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증언 · 채록 · 회고

회고 - 장 박사의 건강과 나 (유병서)

유병서(兪炳瑞, 의학 박사)



 
내가 부족하나마 장 박사님을 모시고 그분의 건강 문제를 돌보아 드리기 시작한 것이 어언 10년이 되었다. 그전에도 내가 현재 살고 있는 혜화동에 근 30년 간을 살았고, 그분도 이웃에서 수십 년 전부터 사셨기 때문에 그때부터 뵈었고, 늘 존경하고 지내면서도 그분의 건강이 나쁘지 않아서 별로 찾아뵙지 못했다.

 
4·19 직후의 공백기에 그분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보아드리기 시작한 것이 줄곧 작고하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성실한 교육자였고, 양심적인 정치가였으며, 또한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장 박사께서는 매사에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건강에 대해서도 굉장히 꼼꼼하셔서 의학에 대한 상식도 웬만한 의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자세하게 알고 계셨다. 그래서 자신의 건강 상태도 당신이 잘 알고 계셨는데, 제2 공화국의 국무 총리로 취임하신 때에는 너무도 일이 많고 바쁘셔서 침식을 잊을 정도였기 때문에 건강에 해를 끼치셨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1960년 여름 내가 서독에서 열린 세계 의학 협회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면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열리는 국제 흉곽 학회, 스위스의 바젤에서 열리는 국제 내과 학회 등에서 논문 발표도 하고, 때마침 열렸던 로마 올림픽 대회를 구경하고 미국 심장 학회에 참석했다가 그해 11월 중순에 귀국한즉, 장 박사님의 사모님께서 반도 호텔에 계시는 박사님의 몸을 좀 진찰하러 가자고 하셔서 밤 10시가 지나 찾아뵈었다. 깊은 밤이라 좀 쉬는 시간에 뵈오려고 했더니 상상외로 손님이 호텔의 여러 방은 물론 심지어는 복도에까지 차서 그분들을 일일이 만나시고 12시에나 저녁 진지를 잡수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박사님께서 이렇게 하시면 건강을 유지할 수 없으니, 꼭 시간을 짜서 일을 보십시오” 하고 권했더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라고 도리어 반문하셨다.

 
시골에서 만나려고 올라와서 며칠씩 여관에 머물면서 오는 손님들을 다 만나 주셔야 한다고 하시면서, 여러 가지 일이 복잡한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하셨다.

 
정치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나로서는 그 내용을 알 바 아니나, 우선 국고가 탕진된 것을 말씀하셨는데, 개인이나 국가나 가장 중요한 것이 경제 문제이고 보면, 학생들이 이룬 혁명이라 이러한 점에 미리 손을 쓰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고, 시골에서 올라와 며칠씩 묵으면서 만나겠다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사고 방식도 좀 생각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여하튼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나서 장 박사는 다시 야인이 되었으며, 한때는 옥중의 몸이 되셨다. 옥중에서 건강이 나빠지셨다고 좀 와 달라는 연락이 있어 곧 찾아가 뵈옵고 약을 보내 드린 일이 있었다.

 
그 후 당신께서는 몸에 대하여 주의하시는 점이 대단하셔서 식사라든가 그 밖의 모든 점을 일일이 나에게 물으셔서 생활하시기를 5, 6년이나 하셨다.

 
1965년 겨울도 거의 저물어 가는 어느 날 박사께서 몸이 나빠지셨다고 다시 와 달라기에 급히 달려가 뵈오니 자리에 누우셨는데 전신에 황달이 대단하셨다. 나는 즉시 입원 가료하시기를 권고하였다. 원래 정부 수립 후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장 박사가 한국 수석 대표로 파견되었을 때에 간염을 앓으신 일이 있었다고 들었고, 또 그 후 1952년 부산에서 있었던 정치 파동 당시 나는 미국에 유학 중이라, 자세히는 몰라도 같은 병을 앓으셨다고 하시기에 얼른 간장 질환을 생각하여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옥중에서 앓으실 때에도 대단하지는 않으셔도 그 병이어서 이번은 큰 일이라고 단정하여 그 다음날로 성모 병원에 입원하시도록 하였다.

 
며칠 동안 자세한 검사를 한 결과 간 조직이 아주 나빠진 것이 확인되었다. 물론 황달 같은 증세는 퍽 차도가 있었으나, 재생하기 어려운 간장 질환이라 예후(豫後)는 여전히 불량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가끔 병환에 대한 것을 물으신다기에 가서 병원측의 의견을 들어서 전달하는 데 있어 그 방법에 나는 퍽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세심한 분이신데 그 예후를 그대로 말씀할 수도 없고, 희망적으로 이야기하려 하니 거짓말이 되고 해서 가족들에게만 사실대로 알리고 부득이 거짓말을 했다.

