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5.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하여


 1948년 6월 25일 UN 한국 임시위원단은 “한국 인구의 거의 3분지 2 이상이 거주하며, 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었던 한국내 지역에서 선거권자의 자유의사를 유효하게 표현한 1948년 5월 10일의 투표결과”를 선언하였다. 1948년 7월 12일 국회에서 헌법이 채택되었고, 7월 20일에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李始榮)이 선출되었으며, 8월 15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전세계에 공표되었다. 한편 9월 3일 북한정부의 수립도 선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건국의 일등 공신으로 부상한 운석 선생은 자신이 수행한 과업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파한다. "이제 헌법이 제정되고 대통령이 당선되고 정부가 수립되어 8월 15일 해방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뚜렷한 존재를 전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금일과 같은 유기적 연결성을 띤 국제관계에 있어서 어느 한 국가가 일방적으로 그 독립과 존재를 선포만 한다고 그대로 인정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국제승인의 결정을 필수적으로 밟아야하는 만치 우리 정부가 그 수립을 선포한 지 바로 그 다음달 파리에서 개최되는 「유엔」제3회 총회에 우리 정부의 국제승인을 받기 위한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된 것이다. 의외에도 불초한 필자가 동 대표단의 수석으로 임명되어 이 역사적 대임을 부하(負荷)하고 동 9월 초순에 파리로 향발하였던 것이다.]



외교관 여권 1호

외교관 여권 1호

≪대한민국 정부가 발행한 외교관 여권 제1호≫

[제3차 유엔총회에 파견된 대표단은 이러한 형태의 여권을 처음으로 발급받아 출국하였다. 이 여권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일행 중 한 사람인 정일형의 회고에 의하면, 운석 선생이 임무완수의 결의를 다지고자 일행을 이끌고 헤이그의 이준 열사 묘소를 참배하러 암스테르담 공항을 빠져나갈 때있다. "우리 일행이 암스테르담 공항에 도착하여 공항을 빠져나갈 때 해프닝이 벌어졌어요. 일행 선두에 섰던 내가 여권을 내밀자 이리저리 뒤적이던 공항 직원이 '이 여권을 내게 팔 수 없습니까'고 묻는 거예요. 여권 모양도 다른 나라 것과 다르고 이름 석자를 붓글씨로 쓴 이 희귀한 여권을 기념품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모양이나 그래도 명색이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 제2호인 내 것을 그렇게 보다니 괘씸한 생각마저 들었어요."]



 
근대 국민국가는 민족을 단위로 형성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 남북한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국제적 승인의 획득 여하가 국가 생존을 위한 최우선의 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UN 총회는 대한민국을 3차 회기에 참석하도록 초청하였으며, 국회 외무위원회에 소속이었던 운석 선생은 8월 11일 제3차 UN 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선출되었다. 선생은 9월 9일 차석대표 장기영(張基永), 고문 조병옥(趙炳玉) 등과 함께 김포공항을 출판하여 다음날 뉴욕에 도착하였으며, 15일 선편으로 파리를 향해 출항한 지 닷새 뒤인 20일 파리에 안착해 다음날 유엔 총회 개회식에 참석하였다. 이후 선생은 3개월 간에 걸친 각고의 노력의 결실인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12월 8일 UN 정치위원회에서, 그리고 12일 총회에서 획득하는 괄목할 만한 외교적 성과를 일구어 내었다. 그러면 선생이 말하는 UN 총회에서의 정부 승인 획득 과정을 들어보자.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수립하고 이것을 국내외에 선포한 날이 8·15 해방기념일이었으니 그 의의나 감격은 더욱 컸던 것이다. 이제 우리 국민들에게 부과된 사명은 우리의 정부를 UN이 승인하여 주도록 하는 데 있었다. 정부수립 후 얼마 안되어 정부에서는 제2차 유엔총회결의에 따라 국회의원 중에서 제3차 UN 총회에는 정치고문으로 조병옥 박사, 경제고문으로 김우평(金佑枰) 씨, 법률고문으로 전규홍(全奎弘) 박사, 그리고 김활란(金活蘭) 정일형(鄭一亨) 양 박사와 모윤숙(毛允淑) 여사가 대표단의 멤버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대단할 것 같지도 않으나 신생 독립국가의 대표요 거기에 국제외교라는 생전 처음 나가보는 우리들이었음으로 성공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다 낯설을 뿐만 아니라 날고 뛰는 세계 여러 나라의 일류 외교관들의 틈에 끼어 우리들의 실정을 호소하고 부탁하는 일이니까. 하여튼 50여 개 UN 회원국 대표를 다 한 번씩 만나서 얘기하는 데 꼭 3개월이 걸렸다면 충분히 그때의 고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마침 UN 총회에서 이스라엘 문제 때문에 한국문제의 상정이 지연되어 있었다. 그러니 우리들의 마음은 바싹 바싹 초조해 오는 것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들 일행은 헤이그에 묻혀 있는 이준(李儁) 열사의 묘지를 멀리 화란으로 찾아가서 참배하고 새로운 투쟁결의를 그 묘소 앞에서 엄숙히 맹세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기어코 성공하자고 결의를 더욱 굳게 다지었다. 그리하여 불철주야로 노력한 결과 제3차 UN 총회의 마지막날 밤에 UN은 드디어 대한민국 정부를 48대 6의 압도적 다수로 정식으로 승인했다. 그 때의 기쁨이 어느 정도였다고 하는 것은 동행했던 그 얌전하고도 점잖은 김활란 박사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축배를 들고 춤까지 추고 했다면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3차 유엔총회 한국 대표단

