軍) 불법 남침에 대한 UN으로서의 긴급조처를 촉구했다. 연달아 미국 결의안이 전광적으로 채택되어 9 대 0으로 통과했다. 그 결의 내용은 공산군의 침략행위 즉시 정지, 38 이북으로 철퇴, 회원국가들의 공산군 원조 금지가 그것이다. 안보리에서 우리 한국 문제가 이처럼 쉽사리 통과된 것은 때마침 소련 대표가 중국 대표를 중공 대표로 대체하라는 생트집을 하면서 출석을 거부하고 있던 중이라 상투적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각 안보이사들을 개별적으로 방문하면서 끝까지 한국 문제의 선처를 요청했으나 유고·인도·이집트 3국은 동정은 하면서도 여러가지 이유로 중립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운석 선생

≪백악관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고 나오는 운석 선생≫

[주국의 앞날을 근심하는 침울한 선생의 표정이 사태의 심각성을 웅변한다. 다음은 선생의 당시 상황 회고. "안보리의 제일차 결의가 통과된 익일 나는 당황히 화부로 둘아온 트루먼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왕방(往訪)하고 이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우리 정부가 6개월 전 국군의 군비증원을 요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금(于今, 지금까지) 소총 한 자루 보내지 아니한 민국의 냉정태도로 인하여 거의 무방비 상태로 오늘날의 침략을 당하게 된 책임까지를 추궁하는 태도를 보였다. 잠시 경청하던 트씨는 '귀하의 초조한 심정은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너무 실망치는 마시오. UN이 선처할 것입니다.' 하는 함축 있는 위안의 말로 응답하였다. 애치슨 장과은 옆에 앉아서 우수에 싸여 묵묵불언이다. '너무 실망 말라'는 일언에 일루(一縷)의 희망을 가지며 회담 약 20분 후에 퇴출하자 나는 백악관 출입기자단에게 어느덧 포위당해 버렸다. 플래쉬 라이트의 공격을 받으며 그들을 통하여 전 미국민에게 한국의 위기를 절규하는 동시에 시급한 구원(救援)을 호소하여 국민여론을 환기시키기에 전력을 다해 보았다."]

안보리 474차 회의

≪1950년 6월 27일 열린 안보리 474차 회의에서 북한에 대한 대응 군사행동을 결의하는 표결 장면≫

[사진의 오른쪽에 미국의 결의안에 찬성을 표시하기 위해 올린 7개의 손은 중국, 쿠바, 에쿠아도르, 프랑스, 노르웨이, 영국, 미국 대표의 손이다. 반대 1표는 유고슬라비아였다. 다음은 운석 선생의 회고. "25일 제1차 회의에서 북한 괴뢰군에게 즉시 철거를 명한 아무 보람 없이 괴뢰군은 맹렬한 기세로 남진을 계속하였음에 따라 27일 제2차 회의에서는 북한 괴뢰군을 침범자로 규정하고 회원 제국가는 이 침범자를 격퇴시키는데 응분의 협조를 할 것이라는 결의안을 7대 1로 채택하여 트루먼 대통령의 출병 성명과 아울러 적군이 침범한 지 불과 2일만에 응징의 철퇴는 벽력같이 내리게되었다."]

한국 지원을 호소하는 운선 선생

≪미국민에 한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운석 선생≫

[선생은 1950년 7월 7일 미국의 라디오 프로그램 "언론과 더불어(Meet the Press)" 에 출연하여 6·25 전쟁의 참상을 알리면서 미국민들의 지원을 호소하였다. 또한 선생은 본국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미국의 소리"를 방송했으며, 이로 인해 평양에서 활동 중이던 누이동생 정온 수녀를 잃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다음은 선생의 회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미 국무성은 발할 것도 없고, 각 사회단체, 언론계, 종교단체에 거듭 호소함으로써 이들의 호응을 받아, 본국의 국민들이 실망 속에서 체념하지 말고 희망에 찬 전투의식과 반공태세를 갖추도록 있는 힘을 다 기울였다. 나는 안보 이사회가 끝날 때마다 거의 매일 '미국의 소리'를 통하여 초조하게 기다리는 우리 동포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미국의 지원에 감사를 표하는 운석 선생

≪미국민의 한국전 지원에 감사를 표하는 운석 선생≫

[1950년 9월 유엔본투에서 열린 한국전 참전 부상자들을 위한 헌혈 행사에 참석한 운석 선생]

구제품

≪구제품을 아는가≫

[가톡릭 교회 등을 통한 구호물품의 한국 지원은 운석 선생의 노력에 의해 시발되었다. 이는 선생이 스펠만 대주교 등 미국 가톨릭 교회와 맺고 있던 유대관계를 배경으로 미국 가톨릭 구제협의 본부를 통해 구호품의 수집에 성공하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