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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채록 · 회고

회고 - 박애의 정치가, 내가 모신 10여 년 (이홍열)

이홍열(李泓烈, 전 장 박사 비서)


조용한 귀공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철저한 민주주의의 신봉자 여기에 가다.”

 
허탈감에 빠진 나에게 감회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평소에 무척 존경하고 믿었던 어른이 갑자기 가시니 눈앞이 캄캄하고 허무한 감뿐이다.

 
중태에서 신음하시던 박사님을 뵈옵고도 현대 의학의 권위와 기적이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던 나의 유일한 소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박사께서 가시는 마지막 길에 영광이 깃들이기를 기원하며 비통에 잠길 틈도 없이 철야하다시피 장례 준비에 전념하고 있는 이때, 원고 청탁을 받고 옛 일을 잠시 돌이켜보니 새삼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장 박사를 모신 지 10여 년, 너무 크고 깊고 넓어서 그 어느 한 모퉁이도 부여잡을 수 없다.

 
장 박사의 치적은 널리 세상에 알려져 있고, 또 여러 선배께서 애도와 추억의 글을 많이 쓰셨으므로 공적인 것을 떠난 면만을 기억 나는 대로 적고자 한다.

 
장 박사는 평소 종교적이며 규칙적이고 조용한 가정 생활을 하신 분이어서 이렇다 할 기적이나 과격한 행동을 한 일이 없어 일화라 할 것이 별로 없다.

 
여가만 있으면 독서와 기도와 사색에 잠기는 그분을 누가 이야기하라 해도 장 박사의 무엇을 이야기하여야 좋을는지 나는 모른다. 이것이 솔직한 나의 고백이다.

 
본래 내가 장 박사를 알게 된 계기부터가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6·25 사변 전 장 박사가 주미 대사로서 호주·뉴질랜드 등 각국의 친선 순회를 마치시고 귀국했을 때, 나는 민희식(閔熙植) 로스앤젤레스 총영사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이승만 대통령께 부임 인사를 올렸더니 로스앤젤레스의 한국인 사회의 어려움을 말씀하시고 장 박사를 따라 사무 인계에 도움을 받으라는 지시다. 즉시 명륜동 자택을 방문해서 내의(來意)를 전하니, 잠시 후 장 박사는 내가 대기하고 있는 응접실에 나오셨다. 나는 부임 인사를 올렸다.

 
담담히 듣고 있던 장 박사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잘해 보지”라는 한마디였다.

 
어디까지나 서구적인 신사 품으로 단장된 그의 첫인상은 전세계를 상대로 혁혁한 공훈을 쌓은 외교관이라기보다 영화 장면에 나타나는 귀공자같이 느껴졌다. 첫 외교 무대에 나서는 풋내기이니 만큼 마음이 들떠 있었던 나는 어리둥절하였다.

 
장 박사의 담담하고 붙잡을 데 없는 그 태도는 그 후 10여 년을 지나오는 동안에도 변함이 없었다.


