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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채록 · 회고

회고 - 장 박사 선종기 (유수철)

유수철(柳秀徹, 혜화동 본당 신부)



굳은 신앙인


 
장면 박사를 처음 안 것은 1932년 내가 동성 학교에 입학했을 때 이지만, 그분을 좀더 잘 알기 시작한 것은 내가 철이 좀 들기 시작할 3학년 때 박사님께 영어 회화를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처음에는 여태까지 다른 선생님들께 배워 온 것과는 전혀 다른 발음에 어리둥절했지만, 이것이 진짜 영어 발음인가 보다 생각하였다. 다른 선생님들보다 특이한 인상을 주었으며, 싫증 안 나고 재미있게 가르치시고, 점잖고 어딘가 침범할 수 없는 위엄을 느끼게 하고, 열심한 교우 선생님으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우리가 5학년 졸업반이 되던 해, 박준호 교장께서 별세하시어 장 박사께서 후임 교장이 되시고 신임 교장으로서 우리에게 첫번째 졸업장을 수여하신 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분은 언어, 행동, 그 몸 전체에서 신앙심이 넘쳐흐르는 철두 철미한 종교인이었다. 아무리 바쁜 정계 생활 중에서도 매일같이 미사에 참례하고 영성체를 하셨다 한다. 신부에 대한 존경심이 참으로 커서 신부에게는 노소를 불문하고 극진한 존경을 표시하며 당신의 제자 신부에게도 최상급의 존경어를 결하시는 일이 없었다.

 
또 그는 고해 성사를 자주 하시는 분으로 대개는 정규적으로 2주일에 한번 이상 꼭 받는 성실한 교인이었다. 때로는 그의 고해를 듣는 내가 듣기에도 ‘이런 것도 죄일까?’ 싶은 것까지 세밀하게 고해하셨다. 그토록 양심을 깨끗이 가지기에 최선을 다했으며 사소한 일들까지 깊이 뉘우치는 겸손한 태도였다. 여기에 내 스스로가 감명받은 바 지대함을 밝혀 둔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장 박사의 위대한 생애를 지켜 보았던 것이다.

 
한평생 독실한 신앙 속에서 살았고, 자기 한몸을 오직 하느님을 위해 바치려고 힘쓴 분이다. 이제 그분을 잃은 아쉬움은 우리 모든 신도는 물론 전국민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겨 준 것이다.


성당과의 깊은 인연


 
1962년 9월에 혜화동에 부임한 이래 나는 매일 새벽 미사에 빠짐없이 참석하시는 장 박사를 보았다. 대개는 5분 내지 10분 전에 부인 동반하여 성당에 나타났다.

 
그러던 분이 건강이 좋지 않아 새벽 첫미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오후 미사에 나오시기 시작한 때는 작년 초겨울이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때에는 자정 미사에 나오셨고, 금년(1966년) 정월 초하루에도 아침 미사에 참여하신 후 교우 유지들과 신년 인사를 나누었다.

 
한편 그는 눈을 감으시던 마지막날까지 전교 활동에 전력하신 분이다. 병중에도 취급할 수 있을 때까지 예비 교우·신입 교우를 찾아 다니며 권면 지도 활동을 계속했다. 그의 노력으로 수많은 저명 인사들이 영세하게 된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알려지지 아니한 입교자의 수는 더욱 많을 것이다.