≪제3차 유엔총회에 임한 한국 대표단의 얼굴들≫

[(앞줄9 조병옥, 장면 수석, 장기영 (뒷줄) 정일형, 모윤숙, 김활란, 김진구, 김우평. 다음 모윤숙의 회고에 보이듯이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한 운석 선생의 노력은 문자 그대로 몸과 마음을 다 바친 것이었다. "장 박사는 자주 덜레스 씨를 만나는 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를 쓰나라고 식사도 제대로 못할 형편이었다. 식사라면 극히 간단한 우동이나 자장면으로 했다. 잠자리는 늦게 드시면서 새벽이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성당에 가서 새벽 기도를 드렸다. 장 박사는 우리 옆방에 계셨지만 우리와 생활 보조를 맞추기에는 너무나 생활을 초월한 분이어서 우리는 장 박사를 독립당이라고 불렀다." 장기영의 회고에 따르면, 9명의 대표단은 각자 성격에 따라 "독실한 가톡릭 신자인 장면 대표는 독립당, 조병옥을 비롯한 김규홍, 김우평 그리고 나는 주당(酒黨), 정일형, 모윤숙, 김활란, 김준구 씨는 국민당" 3개 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다.]

각국 대표단들에게 지지를 설득하는 운선 선생

≪각국 대표단들에게 지지를 설득하는 운석 선생의 진지한 모습≫

[다음은 표결에 즈음해 각국 대표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당시에 대한 선생의 회고 "이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최종 날이 가까워지니까 여러 나라의 대표들이 자기네들의 이해관계가 깊은 의제가 끝났다거나 또 크리스마스도 가까워지고 하여 짐을 꾸리고 선박 비행기편을 예약하며 귀국할 차비를 하고 있어 우리가 발이 닳도록 그들을 찾아다니며 호소도 하고 붙잡고 늘어지기도 하였으나 가결 전일의 야간회의 때도 날을 춥고 배는 고픈데 새벽 두시까지 문에 지켜서서 우리편 제국 대표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애쓰던 일과 다음날 고단해 잠자는 각국 대표들을 찾아가 깨워서 오후 3시까지 회의에 참석하도록 사정사정하던 일이 생각난다."]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음으로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하게 하는 데 있어 운석 선생의 헌신적 노력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가톨릭 교단의 지원이 작용했음에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선생의 회고담에 잘 나타난다.

