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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채록 · 회고

회고 - 대채로운 업적 (윤형중)

윤형중(尹亨重, 신부)


고난의 길 앞장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장면 박사는 모범적인 신앙인이었다. 양친이 다 독실한 신자였고, 그러한 가정에서 자란 장 박사 역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일반의 사표가 되었다.

 
약관에 벌써 확고한 신앙인으로서의 품격을 갖추었던 모양이다. 기미 3·1 운동을 전후하여, 그는 서울 용산 신학교의 선생이었다. 그때의 신학교라면 마치 교도소와도 같은 분위기였다. 장 박사는 일본 말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그러나 일본 말만 가르치는 선생은 아니었다. 외부 사회와 격리된 신학생들에게 3·1 운동의 진상을 들려주었고 암암리에 민족혼을 고취했다.

 
장 박사 나이 20여 세였다. 그가 신학교에서 가톨릭 신자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게 된 것은, 일찍이 일본인 소학교를 다녀 매우 유능한 외국어 교사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어뿐만이 아니었다. 영어 실력에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인천 박문 학교를 거쳐 수원 농림 학교를 다녔는데, 그는 농업 계통보다도 외국어 습득에 전념했다.

 
수원 농고 시절에 그의 부친이 편지를 내어 갑자기 결혼을 서두르게 된 얘기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널리 소개되어 있다.

 
“결혼하도록 해라. 어서 돌아와 결혼할 준비를 해다오.”

 
이에 급거 상경한 젊은 장 박사는 그 길로 목욕하고 고해 성사하러 성당엘 갔다. 그때는 천주교 의식이 지금과는 달라 남녀석을 엄격히 가릴 뿐만 아니라, 남녀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도록 칸을 막아 놓았다.

 
장 박사도 의외였다. 중림동 성당엔 이미 결혼식 준비가 다 되어 있지 아니한가. 물론 신부(新婦)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신부님의 주례로 예식은 간소하게 베풀어졌다. 이렇게 하여 혼사는 손쉽게 진행되었다. 이윽고 반지를 끼워 주는데 신부의 손가락만 나왔다. 신부의 얼굴도 모른 채 식은 무사히 끝났다. 그리고 장 박사 부부의 단란한 가정 생활은 시작되었다.

 
아마도 장 박사가 고인이 되기 한 달 전엔가 50주년 금혼식을 맞이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신학교 선생을 하다가 미국 유학의 장도에 오른 것은 순전히 전교하기 위한 생각에서였던 모양이다. 유학 생활에서 돌아온 장 박사는 저서도 냈고, 교육자로서 또 종교계의 일꾼으로서 다사 분망했다. 맨 먼저 나온 책이 ‘교부들의 신앙’이라는 번역서다. 퍽 평가되는 책이었다. 한참 일제 말기여서 책을 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때 출판 비용 전액을 부담한 이가 그분의 조카딸 김두임(金斗任) 여사였던 것 같다.

 
교육계에 종사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보았다. 동성 학교 교장으로 17년인가 일했는데, 각 학급에서 교리 강의를 하다가 박준호(朴準鎬) 교장이 별세하자 교장이 된 것이다.

 
한편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장으로 장 박사가 일을 보았는데, 그때 천주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란 지독하고도 잔학한 것이었다. 황해도 곡산에서 6·25 때 월남한 김충신 신부가 “공산 치하의 종교 탄압도 심했지만 일제 말기가 더욱 극심했다”고 말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얼마나 탄압을 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장 박사는 대단히 어렵고도 중요한 일을 맡았다. 일본인 조선 총독부와 천주교를 중화시키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여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중간에서 도맡아 방어하는 역할을 전담했다. 8·15 후에도 그는 군정과 교회의 중간에서 긴밀하게 연락을 취했다. 특히 노기남 대주교를 음으로 양으로 도운 얘기는 우리 교계에 잘 알려져 있다. 북한 공산 치하보다도 더 악독한 일제 치하에서도 노 주교를 보호했으며, 외국인과의 접촉 시에는 언제나 주교님의 오른팔이었다.

 
장 박사 그가 종교계에 끼친 공헌은 너무도 많다. 그는 평신도로서 그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할 어려운 일들을 도맡아 했으며, 그 결과 지도적인 종교인으로서 숭앙받기에 이르렀다.


신앙의 절대적인 힘


 
나라가 광복을 맞이하고 민주주의의 기틀을 세움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혼란 또한 없지 않았다. 1948년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장 박사가 해놓은 역사적인 업적은 매우 크다.