 
나는 그분이 정계에서 은퇴한 후 비교적 가깝게 또 자주 접촉하면서 신앙인으로서의 장 박사의 전모를 알 수 있게 된 것을 한편 영광으로 생각한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그분이 혜화동 성당의 공직을 맡아 보신 것은, 해방 전 동성 학교에 계시면서 혜화 유치원 초대 원장을 지내신 것과 정계 은퇴 후 혜화동 본당 평의회 구성과 함께 그 회장직과 운영 위원회 위원장의 직책을 맡아 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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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장 박사는 장(長)자가 붙은 교회 직책을 맡기를 사양하고 평회원으로 일하기를 원하셨다. 그것을 증명하는 작은 일화가 하나 있다. 그것은 1964년 초여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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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신자들이 교회 운영에 참여하게끔 기회를 주자는 취지에서 혜화동 본당 평의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얼마 동안의 준비를 거쳐 9월에 창립 총회를 갖게 되었는데 평의회 회장에 추대될 기미가 엿보이자, 장 박사는 완강히 이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하시는 말씀이 “일은 얼마든지 하겠지만 나를 앞에 내세우지는 말아 주시오. 그렇다면 나는 평의회를 그만두겠소”라는 간청이었다. 그러나 창립 총회 날 임시 의장으로 사회를 보시던 박사님이 회칙 통과를 끝내고 회장 선출 방법을 논의하려 하자, 전 회원이 “사회 보시는 분을 회장으로 추대하오” 하며, 우레같이 박수를 치는 통에 장 박사는 당황하여 “나는 퇴장하겠소” 하며 굳이 사양하였으나, 회원들이 끝까지 양보하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수락하였고, 평의회의 상임 위원회격인 운영 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분은 정정법에 묶여 있는 구정치인이었던 관계로 자신이 회장이 되면 외부로부터 의심을 받고 교회에 해롭지 않을까 하여 염려한 것도 사실이다. 본당 운영 위원회는 매달 개최되었고 그 때마다 장 박사의 역할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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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3년 동안을 혜화동 본당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후배 양성을 위한 교리 강좌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신자 대학생들에게 교리 신학을 강의하셨던 것이다. 물론 무보수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교재까지 자신이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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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던 분이 금년 말로 만기가 되는 운영 위원장 임기를 채우시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더 한층 씁쓸한 감회를 달랠 길이 없다.


전교 회장하러 유학길


 편하신 중에도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본당 운영 위원회 월례회에 꼭 참석하여 회의를 주재해 주신 장 박사가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시고 금년 2월에 성모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내 병은 염려 마십시오. 그동안 성당에는 별일이 없습니까? 모두들 안녕하시고….”

 
병원으로 문병 간 우리에게 자기 병은 염려치 않고 오히려 성당과 교우들의 걱정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분의 교회를 위하는 성심이 이 짧은 말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입원비 관계로 고충이 많았던 것 같은데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병환에 차도가 있는 것도 아닌데 퇴원하였다. 내 생각엔 입원비 부담 때문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했다. 자택에서 병원 약을 복용하였지만 건강은 회복되지 않아 외출을 못하셨다. 그러면서도 하루에 네 시간씩 기도하는 것을 거른 일이 없었다고 한다.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받으신 성스러운 고통과 죄인들로부터 받으시는 천대를 보상하자는 뜻에서 특히 매달 첫금요일에 성체를 모시는 것이 신심 행사의 하나로 되어 있다. 장 박사는 열심히 이 첫금요일을 지켜 온 분이나, 신병으로 출입이 불가능해지자 주일과 금요일에 내가 자택으로 성체를 뫼시고 가서 영해 드리곤 했다. 병중이라 하더라도 첫금요일을 한번도 궐한 적이 없고 그의 마지막 봉성체가 첫금요일이었던 것은 특이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나는 그분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정계 은퇴 후 이주당(二主黨) 사건 직후 성모 병원에 입원했을 때 찾아갔더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시다가 “내가 왜 미국 유학 갔는지 아십니까?”라고 하시면서 재미있는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이었다.

