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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채록 · 회고

회고 - 신앙의 정치가 (선우종원)

선우종원(鮮于宗源, 전 장 총리 비서실장)



몸에 밴 민주주의


 
한 사람이 생애를 마치기까지 그가 겪어 온 발자취 가운데서 우리는 무한한 외경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한 가닥의 연민의 정을 갖기도 한다.

 
이미 유명을 달리하여 타계에 있는 장면 박사에 대한 회고도 어떤 의미에서는 고인에 대한 왜곡을 가져올까 해서 두려움이 앞선다. 그가 가장 신임했던 사람이나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몰지각한 분들이 그분을 몹시 괴롭히면, 겨우 “에이 고약한 사람!” 하는 것이 감정의 최고 표현이었던 분이다. 정치인이라기보다 겸허한 신앙인으로서 그를 기억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내가 처음 장 박사를 뵌 것은 1951년 6월 1일, 고 조병옥 박사의 소개로 장 박사(당시 국무 총리)의 비서실장으로 취임할 때였다. 이때까지도 나는 장 박사를 6·25 동란이 일어났을 때 민첩한 외교 활동으로 유엔군의 원조를 확보하여 공로가 높이 평가되고 있는 분이라는 것 이외는 전혀 알지 못했다. 어떤 이는 같은 천주교 신자라 하여 종교 관계로 맺어진 것 같이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비서실장으로 보좌한 1년 2개월 간, 이렇다 할 일화가 없는 것은 너무나 그분이 농담도 하지 않고 진지하여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일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민주주의는 밖에서 꾸미는 민주주의가 아니고 신앙인으로서 가지는 몸에 밴 민주주의였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무능하다고 비웃은 제2 공화국 당시 무제한으로 펼쳐진 자유에서 알 수 있고, 또 무능하다는 그 자체도 철저한 민주주의 사회의 실현에서 오는 부작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얼마나 너그럽고 민주주의를 신봉했는가 하면, 부산 피난 당시 매주 두 차례씩 국무 회의가 있었는데 국무 총리와 대통령의 주재하에 열렸다. 국무 총리인 장 박사의 주재 시엔 서로 담배도 피우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회의가 진행됐지만, 이 대통령의 주재하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담배도 피우지 못했다. (재미있는 일화는 고 조병옥 박사는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피운 단 한 사람이었다.)

 
정치 파동으로 인하여 내가 군법 회의에서 정치적 보복을 우려하여 피신하고 있을 때 더 이상 국내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 마지막으로 그분을 뵈려고 숙소로 찾아갔다. 나는 먼저 장 박사의 결의를 물어 보았다.

 
“앞으로 정치 활동을 계속하시렵니까?” “해야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그분의 얼굴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굳은 의지가 보였다. 사람들은 그분을 너무 인자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당시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사생(死生)을 초월하여 투쟁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국무 총리를 보좌하며


 
장 박사가 제2대 국무 총리로 인준받았을 때 그분은 이 대통령에게 국무 총리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이에 대통령이 쾌히 승낙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장 박사가 총리에 취임한 직후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그분은 별도로 사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극도로 노하여 이 사실을 당시 대구에서 열린 지방 장관 회의에 내놓았다. 평소 성격이 온화한 그분이었지만 이 천인 공노할 사건에는 노여움을 풀지 못하고, 추상같이 명령하여 조병옥 내무 장관과 김준연 법무 장관, 신 모 국방 장관으로 하여금 사건의 진상을 규명토록 했다.

 
당시 ‘지당 장관’이며, ‘낙루 장관’이라고 세인이 칭하던 신 모 국방 장관은 입장이 매우 난처하여 이 대통령에게 눈물을 흘리며 장 총리와 조 장관, 김 장관 등이 서로 결탁하여 이 박사를 제거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자신을 매장하려 든다고 허위 보고를 했었다.

 
그러나 장 박사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사건의 전모를 밝혀 오히려 신 장관이 이 대통령으로부터 사임을 권고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장 박사는 한번 사람을 신임하고 나면 의심하는 일이 없었다. 이는 5·16 이후 “군부를 너무 믿었던 탓”이라고 술회한 대목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당시 이 대통령이 장 박사에게 공석 중인 농림 장관과 총무처장, 법무 장관을 인선하도록 지시하자, 장 박사는 국내 사정에 어두운 탓도 있지만 내게 인선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농림 장관에 임문항(任文恒), 법무에 조진만(趙鎭滿), 총무처장에 한동석(韓東錫) 씨를 각각 추천하였더니, 그분은 잘 알지도 못하는 세 분을 나를 믿고서 그대로 이 대통령에게 건의한 일이 있었다.


부산 정치 파동 전야


 
장 박사의 국무 총리 재직 중 허다한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서 전율을 느끼게 하는 거창 양민 학살 사건과 국민 방위군 사건 등으로 가뜩이나 전란으로 혼란했던 민심을 흉흉하게 했다. 이에 책임감을 느낀 당시의 이시영 부통령은 격분해서 6·25 동란 때에 예고 없이 수도 서울을 후퇴하여 막대한 인명 피해를 가져다 준 이 박사의 비정(秕政)을 규탄하며, 대통령에게 공개 서한을 발송하고 하야를 적극 권고했으나 일축되자 자신이 즉각 사표를 내 버렸다. 이때부터 반(反)이승만의 여론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여, 1951년 7월 7일 77구락부에 반이(反李) 라인에 뜻을 둔 정객들이 규합했다. 이것이 대통령 선거 전초전으로서 차기 대통령의 선출 기준을 첫째는 민주주의 실천자, 둘째는 청렴 결백한 자, 셋째는 미국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자로 하여 인선을 하고 보니, 김성수, 신익희, 조봉암, 이범석, 장면 제씨였다. 대부분의 인사들이 장 박사가 제일 적임자라고 의견의 일치를 보아 한동석 씨가 중심이 되고 김영선 씨와 내가 실무를 담당하여 매주 정기적으로 국내외의 움직임을 장 박사에게 보고했다. 그 후 국회를 중심으로 한 원내 자유당과 재야 세력이 결속하여 내각 책임제를 들고 나와 대여 투쟁을 시작했고, 내부적으로는 1952년 5월 29일에 차기 대통령 선거를 할 예정으로 일자까지 내정했었다.