 
“이 UN 총회에는 날고 뛰는 노련한 대정치가 외교관들이 운집하여 각기 종횡무쌍한 모책비술(謀策秘術)로 최고도의 역량을 발휘하는 마당이라 탄생한 지 1개월밖에 안 되는 신생국가의 초년생 대표가 외교의 아무 경험도 없이 여기 한몫 끼어 당돌하게 국제승인을 받으려 드는 것은 일면 무모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대표단은 국운의 장래를 짊어지고 사불성생불환(事不成生不還, 일을 이루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의 철석 같은 결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섣불리 모책을 롱(弄)하지 않고 오로지 표리 일관한 성심성의의 피력으로 UN 당국 각국대표를 역방하며 아국의 실정을 인식시켜 우호적 찬수(贊手) 투표를 호소할 뿐이었다. 치열한 공산측의 방해공작에 응수하여 이를 저지시키는 것도 실로 큰 일 중에 큰 일이었다. 한편 언론 기관에 응원을 청하여 맹렬한 선전공작을 전개하였다. 특히 가톨릭 언론기관에서의 절대한 호응과 교회측의 기도 후원은 우리에게 결정적 승리를 가져오게 한 커다란 요인의 하나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대표 현 국무장과 덜레스 씨를 비롯한 우방제국 주요대표들과 연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우리 대표단의 3개월간 고전악투의 결과는 헛되지 않아 1848년 12월 12일 오후 5시 8분 우리 광복사상에 영원히 빛나는 대한민국독립의 국제승인은 UN 파리 제3회 총회의 최종일 최종채택의안으로 마칙내 결정부(決定符)가 찍혀져다.”

운석 선생의 UN 총회 연설문의 요약문

≪운석 선생의 UN 총회 연설문의 요약문≫

[이 연설문은 "존경하는 의장각하, 회원국 대표 여러분! 본인이 유엔총회 본 위원회에 참석하신 회원국 대표제위 앞에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광영으로 생각합니다"라는 말로 시작되어 "이 자리에 참석하신 세계 자유 애호국가 대표 여러분은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양심상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본인의 연설을 이로써 끝내려 합니다. 최후로 본인은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한 바 있는 한국정부가 곧 본인이 대표하는 대한민국 정부임을 재확인하고 우리 정부를 이 자리에서 공식으로 승인하는 동시에 모든 회원국가들이 또한 개별적으로 승인하도록 권장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로는 말로 끝난다. 200자 원고지 38매 분량의 이 연설문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그 승인을 촉구하는 논리의 정연함이 돋보인다.]


 
먼저 덜레스로 대표되는 미국의 지원은 대한민국 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획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덜레와의 긴밀한 유대와 협조를 맺어준 끈은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던 신앙의 열정이었다. 이 점은 운석 선생이 “동서의 냉전이 벌어질 때부터 자유세계 외교진의 제일인자로 반공투쟁의 선봉에서 싸워 왔으며 모든 자유민들의 존경과 기대와 신뢰를 받아왔을 뿐 아니라 특히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하는 미국대표 덜레스(John Foster Dulles)와의 추억담에서 여실히 알 수 있다.

 
“덜레스 씨를 만나게 되었을 때에 나는 처음부터 그 분에게 호의를 갖게 되었으며 그 분도 나에게 처음부터 호의로 맞아하여 주고 끝까지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내가 보이게 그 분은 온화하고 다정한 성품의 소유자이며 무슨 일에든지 성실하고 열심하였으며 인간성이 풍부하고 덕이 있는 분인 동시에 강력한 종교신념과 희망에 불타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분과는 속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고 또 그가 한 얘기는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었다. 제3차 국련 총회가 개최되고 있는 동안 덜레스 씨로 보면 전세계 각처의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많았겠지만, 그 중에서도 한국문제 대하여는 각별한 열성을 가지고 노력하여 한국문제의 제안으로부터 한국대표의 참가결정, 북한공산대표 초청안의 부결, 토의 전술, 득표공작 등 여러 가지 까다로운 문제들을 줄기차게 해결해 나갔으며, 우리 대표단의 활동에 대하여도 세심한 충고와 조력을 다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이스라엘 문제로 한국문제의 토의가 지연된 데다가 소련대표를 위시한 공산진영의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한국문제 토의에 대한 지연작전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총회 폐회예정일까지 결정을 못보고 다음 총회로 넘어가게 될 우려가 증대하여 우리 대표단은 여간 애가 타지 않았는데 덜레스 씨의 열성과 탁월한 역량이 믿음직하여 우리의 용기를 더욱 북돋아 주었다. 한국 문제가 최종의제로 상정되어 폐회 전일이 되었는데도 결말이 안 나게 되니까 덜레스 씨는 당시의 총회 회장인 호주 외상 에바드 씨에게 특별 교섭을 하여 야간회의를 열고 새벽 두시까지 토의를 하였으며, 그 다음날 오후 3시에 또 모이게 하여 오후 5시 경에 결말을 보았던 것이다… 이 때에도 덜레스 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니씩 듣기로 하지”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 씨는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덜레스와 운석 선생