 
태중 교우인 장 박사는 교우 부모에게서 태어나 출생 후 즉시 영세를 받은 신자로서 수원 고농에 입학하였을 때는 동료 중 제일 어린 나이였다 한다. 그래서 “입학 시험은 보았으나 도무지 합격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있다가 뜻밖에 합격 통지를 받고 보니 좀 얼떨떨했지요. 개학이 되어 수원에 하숙하고 있는데 학교에서 천주교 신자는 나밖에 없는 듯했습니다. 신교 신자들은 많았지요. 그들은 천주교 신자인 나만 보면 공박을 일삼는데,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만이 옳다고 들어 온 나로서는 그들의 말이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으나 이론적으로 그들과 대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수원에 성당이라도 있으면 가서 신부님께 알아 가지고 그들에게 응수할 수 있었을 것인데, 성당 한 군데 없고 어린 마음에 억울해서 어디 견딜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이때에 교리를 철저히 배워서 전교 회장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이것을 위하여 수원 고농을 나온 후 미국 유학을 가게 된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장 박사가 미국 맨해튼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것은 정치가가 되려는 데서가 아니고 순전히 신앙을 위주로 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미국 유학이 실현되기까지에는 교회의 힘을 입은 바 컸었고 현지에서 고학을 하면서 한편 신학 연구에도 몰두했다는 얘기를 나는 여러 차례 들었다. 즉, 장 박사의 유학이 실현되기까지 메리놀회 신부의 주선이 컸고 미국에서도 메리놀회 신세를 졌지만, 자신이 일하여 벌면서 소원이었던 프로테스탄트를 반박할 지식을 철저히 습득했음은 물론이다. 장 박사께서 번역한 ‘교부(敎父)들의 신앙’도 미국 유학 때부터 착수되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3회원


 
미국에 가서 곧 1921년에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여 재속 수도사 생활을 하였다. 이 프란치스코 3회란 재속 생활을 하면서 수도회 규칙의 일부를 지키는 수도 생활을 말한다. 이 3회의 한국에서의 시작은 혜화동 성당에서 장 박사와 오기선 신부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수도 회칙의 일부라지만 재속 생활을 하면서는 지키기 힘든 규칙이 많다. 그러나 장 박사는 이 3회 규칙을 철저히 지켰고, 금년 3월에는 프란치스코회 총본부로부터 3회원이 아닌 정회원의 자격을 수여받았다.

 
누가 일러 그분의 생애를 신앙으로 일관했다 하지 않으리요.

 
이 3회원으로서 정회원의 특권을 받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한편 장 요한 박사는 금년 5월 20일로 결혼 50주년인 금혼식을 맞는 뜻깊은 해였다. 결혼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만 하면 “우리야 어디 선이나 보고 결혼했나?” 하시면서 웃으시곤 한 장 박사였다. 18세의 수원 고농 학생의 몸으로 맞선은 고사하고 예식장에서까지 신부의 얼굴도 보지도 못한 채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혼례를 올린 지 어언 50년, 세상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이 금혼식 기념일에 가까운 친지들과 혼배받은 중림동 성당에서 간단히 축하 미사를 올리려고 계획하시다가 그만 병세의 악화로 인하여 후일로 연기하였다. 그분은 끝내 금혼 축하식을 갖지 못했다.

 
다만 우리 혜화동 성당의 운영 위원 10여 명이 5월 20일 당일에 그분을 위한 미사를 올리고 작은 꽃다발을 가지고 자택을 방문하여 축하의 뜻을 표했을 뿐이다. 이때도 성당 걱정만 하시는 것이었다. 방문한 우리 앞에 일어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분의 병세는 심상치 않았다.

 
그날 축하객들은 문 밖으로 나오며 그분의 건강에 대하여 “아무래도 어렵겠다”고 몹시 염려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몹시 수척해진 그분의 안색에서 어떤 불길한 무엇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그러한 예감은 불행히도 적중했다. 그날 그분과 나눈 말들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대화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복된 축하식도 성대하게 베풀지 못한 채 눈을 감으시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금혼일 직후에 성가 병원에 재입원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틀 뒤에 병원으로 문병을 가 보니 그때는 이미 혼수 상태였다.

 
내가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면도해 줘”, “머리 감아 줘” 하고 헛소리만 하셨다. 내가 말을 건네 보았지만, 대답이 없을 뿐 아니라 눈은 벌써 시력을 잃은 듯 아무도 알아보시지를 못했다.