 
해방 직후 민주 의원 때에도 또 제헌 국회 의원 선거를 앞두고, 유지 및 교우들과 교계를 대표하여 누구를 의원으로 보내느냐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긴 논란 없이 장 박사가 적임자로 만장 일치의 인정을 받았다. 정계에 그가 나간 것은 정치인 되기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교인을 대표해서 빈틈없이 일해 줄 적임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장 박사가 정치를 잘하게 되었고, 또 탁월한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하게끔 외교 무대에 진출한 것은 잘된 처사였다. 유엔 총회 수석 대표로 정부가 장 박사를 보낸 것은 그를 잘 본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때 대한 민국이 국제적으로 승인받기란 일종의 기적을 실현하는 노릇이었다. 그것을 무난히 해치운 것은 장 박사의 성(誠)과 열(熱)과 믿음의 결과였다.

 
그가 파리 유엔 총회에 가 보니 발붙일 자리가 없고, ‘코리아’는 거의 완전한 고립 상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산당이 정식으로 불법화한 때가 아니었다. 총회에서 한국이 승인을 받지 못하고 부결된다면, 좌익계에선 마음놓고 일어나게끔 되어 있었다. 한국이 적화되느냐, 민주화의 길을 개척하느냐 하는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장 대표는 필사적으로 싸웠다. 순직자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이는 기도의 힘을 믿었다. 기도 앞에서 어떠한 난관이라 하더라도 돌파될 것으로 확인했다. 파리에 머물면서 불철주야 교인들과 접촉하며 호소했다. 그리고 기도드렸다. 총회를 앞두고 주불 대사(駐佛大使)인 교황청 대사(후에 요한 23세)를 찾아가 한국 문제를 애절하게 설득시켰다. 성녀 소화 데레사가 방문하던 수도원엘 찾아가 수녀들과 만나서 기도를 요청했다.

 
“기도드리러 왔습니다.”

 
“어디서 오신 분이오?”

 
“한국에서 나라 일로 기도드리러 왔습니다. 원장님 만나러 왔으니 도와 주십시오.”

 
수도원장을 만나러 갔다. 검은 베일을 쓴 엄숙한 가르멜 수녀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장 박사는 자기가 프랑스에 온 사명을, 그리고 수녀원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되었던 전후 사정을 소상하게 침착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수녀원장(성녀 소화 데레사의 언니)은 감복했다.

 
장 박사가 응접실에 들어가니 휘장을 죽 거두며 얼굴도 가리지 않은 채 만나 주었다. 더욱 자세한 얘기를 듣더니 가르멜 수도원장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로서 힘을 다해 보겠소.”

 
“당신의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우리 수녀원 전체가 기도드리겠소.”

 
이렇게 다짐하며 큰 언약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성취였다. 수녀원 전체가 한국 문제 때문에 기도를 드린다는 결정은 특기할 만한 단안이었다.

 
이에 장 박사는 거듭 사례하고 물러나왔다. 그 자리를 물러나와서 가톨릭 주교님 한 분과 만나 “장 요한입니다. 중대한 일이 있어 주교님을 꼭 찾아뵙고자 하는데, 어떻게 혜량을 베풀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총회를 앞둔 한국 문제의 전모를 설명했다. 유창한 언변에 진실된 표정이었으리라.

 
그 주교님은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만나 주리다. 며칠 지나서 찾아 주시오” 하면서 시간과 장소를 약속해 주는 게 아닌가. 주교의 한 분인 그도 유엔 총회 대표로 와 있는 참이었다.

 
장 박사가 약속된 곳으로 찾아갔더니 주교님은 한국이란 나라의 사정을 생전 처음으로 듣는다면서 “아, 그렇습니까. 그런 줄은 몰랐지요”를 연발한다.

 
“그렇다면 유엔 총회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분들을 만나셔서 내 얘기를 하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하면서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 박사는 큰 자신을 얻고, 더욱 활발한 외교전을 폈다. 물론 장 박사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겠지만, 한국 대표단을 인솔하는 사람으로서 이토록 앞장서 나가니 안될 일이 없었다. 유엔 총회의 마지막 의제로 한국 문제를 채택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받기까지에는 실로 우여 곡절이 많았다. 그것도 신앙적인 힘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던 까닭이다.


