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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채록 · 회고

회고 - 민주 투사 운석 (오위영)


오위영(吳緯泳, 전 무임소 장관)



7천 불로 운영한 주미 대사관


 
나는 공적인 정치성을 떠나 개인적으로 장 박사와 깊은 친교는 없었지만, 6·25를 전후하여 한때 비교적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내가 장 박사와 가까이에서 자주 만나게 된 것은 1949년 전후의 장 박사의 국회 의원 시절이었다. 그때 한두 번 말날 때마다 우리는 서로 가볍게 인사만 할 정도지 그 이상의 깊은 관계를 가지지는 않았다. 당시의 장 박사는 언제나 말끔한 양복을 입어 외모가 단정할 뿐더러 수려한 용모는 지성미와 함께 외국인 못지 않은 신사의 멋을 느끼게 했다.

 
당시의 대통령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던 장 박사는 초대 주미 대사로 부임하여 외교관으로서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1949년 내가 신탁 은행장으로 있을 때 친선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갈 기회가 있었다. 나는 초창기인 주미 한국 대사관이 미국에서 어떻게 외교 활동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또 장 박사도 만나 볼 겸 워싱턴에 들러 우리 대사관을 방문했다.

 
장 박사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사무실이라고 들어가 보니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당장에 우리 대사관이 매우 가난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국내 실정에 관한 것으로 시작하여, 대사관 운영비에 관해서도 논의했다.

 
“대사관 운영비가 퍽 적은 모양이군요.”

 
“네, 1년에 겨우 8만 불입니다. 대사관비로는 너무 적은 금액이죠.”

 
“고충이 대단하시겠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본국의 재정이 원래 풍족치 못하니 그대로 견뎌 나가야죠.”

 
1년에 8만 불이면 1개월의 경비가 평균 불과 7천 불에 불과하니 가위 그 고충을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장 박사는 별로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런 운영비를 가지고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성실히 일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본국 정부에 대한 불평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깊은 감명을 받고, 그 뒤 서너 번 만나 원조 문제, 국제적인 우리 나라의 위치 등에 관하여 비교적 진지하게 토의를 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귀국하는 즉시로 이 박사에게 친선 사절단으로서의 종합 보고를 하기 위하여 경무대에 들어갔었다. 공적인 종합 보고를 끝낸 나는 그 즉시 주미 대사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장 박사의 외교적 수완과 공적을 치하한 후에 내가 말하고자 한 대사관 운영비에 관해 보고 느낀 바 그대로를 털어놓았다.

 
“…주미 대사관의 운영이 말이 아닙니다. 장 박사 같은 우수한 외교관이 일을 합니다만, 그가 일할 관저 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수한 외교관이라도 국제적 활동이라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에콰도르 같은 아주 작은 나라에서도 대사관의 운영비가 1개월에 만 불이나 된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가 불과 7천 불이라니 이건 너무 적은 금액입니다. 적어도 에콰도르 이상으로 대우를 해주어야겠습니다….”

 
이 박사는 나의 진언에 수긍이 간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그 후에 또 미국에 간 기회에 다시 우리 대사관에 들러 보니, 경비도 전보다 좀 늘고 관저도 새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 박사에게 진언한 시정안이 그만큼이나 시정된 것을 보고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장 박사를 국무 총리에 추천


 
6·25 동란이 일어나자 장 박사는 주미 대사로서 그의 외교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충분히 발휘하여 유엔군을 단시일 내에 출병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를 아는 당시의 사람들은 놀랄 만한 그의 수완에 탄복했다. 그런데 당시의 정부는 어떠했던가.

 
“시민은 동요하지 마시오. 국군은 지금 진격 중입니다. 평양 탈환도 시간 문제입니다.”