 
밤을 새워 간호하시던 부인 김 여사마저 기운을 잃어 쓰러지실 것같이 보였다.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다음날 성가 병원에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다. 옮기는 순간에는 의식을 잃었었으나, 옮기신 지 한참 후에 좀 의식을 회복하고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시더니, “병원을 옮겼군” 하시더라는 것이다.

 
마침 영식 장진 박사의 친구가 세브란스 병원에 있어 성심껏 돌보아 최선을 다했다.


선종의 순간


 
6월 3일 오후 서강 대학의 진성만(陳聖萬) 신부께서 내게 전화를 걸으셨다. 그날은 6월 들어 첫금요일이었다. 낮에 봉성체를 해드렸는데 위중한 것 같으니 종부 성사를 드려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전화였다. 즉시 드리도록 진 신부님께 위임하고 교회 일로 바빠 밤에야 내가 진 신부님께 전화로 물어 보았더니,

 
“보통 아침 일찍은 정신이 드시므로 내일 아침에 종부 성사를 드리기로 했다”는 대답이었다. 종부 성사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받는 성사이다.

 
6월 4일 9시경 병원엘 가 보니 이미 진 신부가 종부 성사를 드리고 병상 옆에 지켜 서 있었고 환자는 임종에 가까운 것 같았다. 세브란스 병원측에서는 희망이 없다는 듯 퇴원하시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으나 자식된 심정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인지 영식 장진 씨는 그대로 병원에서 더 기다려 보자고 하였다. 마침 성당에 일이 있으므로 진 신부께 1시까지만 여기 계셔 주기를 부탁하면서 1시에 다시 오겠노라고 약속하고 11시경 병실을 나오며 주위 사람들에게 자택으로 옮기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나왔다.

 
혜화동에 돌아와 조금 있으니 12시경 전화가 걸려 와 “퇴원하시기로 하였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즉시 명륜동 자택에 연락하여 퇴원하시는 대로 곧 통지하라 부탁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기다리기에 초조하여 가끔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다”는 대답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다가 오후 4시경 앰뷸런스가 경종을 울리며 혜화동 로터리를 돌아 명륜동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제야 퇴원하시나 보다” 하고 문을 나서려는데 전화가 걸려 와 “지금 퇴원하셨다”는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자택으로 달려갔을 때는 4시 15분쯤이었다. 장 박사 곁에는 가족과 친지 몇 분, 노 대주교님과 정계 인사 몇몇 분이 무거운 침묵 속에 침통한 얼굴로 그를 지켜 보고 있었으며 의사는 계속 혈압을 재고 맥박을 잰다. 산소 호흡으로 호흡을 이어 가는 장 박사의 운명이 가깝게 느껴졌다. 눈은 뜨신 채였으나 시력은 완전히 없으시었다.

 
나는 즉시 주위 사람들에게 기도를 지시하고 임종경을 읽기 시작했다. 선종을 위한 기도를 드린 것이다.

 
“떠날지어다. 교우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떠날지어다. …오늘 네 곳이 평안함에 있고, 네 거처가 천당에 있게 하시기를 우리 주 그리스도를 인하여 바라노라….”

 
마지막 숨을 내쉬는 장 요한, 4시 50분 운명하시는 가운데 조용히 임종경을 마치고 내 맘속으로 감탄해 마지않은 것은 초인답게 참으로 고통의 표정 하나 없이 고요하게 그리고 평화스럽게 잠드신 것이다.

 
그분은 평안히 가시었다. 천당으로 가시었다. 그분 같은 이가 천당엘 가지 못한다면 과연 천당 가기를 바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정치를 하면 천당 가기 힘들어….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하고 평소에 말씀하시던 장 박사는 참으로 성자다운 분이었다. 그분과 가깝게 사귀던 사람들과 그분의 감화로 가톨릭에 입교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증언해 줄 것이다.

 
장 요한께서 세상을 떠났지만, 그 신앙 굳고 사랑에 넘치는 삶의 정신은 많은 이의 가슴마다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분을 위한 연도경을 읊던 그 애닯고 간절한 소망의 소리들이 지금도 내 귓전에 들리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