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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채록 · 회고

회고 - 민주주의의 속죄양 (송원영)


송원영(宋元英, 전 장 총리 공보 비서관)



 
비 내리는 명륜동 초입, 30여 평의 범상한 기와집에서 운석 장면 박사는 조용히 숨지셨다. 1935년 장 박사가 손수 지은 이 집은 주위에 우뚝우뚝 솟은 큼직한 새 집들에 의하여 한결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집권자로서 또는 부통령으로서 나라에 공로도 많고 위세도 부릴 만한 처지에 있던 분이건만 사생활은 30년이 여일(如一)하였다. 그분이 정치에 징발당하지 않았더라면,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편하고 유복하게 지내셨을 것이 틀림없다. 해방 이듬해 민주 의원에 피선되신 것은 천주교 신자의 대표 격으로 징발된 때문이었으며, 제헌 국회에 나가신 것도 그 측근자들의 강권에 의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라를 위하는 길은 반드시 정치만이 아니고 교육이나 종교 등, 사회 덕화(社會德化)에 더 중점을 두어 생각한 것이 장 박사였으나, 일단 정계에 참여하신 뒤에는 열과 성을 다하겠다는 것이 장 박사의 태도였다.

 
그분의 인간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성실’ 그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날림으로 하거나 거짓으로 하는 일이 없었다. 찾아온 손님이 학생이거나 망녕끼가 있는 노인이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장광설을 한두 시간씩 지껄이는 방문객에게 끝까지 정중히 대하고 차근차근 설득하기가 일쑤였다.

 
정치가는 ‘쇼맨십’도 갖추어야 한다고 진언하고, 인기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해본 일도 있었으나 장 박사는 모두 거절하셨다.

 
세단차를 타고 앞뒤에 호위를 하는 행차는 집권 9개월 중 겨우 몇 번에 불과하였고 대부분은 지프차를 타고 일반과 같이 신호를 기다리기가 일쑤였다.

 
흔히 15시간 근무, 17시간 근무니 하는 말을 하지만, 장 박사야말로 명실 공히 17시간 근무였다. 새벽 5시쯤 일어나서 기도하고 일과에 들어가면 자정이 가깝도록 줄곧 회의와 면접과 결재와 공식 행사의 연속이었다.

 
그러한 격무 중에서도 매주 한번의 기자 회견은 거의 빼지 않고 이행하였으며, 겸하여 매주 토요일에는 전국민에게 주간 정무 보고를 15분 간 방송하는 것도 거르지 않았다.

 
이러한 성실성은 그분의 정치 면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1959년 겨울 치열한 경쟁 끝에 민주당의 정·부통령 후보 지명 투표가 행해졌다. 조병욱 박사는 불과 몇 표 차로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어 그 수락을 주저하자, 낙선된 장 박사는 조 박사를 끌어 일으키며 수락 연설을 종용하였다.

 
그 순간 몇 달을 두고 대립해 오던 신·구파는 혼연 일체가 되어 우뢰 같은 박수 속에 화해하였다. 장 박사의 융화력이 아니고는 넘길 수 없는 장면이었다.

 
오늘날의 야당 지도자들이 돌이켜 음미할 만한 일이 아닐까. 부통령 때나 총리 때나 장 박사는 각하 소리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측근자들은 물론 관리들까지도 박사님으로 통하였다. 술은 원래 입에 대지도 못했으며 담배도 전혀 안 피우셨다. 점심은 댁에서 가져다 사무실에서 간단히 들었으며, 가끔 내객을 피해 쉬기 위하여 남의 집 방을 빌려 몇 시간 주무실 때도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부통령과 총리 재직이라는 것은 영광이라기보다 고역의 연속이었다. 웬만한 사람이면 즐기는 피서 한번 못했는가 하면, 부통령 때는 어떤 공식 석상에서 자리가 마련돼 있지 않아 되돌아설 수밖에 없는 기막힌 경우조차 있었다. 그러나 장 박사는 매사에 잘 참는 분이었다. 참으면서 꾸준히 점진적으로 일을 성취해 나가는 분이었다.

 
1956년 9월 28일, 장 박사는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 대회에 참석하고 나오다가 김상붕(金相鵬)에게 저격을 당하였다. 장내는 물끓듯하고, 위험한 분위기에서 장 박사는 병원으로 가지 않고 도로 단상에 오르셨다. 저 양반이 왜 그러실까… 하고 있자니,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치켜들고 “여러분! 안심하고 대회를 계속하시오”라고 한 후에 병원으로 가셨다.

 
오늘날 장 박사를 보내는 마당에서 나는 그분이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바쳐진 속죄양이라는 생각을 떼어 버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