 
내가 미국 유학 당시에 겪은 일이지만 그들 중환자들은 의사에게 예후를 물어서 희망이 없어도 위로삼아 낫는다고 말하면 그 말의 진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자기가 확실히 나으면 돈을 얼마 내고, 만일 못 나으면 의사가 얼마 내라는 내기를 하자”는 말을 잘하였다.

 
이럴 때 경험이 없는 의사는 자백하고 마는 수가 더러 있다. 마침 박사께서는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나오시지 않아서 크게 땀을 빼지는 않았으나 송구스럽기는 하였다.

 
3, 4개월의 꾸준하신 투병의 결과도 신통치 않아서 몸은 점점 쇠약해 가고 음식을 잘 잡수시지 못했다. 하루는 와 달라 하시기에 곧 가서 뵈었더니, 이제는 자연을 저버린 병실의 환경에 견디기도 어렵고 식사도 불편해서 퇴원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박사님의 간청에 못 이겨 당장 의사와 의논하였더니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사께서는 퇴원하셔서 내게 계속 치료해 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저의 수고는 아무 상관이 없으나 병이 다 나으실 때까지 병원에 계십시오” 하고 권고하였으나, 굳이 주장하시고 또한 가족들도 당신의 뜻대로 해드리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결국은 퇴원하여 약 10여 일 동안 병원에서 하던 그대로 내가 왕진 가료를 하였다.

 
그러나 병은 이미 기울어진 지 오래이고 식사까지 전혀 못하시니, 점점 나의 책임이 중함을 느껴 여러 고명한 의사들을 모아서 같이 보도록 하자고 제의하여, 우선 성모 병원의 내과 과장인 전종희 박사, 연세 대학 병원의 내과 과장인 이보영 박사, 성가 병원의 내과 과장인 전 박사 등이 나와 같이 진찰하고, 장 박사의 장남 되시는 장진(張進) 씨를 우리 집으로 청해서 기탄 없는 의견을 이야기했다.

 
가족들은 인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박사님께 그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분은 진찰하는 여러 의사에게 최선을 다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시는 것이었다. 사람의 생에 대한 애착은 누구나 같은 것이고 또 그지없는 것이다.

 
그 후 연세 대학 병원의 최 박사께서도 보시고 결국 의견을 같이했으나, 당신의 의향이 전망이 좋은 성가 병원의 병실이 좋겠다고 하시기에 가족들은 당신의 소원대로 그곳에 또 며칠 입원하시도록 했다. 역시 별도리 없이 결국 임종은 시간시간 가까워 오기 시작했다.

 
전 민주당의 여러 동지들과 친지들이 최후의 손을 써 보느라고 연세 대학 병원에까지 입원하시도록 하였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의학은 많은 인명을 연장시킬 수 있게 되었으나, 장 박사의 수명은 그 이상 더 연장시킬 만한 아무런 능력을 가지지 못한 우리 의사들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연세 대학 병원에서 퇴원하여 박사께서 오랫동안 사시던 명륜동 자택에서 1960년 6월 4일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이와 같이 오래도록 병과 싸우는 동안에도 그분의 성격은 여실히 나타났다.

 
온후하시고 인자하셨으며 매사에 세밀한데, 한번 화를 내시면 대단하셨다고 그분의 자제 한 사람이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르크 국제 학회에서 만났을 때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한번은 내가 정치가가 되신 연유를 물었더니 “멋모르고 발을 디뎌 놓았다가 꼭 잡히고 말았는데 아예 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남들이 보기에는 초대 주미 대사를 시작으로 하여 부통령을 거쳐 국가 수반까지 지냈으니 관운이 좋은 분이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마는, 당신은 그런 자리를 호화로운 자리로 생각하신 것이 아니고 도리어 가시밭 자리로 아셨다.

 
얽히고 섥힌 정계의 내막은 알 바 없으나, 우리 나라의 민도는 아직도 개혁할 바가 많다고 느껴진다. 가정적으로 행복하시던 그분이 정계에서 많은 시련을 겪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정계에서 은퇴하신 후에는 주로 신앙 생활에 주력하셨고 시간이 있는 대로 성서 연구 또는 집필 생활로 보내셨다고 한다.

 
현재 서독에서 활약하고 계시는 이수길 박사의 혼인 주례를 내가 부탁해서 반도 호텔에까지 출입하신 것이 큰 출입의 하나였다고 할 정도로 두문 불출하셨다.

 
다행히 이수길 박사의 장남이 그분의 마지막 여생에 옆에서 시중을 든 것은 쓸쓸한 인생의 고독을 느끼지 않게 했다고 생각된다.

 
전일에 미망인의 말씀이 “시외의 공기가 좋은 데 나가셔서 살았으면 하시더니 아주 나가 버리셨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쉬이 한번 성묘하러 가 볼까 한다.

 
그분은 가셨지마는 그분이 생각하시던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 이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는 실현되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