≪덜레스와 숙의하는 운석 선생≫





 
다음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한 것이 가톨릭 교단 즉 바티칸의 역할이다. 제2차 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항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Pius) 12세는 1921년부터 운석 선생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번(方) 주교를 특사로 한국에 파견하였으며, 이는 국제 관례상 교황청이 한국을 주권국가로 승인한 것으로 이해되어 한국이 국제적 승인을 얻는 과정에 큰 힘이 되었다. 특히 비오 12세는 제3차 UN 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해 지원할 것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티니(Montini) 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바티칸의 지원은 전적으로 운석 선생을 매개로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선생이 UN 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된 이면에는 가톨릭의 영향력을 활용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복선도 작용한 것이었다. 이 점은 이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고문이었던 올리버(Robert T. Oliver)에게 보낸 서한에서 “우리 대표단을 이끌고 갈 사람은 장면이 될 공산이 가장 크오. 그는 유엔 한위가 가장 쉽사리 동의해 줄 인물이오. …이러한 절차가 필요한 것은 아니나 그들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단장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오. 또한 그 사람은 정당인이 아니며 어딜 가나 가톨릭교회의 후원이 있을 것이고 그는 국회의원이오”라고 운석 선생의 대표 선임 이유를 설명한 데서, 그리고 UN 승인 직후인 12월 16일 운석 선생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바티칸을 방문해 교황을 예방하고 신생 대한민국에 정신적 지원을 요청한 데서 입증된다.

바티칸 궁을 공식 방문한 운석 선생

≪교황 비오 12세 예방차 바티칸 궁을 공식 방문한 운선 선생 일행≫

[좌로부터 박고영 신부, 선종완 신부, 성(成) 베드로 신부, 장기영, 운석 선생. 선생은 약 40분간 교황을 단독 알현했으며, 일행은 추후 알현했다. 이 때 선생은 번 주교의 지위를 교황청 대표로 격상시켜 줄 것을 품의했으며, 이에 교황은 그를 최초의 주한 교황청 대사로 임명하였다.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UN 총회에서 한국정부 승인을 획득 후 국제적으로 중요한 위에 있는 나마(羅馬, 로마) 교황청의 정신적 지지를 얻기 위하여 이 대통령의 특사의 자격으로 동년(1948) 12월 하순 바티칸으로 가서 교황 비오 12세께 알현. 전적으로 지원한다는 확약"을 받았다 한다.]


 
이와 같이 운석 선생이 거둔 UN의 한국정부 승인에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자들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운석 선생의 인품과 성실성 및 신앙의 힘이 음양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총회에서 최종 표결을 앞둔 12일 새벽 3시 조국의 미래를 신 앞에 기구하기 위해 성당을 찾은 선생을 동행한 모윤숙의 증언을 들어보자.

 
“비가 멎은 파리의 날씨는 좀 추웠다. 파리 시가는 적막에 잠겨 있고 지나가는 자동차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머리 위에 다시 보슬비가 내리는가 싶다. ‘미스 모, 이렇게 동반해 주니 참 고맙소. 새벽에 기도드리는 습관을 가지게 되니 마음도 시원해지고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되오.’ 장 박사는 세인트 조셉 성당에 들어서자 촛불이 켜진 성모상 앞에 경건히 무릎을 꿇고 기도의 세계에 몰입되었다. 30분이 지나도록 장 박사는 기도를 계속했다. 다리가 아프기 시작한 나로서는 고통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깊은 세계에서 몰아의 경지를 맛보고 있는 듯한 엄숙하고 성스러운 표정으로 기도를 드리는 장 박사는 거의 1시간만에야 일어섰다… 세인트 조셉 성당을 나왔을 때도 날안 아직 채 밝지 않았다. 나는 그냥 호텔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요 근처 아베마리아 성당이 있는데 거기 가서 한 차례 더 미사에 참례합시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나는 가만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분의 인격에 룰 한 5백m 쯤 떨어져 있는 아베마리아 성당으로 따라갔다… 12월 12일의 먼동이 터 온다. 9시에 개최되는 총회를 앞두고 다시 장 박사가 명령을 내린다. ‘각국 대표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다시 찾아가 확인합시다. 최후의 승리를 확보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운명은 우리의 쌍견(雙肩)에 얹혀 있습니다. 자,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