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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채록 · 회고

백남익(白南翼) 신부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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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 백남익(白南翼) 신부
채록자 : 장익 주교
일시 : 2000. 12. 23.
장소 : 대전교구 교구청 법원



 1940년 3월 9일 제가 혜화동 가톨릭대학에 다니던, 그 당신에는 소신 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는 동성상업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때에 동성 상업학교 교장선생님이 장면 박사이었습니다. 장면 박사님한테 제가 배운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수신이라고 해서 오늘로 말하면 교양 과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48년에 처음으로 다시 또 장면 박사님을 가톨릭대학에서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해방이 되어서 이승만 박사가 돌아와서 1차 총선거를 하는데 정부 수립 과정에서 5월 10일 날 1차 총선거가 있어서 장면 박사님께서 종로구에서 출마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여러 가지 신분 문제가 있어서 명륜동이 그 양반 자택이셨는데 신변 보호를 위해서 선거가 끝날 때까지 대신학교에 와서 계시게 되어서 대신학교에 방을 하나, 윤을수 학장 신부님이 제공해서 와 계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한 달 이상 장면 박사님을 가까이에서 알아보시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1948년 9월 6일 날 윤을수 학장 신부님께서 구라파에 신학생들을 유학 보내는 과정에서 가톨릭대학에서 선종완 신부님은 교수 신부님으로써 로마로 성서 전공을 하시러 가시게 되고 박양훈 신부 유영도 신부 그 다음에 백남익이 이렇게 3명이 발탁되어서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같이 동행한 사람이 불란서 파리 생술피스로 유학을 가시는 황민성 신부님하고 또 파리로 유학을 간 박성종 신부님 이렇게 5명이 선 신부님을 모시고 구라파로 갔던 일이 있습니다. 구라파에 가서 10월 8일날 로마에 도착했는데 우르바노 대학, 대신학교에 유숙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12월 8일 날 그때 유엔 총회에서 한국이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받기 위해서 장면 박사님께서 한국 특사로 유엔총회에 참석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롱깔리 대주교 님이 요한 23세께서 교황대사로써 파리에 계셨어요. 그래서 장면 박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롱깔리 대주교 님께서, 교황 대사로써 아주 많이 도와 주셔서 그 파리 유엔 총회에 각 나라 대사, 대표들은 밤, 낮으로 찾아다니면서 교섭을 한 결과 12월 8일 날 한국 천주교회의 주보 성인이 되시는 무염시잉모태성모축일날 합법적인 정부로 새로 나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좋고 기뻐서 비오 12세 성하께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하여 장면 박사께서 로마에 오셨습니다.

 그때 로마에 선종완 신부님, 박도마 신부님, 예수회 신부님이 그 다음에 박양훈 신학생, 유영도 신학생, 백남익 신학생 모두 장면 박사님께서 교황성하 알현을 위해서 같이 가자고 그래서 우리가 모두 비오12세 성하를 알현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장면 박사님께서 하신 말씀은 교황대사님, 롱깔리 대주교 님께서, 파리 교황 대사로써 많이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어려울 뻔했다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장면박사님하고는 제가 이상하게 연결이 되어서 그 뒤로도 항상 연락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티칸 국무성 장관서리로 계시던 MONTINI 대주교 님과 절친한 관계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1961년 1월달 정초입니다. 이 장면 박사 정부가 수립이 되어서 1961년에 새로 개각을 완료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서 앞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순간에 김철규 신부님이라는 분이 제일 많이 개입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앞서 1961년 정월달에 안응렬 선생님께서 바티칸 참사관 겸 초대 공사로 발령이 나서 로마에 오셨고 그 뒤를 이어서 김철규 신부님이 그 해 3월달에 즉 1961년 3월에 로마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장면 박사 정부가 어떻게 되어 가는 지 그 소식을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도 걱정스러운 일이 많아서 제가 장진 교수님께 또 그때 아아큰 공대에서 공부를 하고 계셨고 또 멜지움에 신학생으로 계셨던 장익 신학생 님하고 상의해서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도와 드려야 하겠다 하는 차원에서 걱정스러운 이야기를 같이 나누기 위해서 1961년 1월초에 우리가 본 수도 한국 대사관에 전규흥 대사 님이 와 계셨는데 같이 이것저것 상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장진 교수님이나 장익학사님이 그 당시에는 신학생이었지요. 저보고 빨리 한국을 나가서 장면 박사님께 사정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좋겠다 하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것은 제 위치에서 가기가 어려웠던 것은 한국 주교단의 대표로 로마에 제가 있었기 때문에, 또 제2의 김철규 신부가 될 수 있는 그런 걱정거리가 있어서 제가 못 간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결국 못가고 말았는데 그것은 5월 16일 날 박정희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서 5.16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너무 애처로워서 그 이듬해 1962년 6월초에 제가 한 번 한국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나가게 된 동기는 한국에 교계 제도가 설정이 되어서 빨리움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서울대교구, 대구대교구, 광주대교구 빨리움을 그 기회에 제가 명륜동에 가서 장면 박사님을 찾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린 다음 어떻게 그렇게 쉽게 되었는가 하고 상의 말씀을 드리니 장면 박사님께서는 나는 도저히 정권 장악을 위해서 피를 흘리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박정희 장군이 그때 혁명을 일으키는 계획도 알았고 또 언제 온다는 것도 다 알고 있어서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있었지만 피를 흘리지 않으면 막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당시 이한림 장군이 이군 사령관으로 계실 때인데 그래서 할 수 없이 몸을 피하게 되었다.