땀을 뺀 덜레스 장관


 
한국 문제가 유엔의 절대적인 승인을 받기까지 신변의 위협 또한 없지 않았다. 그 무렵 하루는 장 박사가 외출했다 오니까, 체코에서 왔다는 한국 신부라는 자가 기다리다 갔다고 한다. 하도 수상쩍어 모윤숙 여사가 몇 마디 물어 보니 갈수록 이상한 점이 드러났다. 체코라면 공산 위성 국가가 아닌가. 인상이 험악한 사람을 돌려보내 놓고 나니 장 박사가 도착했다. 즉시 신변 보호를 파리 경시청에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체코에서 한국 신부가 찾아올 리가 만무했다. 보나마나 공산당이 하는 짓으로 여겨졌다. 혹 자객이라도 보내어 갖은 흉계를 꾸미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일을 마치는 즉시로 장 박사는 로마 교황청으로 갔다. 이 박사의 심부름을 겸해서 갔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 뒤 장 박사가 초대 주미 대사로 간 것은 자신으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다. 유엔 총회에 가서 어려운 일에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되자, 한국에 와 있는 미군 고위층에서 그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게 되어, 이 박사에게도 건의하고 워싱턴 정부에 여러 차례 건의하여 주미 대사가 되었다. 주미 대사로서의 장 박사는 남달리 탁월한 외교 역량을 발휘했다. 6·25를 전후한 장 박사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우리 나라는 쉬이 지독한 수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장 박사는 워싱턴 주미 대사로서 다른 누구보다도 발언권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덜레스와의 관계는 긴밀했다. 덜레스는 누구보다도 장 대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의 인격에 감화를 받았다. 6·25 발발 직전, 덜레스의 한국 방문을 성공적으로 이끈 일화는 잘 알려진 얘기다. 출발 직전에 만찬회를 베푼 자리에서 덜레스에게 장 박사는 말했다.

 
“앞으로 만일에 대처하여 무기를 대주시오. 무기도 안 주고 38선을 지키라 하니 말이 안되오. 무기를 대주고 군사 원조를 한다는 말을 국회에서 꼭 약속해 주시오, 덜레스 씨!”

 
장 박사의 간청에 못 이겨 38선을 돌아보고 서울에 돌아온 덜레스는 국회에서 직접 연설했다.

 
“한국은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국이 침략을 당하면 혼자서 당하지는 않을 것으로 확신하는 바입니다.”

 
의사당 내에서는 박수 갈채가 터졌다. 순전히 장 박사의 주문대로 덜레스 씨가 연설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어찌 뜻했으랴. 그 며칠 뒤 6·25 공산 남침이 자행되었다. 덜레스는 귀국 도상에 38선이 터졌다는 급보에 접하고 당황했다. 급히 동경 맥아더 사령부로 돌아와 최초의 긴급 조치를 서둘렀던 것이다.

 
장면 주미 대사는 그이대로 워싱턴 요로에 일일이 찾아 다니며 “덜레스 씨의 언약은 어디로 갔느냐. 왜 우리에게 무기를 대주지 않느냐?”고 항의하면서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미군이 쉬이 파병된 것은 다 장 박사의 힘이었다.

 
나중에 덜레스 씨가 미 국무 장관이 되어 장 박사와 환담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닥터 장, 당신한테 그때 저녁 한끼 대접받은 값, 한국 동란을 통하여 참으로 비싸게 치러야 했소.”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는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또 한 가지 일화, 주미 한국 대사관에 흑인 운전수가 있었는데, 한국 사람을 보기만 하면 깍듯이 장 박사의 안부를 묻더라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장 박사를 두고두고 잊지 못하느냐?”고 묻는 말에, 그 흑인이 “이 세상에서 나 같은 사람을 인간으로 대접해 준 분은 장 박사뿐이었소”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흑백의 차별이 심한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처음으로 장 박사한테서 인간 대접을 받았다는 실토를 통하여, 우리는 차별 대우 없이 모든 사람을 형제로서 여긴 장 박사의 언행을 높이 평가해야 되겠다.

 
국무 총리 시절의 피난지 부산에서의 생활은 곤궁한 형편이었다. 일국의 국무 총리인지라 내객은 많고, 일일이 대접하자니 재력이 딸렸다. 하루는 장 박사의 모친께서 “야, 너 제발 총리 그만둘 수 없니? 그 봉급에 이 많은 손님을 어떻게 치다꺼리하겠느냐. 집안 망한다. 국무 총리 그만두도록 해라” 하고 성화였다. 사실 집안에서도 정치 활동하는 것을 반겨하지 않았고, 장 박사 자신도 내가 꼭 정치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당초부터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게다. 그 무렵에 마침 어떤 금전 공세가 있었으나, 이를 물리칠 용기를 그는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는 안다. 그러한 용기는 가톨릭 신앙심에서 오는 것이었다. 단지 가톨릭을 위하여 몸바칠 결의가 마련되어 있었던 분이기 때문이다.