 
국군들은 패주하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뻔뻔스럽게도 국민을 우롱하는 담화를 발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무고한 양민들이 무수히 학살되고, 저명한 인사들은 북으로 납치되어 가는 한편, 수많은 청년들은 강제로 북한 괴뢰의 앞잡이가 되어 전선에서 희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의 불행사는 정부의 그릇된 정책에 기인되었던 것이며, 그 책임은 마땅히 이 대통령이 져야 한다는 여론이 국민은 물론 원내외를 막론하고 비등하였다.

 
이런 여론을 탐지한 이 박사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국무 총리에 새로운 사람을 임명함으로써 관제 여론을 환기시키려는 책략을 꾸몄다. 그때 국회 의원인 나는 이 박사와 자리를 같이하는 기회가 많았다.

 
어느 날 이 박사는 나와 정담 끝에 “내가 국무 총리를 새로 임명하려고 하는데 누구 마땅한 사람 없을까?” 하고 내게 넌지시 물었다. 나는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바가 있기에 좋은 기회라 싶어서 서슴지 않고 장 박사를 추천했다.

 
“제 생각으로는 장면 박사가 제일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미국에서도 지지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6·25 당시의 성공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지금의 시끄러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래, 장 대사가 비교적 무난하지.”

 
이 박사도 미리 장 박사를 생각해 보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박사의 그 말은 곧 반(反)결정을 뜻하는 것이었다.


정치 노선을 같이한 장 박사


 
거창 양민 학살 사건과 국민 방위군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자, 국회 의원들 사이에는 반(反)이승만 운동이 암암리에 전개되어, 차기 대통령에 장 박사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곽상훈(郭尙勳), 권중돈(權仲敦), 서범석(徐範錫) 제씨와 함께 수차에 걸쳐 은밀히 선거 전략을 추진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정치 파동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만약 우리의 숙원이 달성되었던들 오늘의 한국은 퍽 달라졌을 것이 분명하다. 민주당 창당 때에는 준비 위원들이 수차례에 걸쳐 내게 당을 같이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정치에 진절머리가 난 나는 그때마다 거절해 버렸었다.

 
창당 불과 10일 전에 장 박사는 친히 나를 찾아 민주당에서 같이 일하자고 제의하였다. 정치에는 뜻이 없고, 그동안 정치 파동 등을 겪은 나는 “당분간 정치를 떠나고 싶다”고 거절했지만, 장 박사의 간곡한 권유와 지도자로서의 진지한 정신에 감화되어 창당 6일 전에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회고해 보면 민주당에 입당한 것은 순전히 장 박사 개인의 인격과 설득에 끌린 결과였고, 또 이것은 내 정치 노선을 결정한 중대한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관권과 독재에 시달리면서 쉬지 않고 적은 힘이나마 장 박사를 도와 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것도 기억에 새롭다.

 
4·19의 거족적인 국민 봉기가 성공하고 제2 공화국이 수립되어, 나는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받아 장 박사를 보좌하였다.

 
4·19의 여파로 인하여 당시 데모 만능주의가 성행되어 우리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부 학생과 혁신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 및 학생 단체에서는 무모하게 북괴와의 협상론까지 들고 나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장 박사는 너무도 오랫동안을 독재에 시달려 왔었고, 그러기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그분의 정치 이념이었기 때문에 별 다른 제한을 두지 않았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데모와 채 정돈되지 않은 질서 속에서도 장 박사는 제2 공화국의 새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어느 날 각료 몇 사람과 데모 방지에 대해 그분에게 문의하였더니 “나는 독재 정권에 시달려 본 사람이야. 참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본보기로 마음껏 자유를 누려 보게 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분의 뜻은 민주주의 실현의 단계로 보고 과도기적 현상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5·16이 일어나고 피차 정계에서 물러나,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었다. 연전에 제2 공화국 내각으로 있던 분들이 모여 지난날의 정치에 대한 얘기가 있었거니와 그때를 전후하여 장 박사와 몇 차례 자리를 같이할 때마다 흉금을 털어놓고 서로 지난날을 회고한 것은 지금도 감회가 깊다.

 
이미 고인이 된 장 박사를 추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