이름났던 명문장과 필적


 
장 박사의 정치적 활동 혹은 신앙적 정열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분의 해박한 지식, 격조 높은 안목, 혹은 사물에 대한 치밀성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 듯하다. 특히 서학, 그중에서도 영서에 관하여서는 짧은 기간에 그만큼 습득할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부산에서 총리로 계실 때 가끔 주한 외교 사절이나 친지에게 급한 용무로 장 박사의 간단한 서간을 전달한즉, 상대방은 예외 없이 그 필적을 알아보고 그 수려한 문장과 펜맨십(필적)을 칭찬하였다. 한번은 무쵸 주한 미국 대사를 자택으로 방문하고 비공식적인 서간(書簡)을 전한즉, 주소만 쓰여 있는 비봉(秘封)을 보고 내가 누구라든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은 묻지 않고 당장 장 박사의 안부를 물으므로 무쵸 대사께 어떻게 알아보는가 하고 물은즉, 그분의 대답이 장 박사의 문장과 필적은 워싱턴에서도 유명하다 하면서 나더러 더러 얻어 두라고까지 말씀하셨다. 그 후 1951년 파리 유엔 총회에 참석하였을 때 우리 대표단은 창랑(滄浪) 선생을 위시하여 전규홍(全奎弘) 박사, 고(故) 이앙묵(李仰默) 박사, 임병직(林炳稷) 대사, 이연생(李蓮生) 여사 등, 특히 외국어에 관해서는 아주 쟁쟁한 분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고 이앙묵 박사를 영어에 있어서는 제1인자로 치고 있었으므로 모든 공문은 그분의 기초로 되면 그만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중요 문서에 사인하기 전에 가끔 장 박사가 수정하고 이 박사가 동의하는 것을 보고 그 실력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한문과 서예에 있어서도 조예가 깊었다. 장 박사께서 붓글씨를 연습하는 것을 본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남이 쓴 글에 대하여서는 곧잘 평을 하였다. 구체적인 예는 생존하신 분들을 위하여 삼가겠다. 수년 전에 생존하는 중국의 명필인 자유 중국 심계원장(審計院長) ○○○이 족자 한 폭을 보내 온 일이 있었다. 측근 중에는 그 글씨가 누구 것인지 판별하는 이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안국동 표구점 노주인을 찾았으나 그도 중국인의 글이며 대가(大家)의 글이라고만 할 뿐 누구의 것인지를 대지 못했다. 그 노인은 수십 년 동안 허다한 묵서(墨書)를 취급하여 서화 감정에는 제1급이었다.

 
그러다가 귀경한 장 박사에게 그 묵서를 보여드렸더니 대번에 알아보시고 그 글을 보내 주신 데 감사하며 만족해 하신 일이 있다. 작년 가을 장남 장진(張震) 씨의 결혼식에 안내를 위한 게시서를 친지 중 몇 분이 묵서했었다. 본인들이 가신 후 나보고 글씨가 좀 안됐다고 하시며, 장 박사께서 직접 붓을 들어 쓰신 일도 있다. 연전(年前)에는 내가 한번 족자를 청하였더니, “자네 아호(雅號)가 무엇인가?”라고 묻기에 “운곡(雲谷)입니다” 하니, “틈 봐 써 주지” 하고 그 후 몇 차례 아호를 되물으신 일을 생각하면 공연한 걱정을 끼쳐 드렸다고 뉘우침마저 든다.


온갖 것에 안목 높은 멋쟁이


 
장 박사는 건물, 정원, 가구, 장식, 의류, 식기 등 신변의 잡다한 사물에도 퍽 높은 안목과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이것은 다만 가족이나 측근자에게만 나타내셨다.

 
장 박사가 대사로 계실 때 워싱턴 대사관을 찾으니 나더러 전 관내와 정원을 자세히 보여주면서 적은 예산으로 공관을 요만큼이라도 마련한 것을 되풀이 자랑하셨다. 정원에 장미밭을 만드는 데 애쓰신 일, 건물 내의 실내 장식이며 벽의 색채와 가구의 조화, 주단의 종류, 빛 등 식당에 쓰여지는 홀 세트에서부터 실버 웨어에 이르기까지 놀라울 만큼 완벽하게 꾸미고 장만하였었다. 물론 그렇다고 절대 호화 찬란한 것은 아니었다. 또 구미(歐美)를 갈 경우 귀국 시 전속 이발사 고 이한수(李漢洙) 씨께 선물하기 위하여 면도칼, 가위 등을 산 일이 있는데, 품질 좋은 것이면 되는 것으로 알고 봉 마르셀 백화점에서 사 온즉 물건을 보시더니 트윈 브라저(쌍동표 독일제로 세계적으로 유명함)로 바꿔 오라고 하실 정도였고, 모자 하면 볼사리노, 구두 하면 원서 등등 끝없이 잘 아셨다.