 
부산 정치 파동을 겪고 수도가 서울로 환도한 후 장 박사는 가톨릭 총무원에 관계하는 한편, 경향 신문 고문실에 나와 일을 보았다. 그 자신 정계에 나가기를 싫어했고, 가톨릭 일만 시키려 했던 것이 우리 천주교계의 당초 여론이었다. 그러니까 자기가 좋아서 나간 게 아니고, 야당 결성에 나가게 됐던 것도 다 주위의 권유에 못 이겨 나갔던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교회가 정치에 관여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 교회로선 국민을 다스리는 지도자로서 교계의 일도 겸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 덕택에 자유당 시절은 형사들이 쉬지 않고 찾아와 가톨릭 전반에 걸쳐 샅샅이 조사하는 등 법석을 피웠다. 그들은 정치 자금이 장 박사에게 조달되지나 않나 하고, 그걸 막고자 발버둥쳤다.

 
어쨌든 장 박사의 정계 진출로 한국 가톨릭은 백안시당하는 한편, 전재민(戰災民)들에게는 적지 않은 혜택을 입게 하였다. 가령 미국서 구호 물자가 많이 나온 것도 그의 힘이 컸다면 컸다.


악에 저항하며


 
부통령에 입후보했을 때, 치안국 통계는 우리 가톨릭 표가 장 박사에게 60여 만 표 이상이 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자유당 정권은 “천주교가 공산당보다도 더 무섭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이 말이 적중한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당시에 책임을 맡고 발간한 ‘경향 잡지’에 대한 비화를 한 토막 공개해야겠다. 오랜 역사와 권위를 지닌 이 잡지는 전국 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상호 신뢰하에 어느 글이나 서명을 하지 않고 책을 월간으로 냈다.

 
5·15 선거가 임박해 오자 나는 용단을 내렸다. 장 박사의 특집 편집을 꾸민 것이다. 장면 박사의 건국 공로를 자세히 소개하면서 표지에도 사진을 크게 실었다. 이 책이 지방에까지 배부되면 큰 말썽이 되리라 예견하고, 나는 다른 때보다 일주일 앞서 책을 발간함과 동시에 비밀리에 일제히 ‘경향 잡지’를 전국 각처에 발송했다. 그 결과 만족할 만한 성과가 전국 각처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자유당으로서도 뒤늦게야 이 사실을 발견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전국 각처의 신도들은 자기 비용을 써 가면서 점심도 때로는 거르면서 산간 벽지에 이르기까지 득표 공작에 나섰으니 말이다.

 
과연 “가톨릭이 공산당보다 무섭다”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을 법하다. 이 선거에서 가톨릭 표가 아니었더라면 이기붕 씨의 낙선은 초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책을 읽어 선거 운동에 큰 보탬이 되고 각 지방의 신부들이 어느 당을 위해서 총력을 집중한 결과, 갖은 탄압과 부정이 자행되었던 선거에서도 20만 표를 더 얻어 장 박사가 당선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부통령 당선 후 순화동 공관으로 떠나게 될 때, 나는 우리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부통령 시절을 통하여 신부로서 순화동 공관에 매주 수·금·일요일에 미사드리러 드나들었다. 그것도 당국에선 늘 사찰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하지 않는가.

 
뒤에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순화동에서 명륜동 자택으로 돌아올 때 구박받고 쫓겨온 사실에, 주민들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울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갖은 박해와 시련 속에서 저항한 그분을 맞이하는 의미와 뜨거운 사랑에 감동되어서였다.

 
장 박사를 무능하다고 말하지만 데모를 막을 방침이 다 서 있었다. 4월 혁명으로 제2 공화국 국무 총리가 된 그로서 강권을 발동할 수 없었으리라는 점에 이해가 간다. 데모를 하게 두어 둔 것도 다 뜻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들이 거기에 호응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데 주안을 두고 관찰하면서 정치 의식과 민주 의식의 발달을 체험으로 깨닫게 할 배려에서였던 것 같다.

 
장 박사는 오랜 수난을 통하여 악에 저항하는 데는 누구보다도 강했고 사랑을 아는 유일한 정치 지도자였다. 때문에 그는 민주당 정권하에서 연일 터져 나오는 데모를 자유로운 의사 표시로 보았지 정치악으로 본 것 같지는 않다.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이유라면, 부통령을 그가 왜 사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이분이 정치를 할 생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납득이 안되는 처사다. 5·16 정변의 묵인도 그렇다. 정치에는 정적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정적을 때려눕힐 생각을 장 박사는 한번도 해본 일이 없다. 도대체가 정치하는 분이 피 흘리는 것을 두려워해서 5·16을 받아들였다. 그만큼 장 박사는 특이한 정객에 속한다.