 그때 반도 호텔에 계셨는데 사실은 먼저 미국 대사관에 가서 여러 가지 사정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때 새벽 일찍 갔더니 문을 안열어 주고 해서 즉시 혜화동 갈멜 수녀원으로 가서 피신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 뒤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제가 장면 박사님께 1962년 6월달에 찾아 뵙고 말씀을 드렸더니 피를 흘리면 절대로 안되겠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혁명을 막을 수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린 것은 이 정부가 이렇게 나가는 것은 걱정스럽습니다라고 했더니 어쩔 수 없는 사정이다라고 하시면서 이 문제에 대한 것을 전에 로마에서 1961년에 벌써 혁명이 일어나고 얼마 안있다가 이종찬장군께서 로마에 주의 대사로 부임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장성들이 미국으로 사방에 대사로 파견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때 이종찬 대사 님한테 여러 가지 말씀을 들은 것으로 볼 때는 혁명이 일어날 것을 이종찬 대사는 미리 알았던 것입니다. 얘기하기는 어렵고 그래서 박정희 장군이 이종찬 대사 님을 가끔 찾아왔다고 합니다. 같이 가자고 그래서 나는 안된다고 그러시면서 그것을 알았던 이종찬 장군께서는 허정과도 정부 밑에서 그때 국방부 장관을 했었는데 그때 그 분한테 여러 가지 들은 것을, 그리고 그 사정을 알고서 우리 이종찬 대사 님이 장면 박사님께 직접 직언한 것은 가능하면은 박정희 장군을 참모총장을 시켜라 그러면 좋을 것이다라고 이렇게 건의를 했답니다.

 그런데 그때 김철규 신부님하고 가까이 일을 하고 계실 때인데 장도연이를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도연이는 양다리 걸치는 사람이라 어려운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셨다는데 그렇게 된 것이고 그래서 그때 이종찬 대사 님이 말씀하신 대로 박정희 장군을 참모총장으로 모셨다면 이런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가를 저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 정부를 만들면서 하루는 이종찬 대사 님하고 상의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종찬 장군님만을 특별히 모셔서, 선배로 모셔서 그분한테만은 존경하는 존칭을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1968년에 개헌을 하려고 할 때 개헌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정권을 이종찬 대사 님한테 넘겨주려고 박정희가 생각을 해서 그런 상의 말씀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종찬 대사 님은 안하겠다고 거절을 했기 때문에 그냥 혁명을 일으킨 것이지요.

 그래서 다시 종신체제로 그냥 해 나가게 되었는데 1978년 10월 28일 날 삽교 방조제 낙성식이 끝나고 서울에 와서 안가에서 몇이 같이 파티를 하는 그 장소에서 김제규 중앙 정보부장이 반란을 일으켜서 일이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장면 박사님께서 좋은 일을 많이 하실 수 있었는데 그렇게 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애국심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무능해서 그렇게 당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내가 장면 박사님에 대한 아는 대로 말씀드렸습니다.


 (2000년 12월 23일 대전교구 교구청 법원에서 녹음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