 
장 박사는 몸가짐이나 의복이 단정하였다. 주무실 때는 머리가 헝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머리 수건이나 모자(취침용)를 꼭 사용하였으며 머릿기름 등속은 한번도 쓰신 일이 없다. 면도는 한번도 거른 일이 없었으며 심지어 성모 병원에 입원 중 중태로 의식이 혼미한 중에도 간청에 의하여 이발해 드리고, 목욕을 원하므로 물수건으로 닦아 드리기까지 하였다. 장 박사는 일용 소지품을 아끼는 분으로 학생 시절에 미국서 쓰시던 질레트 구식 면도기를 수십 년 애용하셨는데 1952년 유엔 총회 후 귀국할 때 항공기상에 두고 내리신 일을 퍽 애석해 하시었다.

 
장 박사는 원래 풍신이 좋기로 유명하며 옷이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 수년 전의 양복이 모두 낡았고 해서 새로 한두 벌 맞추셨는데, 가봉한 것을 보니 어깨에 주름이 지고 여러 번 고쳐 보았으나 잘 맞지 않아 재단사가 당황하여 땀을 흘리니, 장 박사께서 나를 보고 쓸쓸히 웃으면서 “내 몸도 이젠 틀린 모양이군. 사람이 늙으면 몸마저 뒤틀리는 법이야. 재단사의 잘못이 아니고 내 몸 탓이야”라고 하셨다.

 
덧붙여 자신의 풍채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셨다.

 
6·25 전 대사 재직 중 병석에 있는 부인을 위로하고 가족도 만나고자 잠시 귀국을 청하니, 이 대통령께서 이왕이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각국을 친선 방문하라 하므로 호주에 갔었는데, 호주에서는 한국인이 친선 사절로 온다니 어떻게 생겼나 하고 구경거리로 관심들을 가졌더란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장 박사를 보니 체구나 용모가 뛰어나고 세련된 몸매나 유창한 언변에 놀라며 대환영을 하였고, 어찌나 많은 단체, 특히 여성 단체에서 회합이나 연회에 초대하고 연설을 희망하는지 몹시 바쁜 일정을 보냈다고 하셨다. 또 많은 호주 여성들이 장 박사와 직접 말해 보기를 원하고 악수를 청하며 다가와서 혼났다고 하시면서 늙음을 한탄하셨다.


남을 괴롭히지 않는 착한 성품


 장 박사가 외유 내강하다 함은 주지의 사실이나 몇 가지 고집이 있었다. 어쩌면 고집이라기보다 타고난 성격이나 쌓아 오신 수양의 탓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절대 싫어하였으며, 측근자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키시는 일이 없었고 시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조금도 마음을 불편하게 한 일이 없다. 나는 장기간 장 박사와 기거를 같이했고, 특히 외국 여행에 수행하였는데 어떤 일이든 무리한 일을 명한 일이 없고, 시키신 일이 혹 이루어지기 어렵게 된 경우 다시 강요하시는 일이 없었다.

 
모든 세상일을 순리대로만 처리하고 자신의 권위 같은 것으로 억압하시려 들지 아니하였다.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파리 체재 중 간장염(처음 발병)으로 서부 지구 뉴이의 아메리캉 오피탈에 입원하였는데, 한때 병세가 악화되어 주치의로부터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통지함이 어떻겠는가 하는 의논을 받고, 나는 2, 3일 고민 끝에 장 박사께 가족의 몇 분을 부를 것을 권유하였더니, 태연 자약한 태도로 자신의 병은 자신이 잘 아신다면서 쉬 회복될 것이니 통지하여 가족을 놀라게 하여 혹 심장이 약하신 부인에게 쇼크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강력히 반대하였다.