 
돌이켜볼 때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문제에만 평소에 늘 고심하다 간 분이 장 박사다. 소극적인 정치인인 반면 인간애의 사랑에 불타는 적극적인 신앙인이었던 사실을 잊을 수 없다.

 
부통령에 당선된 얼마 후에 장 박사는 부친상을 입었다. 나는 경향 잡지사를 경영하던 때였으므로 상사에 쓰라는 구실로 10만 환을 드린 일이 있다. 이때에도 장 박사는 정치인은 못 되었다. 정치엔 한푼도 쓴 일이 없다. 자선 사업에 고스란히 희사해 버렸다. 평소에 그의 측근자들이 모처럼 정치 자금을 보태 드리면 한참 망설이다가 “내가 이 돈을 써도 괜찮을까? 고해 성사를 하자” 하면서 기도드리기를 서둘렀으니, 그분이 어찌 후진국의 정치 생리에 맞았을 것인가.

 
아무리 보아도 그는 신앙인이었다. 우리 신부 사회의 어디에 갖다 놓아도 신앙인으로는 일류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사회 정세나 국제 동향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정치적 소질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다.


피를 싫어한 정객


 
부산 총리 때 적산 처리도 많았건만, 집 한 칸 장만하지 않은 장 박사다. 양말 한 짝인들 남한테서 선사받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제2 공화국의 국무 총리가 되었을 때 만난 자리에서 “우리가 경제적으로 최소한 6, 7년은 지난 다음에야 자리가 잡힐 겝니다”라고 미리 내다본 것은 하나의 선견지명이었다. 정권을 잡은 뒤 우리 천주교가 정치에 관여한 사실은 전혀 없다. 주교나 신부의 관여가 있었다는 일설은 전혀 넘겨짚고 하는 말이다. 대주교나 신부는 정치와 전혀 관계가 없다. 수난에 처했을 때에도 일이 잘되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성직자를 탄압하려 한 사람들은 과오를 범한 것이다.

 
평소에 친구를 데리고 다방에 드나들며 함부로 웃어 본 일도 없다. 어디까지나 교육자로서 성직자로서 자기 일에만 성실했다. 그리고 우리를 만나면 자기가 신부 못된 걸 늘 한탄했다.

 
그럴 적마다 내 위로하기를 “장 박사, 신부가 되어 성직자로 일생을 보내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을 많이 했소. 대사로 국무 총리로 부통령으로 국사에 큰 업적을 남기지 않았소. 또 정계 은퇴 이후엔 전보다 더 많은 전교도 하지 않았소”라고 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장 박사는 이 세상의 행운아이자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이었다.

 
“장 박사는 가톨릭이기 때문에 양심적이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맹신적이기조차 했다. 평생토록 술 담배 아니하고 신앙 생활에 철저했다. 주일이라면 자기 일신의 어떠한 일도 다 물리치고 마리아 성상 앞에서 구령의 기도를 올렸다.

 
신앙은 그의 무기였다.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 성모 병원에 서너 번 가 봤는데 낫는 기색이 없었다. 나 역시 병석에 누워 있는 몸이었다. 6월 1일엔가 뉴스 방송을 들으니 무의식에서 의식을 회복했다는 보도였다.

 
5월 2일 나는 하직 인사나 하려고 장 박사를 만나러 가겠다 하니, 내 주치의의 말이 “서로 피곤한데 뭐하러 가오” 하며 만류했다.

 장 박사 당신이 그토록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날 줄 알았던들, 내 왜 그날 뿌리치고 당신의 손목이나 잡아 보지 않았던가.

 
5·16 후에 당신은 당신 한 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를 보았다. 그것을 당신은 죄스러워했다. 이주당 사건의 혐의로 구속 기소될 때에는 고통을 겪는 것이 차라리 후련하다 하지 않았던가.

 
“피 흘리는 게 뭐 좋습니까.”

 
나는 지금도 그가 남기고 간 이 말의 뜻을 음미한다.

 
서거 후 느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당신이 한 10년만 더 살았던들 전교를 많이 하셨을 텐데…. 더 많은 전교 사업에 몰두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과 5·16으로 인하여 많은 정치가들이 천주교인이 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와 장 박사 당신의 모범적인 표양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로 안다.

 
장 박사의 공적은 컸다. 그리고 그는 실로 큰 인물이었다.

 
그가 남긴 업적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정치 풍토는 그를 버렸어도, 우리 가톨릭은 그를 버릴 수 없다. 그는 평신도로서 누구보다도 위대한 업적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의 영복을 나는 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