 
당시 계엄 사령관 원 모 장군은 이를 방해할 목적으로 부산시 범일동에 공산 게릴라가 나타나서 민간인 5명이 죽었다고 조작하여 계엄령 선포를 종용했다. 드디어 5월 25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원내 자유당의 핵심 인사들이 체포되자, 정부 대변인 이 모는 “김일성과 내통하여 체포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는 헌정 사상 유례없는 국회 의원의 수난 시절이었다. 25일 최종적인 선거 전략을 세우기 위해 예정 장소에 갔더니 홍익표(洪翼杓), 김용우(金用雨), 이재학(李在鶴) 의원들이 나와 있을 뿐 다른 분들은 나오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 보았더니 경남 도청 입구에 경찰과 헌병이 국회 의원이 탄 버스를 포위하고 강제로 하차시키려 하고 있었다. 한참 승강이를 벌이다가 국회 의원의 완강한 저항으로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자, 잠시 후 군용 크레인이 나타나 버스를 헌병대로 끌고 가 버렸다. 이리하여 장 박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던 운동은 완전히 좌절되고 만 셈이다.

 그 뒤 7월 4일, 구속 중에 있던 국회 의원과 피신했던 국회 의원들을 경찰이 국회로 연행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한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신앙의 정치인


 
정치 파동 당시 장 박사의 거취 문제가 지금까지 일부 인사들 입에서 와전되고 있음은 실로 고인에게 송구스럽기 한이 없다. 얼마 전 동아 방송의 ‘정계 야화’에서 어느 정객은 “일본에서 돌아온 장 박사가 정치 파동 당시 수영 비행장에 내려 바로 미 육군 병원으로 도피했다”고 했는데,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이는 너무 지나친 억설이 아닐 수 없다.

 
유엔 총회에서 3월 말에 간장염으로 돌아온 장 박사는 일본에 들러 리지웨이 장군과 요담을 나누던 중, 리 장군이 유명한 군의관 대령을 소개하여 병세를 진단할 기회를 가졌다. 군의관은 “6개월간 공무를 떠나 절대 안정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경고하였다.

 리 장군은 일본 경도에 있는 미 육군 병원에 입원할 것을 권했으나, 장 박사는 “아직 공직에 있는 몸이니, 이 대통령과 의논하여 승낙을 받은 뒤에 오겠다”고 이를 거절했다.

 3월 하순경 일본에서 돌아오는 장 박사를 마중하려고 국무 총리 서리였던 허정(許政) 씨와 내가 부산 수영 비행장으로 나갔다. 초췌한 모습으로 트랩에서 내린 그분은 완연히 병자 모습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불편한 몸을 쉴 사이도 없이 나는 허정 씨와 함께 장 박사를 모시고 임시 경무대로 직행하였다. 이 대통령은 장 박사를 보자 “아니 얼굴이 왜 그렇게 됐소? 몸이 몹시 나쁜 모양이군” 하고 놀라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 “간이 좀 나빠서 그렇습니다.” 장 박사는 대답하면서 일본에서 진단받은 결과를 이야기하며 유엔 총회의 종합적인 결과를 보고한 후, 총리 관저로 장 박사를 모시고 오니 리지웨이 장군이 일부러 일본에서 보냈다는 외국인 군의관이 대기하고 있었다. 군의관은 “총리의 치료를 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모셔 오라는 사령관님의 명령으로 왔습니다”라고 내의를 전했다. 장 박사는 이를 거절하면서, 국무 총리직을 내놓고 난 후에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한편 그 무렵, 장 박사는 심장병으로 와병 중인 부인 김옥윤(金玉允) 여사마저 미국에 둔 채로 몹시 고적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병원에 입원 중인 5월 25일 계엄령이 선포되어 다행히 난을 면할 수 있었지만, 이것 때문에 당시 거취 문제를 왈가왈부한 모측의 정치적 음모야말로 슬픈 일이었다.

 
7월 28일 계엄령이 해제되고, 그 이상 국내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일본으로 피신하기 전 마지막으로 박사님을 찾아갔었다. 그때 병원에서 퇴원하여 부산진 어느 2층 방을 빌려 쓸쓸히 은거 생활을 하고 있던 그분은 내가 피신할 뜻을 보이자 좋은 생각이라고 즉각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 뒤 8년 간을 나는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직접 간접으로 장 박사를 도와 드렸다. 일본에서 강제 추방하려는 흉계에 필사적인 투쟁을 한 것도 본국에 송환되어 허위 범죄 사실을 만들어 장 박사를 비롯한 애국자들에게 화가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말이 별로 없고 진지하면서도 아랫사람의 의견을 항상 존중한 운석 선생이었다. 몸에 밴 신앙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민주주의 실천가인 장 박사는 정치인이라기보다 거의 완전에 가까운 신앙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