 
매일 아침부터 취침 시간까지 병실을 지키는 나에게 번번이 국내 소식이며, 유엔의 동향, 전세 등을 물으시므로 별지장이 없는 한 말씀드리면 조국의 안위(安危)에 대하여 퍽 안절부절 못 하셨다. 그러는 중에도 식사 때나 취침 때면 꼭 나보고 재촉하였다. 이 점은 이번 성모 병원 입원 중에도 가족, 문병객, 간호하는 분에게 일일이 신경을 쓰시고 빨리 가 보라든지 하는 것을 보면 민망할 정도였다. 병이 다소 회복되고 의사의 권고는 있고 하여 스위스 다보스에서 한 달 동안 정양하고 다시 파리에 돌아와 잔무를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 나는 전규홍 박사(당시 주불 공사)와 다른 방(트윈 스위트에 들어 있었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노크 소리가 나므로 대답한즉, 장 박사께서 은행 계정(計定)도 막고 여장을 꾸리라 이르시고 돌아서신다. 당황하고 황송하여 숙취로 아픈 머리를 부둥켜안고 동분 서주 가까스로 외부 일을 마치고 호텔로 와 본즉, 장 박사는 한마디의 꾸중이나 불쾌한 표정도 지으심이 없고 나의 짐까지도 챙겨 놓은 데는 전신에서 진땀이 솟아나고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내내 후회가 되어 가끔 그 말씀을 드렸으나 번번이 미소만 지으시니 다시 뉘우쳐지며 인자한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성모 병원에 입원한 다음날 달려가니 병석의 장 박사는 첫 말씀이 “파리에서 아플 때는 자네 무척 고생했지. 다시 그 병에 걸렸네”라고 하시고 함께 계시던 부인께서도 지금도 박사께서 “파리 시절의 홍열이는 내 친구나 내 자식보다 더 내 병간호를 잘해 줬어”라고 말씀하시던 중이라 하였고, 프린스턴에서 전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그 말씀을 하신 일을 상기시키니 장 박사께서는 이역 만리에서 난생 처음 무거운 병환을 앓게 되었으니 무척 고독을 느끼셔서 병환이 나실 때면 그 생각이 나시는 것이리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다시 말씀을 이어서 “나의 선친 초상 날짜가 어느 날이지” 하시므로 나는 어쩐지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어물어물하였다. 그 후도 문병 때마다 물어 보셨는데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시내 한국 음식점 중에서 어느 집이 깨끗하고 번잡하지 않고 음식의 맛이 있어 외국인을 초대할 수 있는가 하고 물으시므로, 나는 장 박사가 음식에 대하여 까다롭고 일가지견(一家之見)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 터라 유명하다는 한국 음식점의 형편과 음식의 종류, 맛, 가격 등을 설명한즉 “역시 음식은 맛이 있어야지” 하시면서 병이 재발하기 전 ‘미조리’라는 음식점에서 일본 음식을 잡수신 일을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최후의 외식이 아닌가 싶다. 결국 대답이 궁한 나는 “차차 수소문하여 박사님께서 완쾌하신 후 안내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당시 박사님은 다시 활동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였으리라.


너무 인간적인 것이 흠


 
장 박사는 이 한 점에 있어서 고집이라 할 수밖에 없다. 부산에서 총리로 계실 때와 민주당 집권 때 나는 거의 모든 출입 시에 장 박사의 뒷자리에 동승하였는데 전후에 경호차가 따르는 것을 싫어하였으므로 만일의 경우에 대비, 일반 지프 하나를 보이지 않게 동행하고 다녔다. 지프로 등하청하실 때 교통 신호는 꼭 지키고 어김이 없었다. 위신 같은 것은 개의함이 없었다. 단 한번 부산 시절 거창 사건으로 입법부와 군이 극도로 대립하였을 무렵 국회 출석 때 전후에 호위차가 따른 일이 있었다. 그러니 장 박사로서는 자기가 민중에 군림한다든지 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으로 안다. 장 박사가 격노하신 것은 꼭 두 번밖에 기억할 수 없는데, 그 하나는 1961년 3·1절 행사 후 숙소로 돌아가는 장 박사 차에 호위 차가 따르니 즉시 철수시키고 책임자와 국장에게 격노하시고 다시는 못하도록 엄명을 내린 일이다. 너무나 지나쳐 이런 것은 장 박사가 너무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시는 약점으로 생각된다.

 
장 박사는 퍽 권위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생각되는 점이 더러 있다. 인간 문제 등에 관하여 물으실 때 꼭 학력과 경력을 중요시하고 추천자에 비중을 두는 듯하였다. 신인 발굴의 여지를 보이지 아니하였다. 물론 공평의 원칙을 엄중하였으나 상대방의 충성도(이런 것이 있다면)를 경시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자기 소신을 관철하는 데 강력하지 못하였다. 부산 시절(51년 5월) 정사(政事)에 이 대통령과 뜻이 맞지 아니하여 칭병하시고 관저에 칩거하시니, 대통령은 장 박사께 공석 중인 5장관을 총리 뜻대로 천거 임명할 것을 확약했다.

 
장 박사는 법무에 조진만(趙鎭滿), 농림에 임문항(任文恒), 총무에 고 한동석(韓東錫) 씨를 내신하여 임명이 되었다. 그때 대통령은 이기붕을 통하여 “5석 중 3석을 총리가 정하였으니 내무에는 이순용(李淳鎔), 국방에는 이기붕을 써 주시오” 하고 종용하니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와 같이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 흠인가 생각되기도 한다.


자유와 민권의 상징


 
장 박사가 민주당 집권 시에 나는 생각하는 바 있어 군·경·검(軍·警·檢)과 별도로 총리 직속의 특별 기관을 설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함이 좋겠다는 의견을 수차에 걸쳐서 구신(具申)한 일이 있었다.

 
장 박사께서는 매번 수긍을 안하시므로 몇 동료와 합동하여 건의하였더니 드물게 노기를 나타내시고 “우리가 민주 투쟁을 한 의의가 어디 있으며 지금 와서 자유당 때 김창용(金昌龍) 특무대장이나, 김종원(金宗元) 계엄 사령관, 혹은 헌총(憲總) 같은 것을 둔다는 것은 언어 도단이며, 각 부에는 책임 맡은 장관이 있고 그 밑에 책임관이 다 있으니 순서에 따라 맡은 임무를 수행하면 만족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며, 그 질서를 파괴하면서까지 정권을 유지하겠다고 하면 이 나라에 민주주의는 영영 꽃필 수 없다고 하시므로 더 이상 재론하지 못하였다.

 
장 박사는 집권 시 격무에 시달려 매일 자정이 넘어서야 주무셨는데, 본래 늦잠에 아침잠을 즐기는 분을 불가피하기는 하였으나 단잠에서 깨운 일, 조반도 드시기 전에 등청을 재촉한 일, 9개월 동안에 단 며칠을 부인이나 친지와 단란하게 지내도록 해드리지 못한 것을 회상할 때 그 정권에서 그분이 꼭 그래야만 하였을까 하고 되풀이 생각되는 바가 있다.

 
펜을 드니 두서없이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올라 생각나는 대로 적었으나 끝이 없을 것 같다.

 
세브란스 병원에 옮기고 병실을 바꾼 후 별다른 일이 없음을 확인하고 귀가하였는데, 새벽에 전화를 받고 마음이 섬찍함을 느끼고 병실에 달려간즉 병세는 급전하여 산소 호흡 중이었다. 의식 불명의 박사를 지켜 보고 있으니 주마등처럼 지난 일들이 생각났다. 주치의인 내과 과장으로부터 병세에 병원 치료가 도움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철야 지키고 있던 김교철(金敎哲), 이원길(李元吉)-두 분다 친척-두 분으로부터 오전 9시반경 장 박사께서 “홍열이, 홍열이!” 하고 두 번이나 부르시므로 “여기 없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고 되물으니 다시는 말씀이 안 계셨다는 말을 전해 들은 순간 나는 참던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철야 간호해 드리지 못함이 한스럽고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부르셨나 하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착하여 더할 수 없이 원통한 마음 금할 길 없다.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박사님, 박사님은 이 민족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계시기를 기원하시며 하느님 곁으로 가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