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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 및 저서 - 신앙백서

신앙백서 - 프로테스탄트 형제들과 왜 대화를 해야 하나 (1964. 09. 20.)



합일의 필요성 절실


  ‘가톨릭 시보’의 지상 대화란을 통하여 이미 여러분의 의사 발표가 있었던 바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도 대화가 필요한가’의 설문은 새삼 재론할 필요조차 없이 자명한 일이므로 이 부분은 생략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일치 운동에 임하느냐가 문제다.


 주 예수께서 교회 하나만을 세우셨고 이 교회가 당신의 신비체로서 굳이 결합하기를 원하셨으며, 이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셨음은 성경에 너무나 명백히 기록되어 있어 여기 일일이 인용할 필요조차 없다.


 예수님의 이러하신 뜻과는 판이하게 벌써 동방 이교(離敎)는 9세기부터, 프로테스탄트 교파는 16세기부터 각기 분리되어 오늘까지 그 상태는 계속되고 있다.


 한 가정에서도 부모 처자가 저마다 딴 교회를 찾아가고, 한 직장에서 환담하던 친구가 한 사람은 성당으로 한 사람은 예배당으로 방향을 달리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웃지 못할 비극이 아닐 수 없다.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수백 년을 두고 그리스도 안의 형제들이 피차의 신앙 문제와 이해 관계로 감정이 격화되고 혹은 열전으로 원수같이 싸워 왔고, 설전과 필전을 벌이기를 마치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을 모르는 사람같이 하여 왔다.


 지루한 싸움에 지쳐 버려 이제 와서는 아예 불상패(不相貝)의 장벽을 쌓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접촉마저 끊어져, 갖은 곡해와 비방으로 양자간의 거리는 점점 멀어 가기만 했다.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드는 형제들로서 이와 같이 한없이 싸우기만 해서야 어떻게 주님의 제자들이라 하겠으며, 비신자들을 어떻게 그리스도의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합일치 않는 한 이 세상도 우리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조소할 것이다.


 우리가 합일하자는 것은 유물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께서 원하시고 기도하신 대로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을 믿게 하기 위함이다.


 전세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신봉하는 사람이 겨우 28퍼센트요, 그중 가톨릭이 약 반수밖에 안된다. 우리는 먼저 우리끼리의 완전 일치를 보고, 이와 병행하여 전인류를 다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들일 의무가 있다.


 이 거창한 대업을 성취시킴에는 천주 성령의 전지 전능이 작용해 주실 것은 물론이려니와 이 대업에 의무적으로 참가하는 우리 신도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진리와 사랑의 공통점 찾아



 이에 임하는 우리의 기본 자세로서 첫째로 필요한 것은 상대편을 선의로 이해하는 데 있다. 우리 가톨릭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1) 프로테스탄트 형제들도 우리와 같이 주 예수를 믿는 크리스찬이다.


(2) 그분들도 성경 말씀을 믿는다.


(3) 그분들도 천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4) 그분들이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된 것은 우연히도 신교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신교계의 전도인에게 신앙을 전문했기 때문이지, 처음부터 의식적으로나 독자적으로 그 종교를 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자신들도 프로테스탄트 가정에 태어났던들 속절없이 프로테스탄트 신자가(소수의 예외도 있지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것은 가톨릭 부모에게 태어났기 때문이며, 또는 가톨릭 인사와의 접촉에서 감화되어 입교했기 때문이지, 우리가 선천적으로 환경의 영향 없이 우리 자신이 잘나서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아닌 만큼 스스로 우월감을 가질 아무런 이유도 없다.
다만 하느님께 이런 은혜를 감사할 뿐이다.

(5) 프로테스탄트 형제들도 양심대로 주님의 계명을 성실히 잘만 지키면 주님의 은혜로 구령할 수 있다.


(6)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는 상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


 쌍방이 분열된 데는 분열 당시 서로 책임이 있고, 우리는 그 분열의 유산을 인계받은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이 결과적으로 저지른 과오는 이루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그들이 교회에 반기를 들게 된 동기를 살펴볼 때 불순성도 있는 한편 당시 교회의 폐풍을 혁신해 보겠다는 의욕도 없지는 않았다.


 그 후, 가톨릭 교회는 끊임없이 자가 혁신을 이행하여 왔지만, 아직도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의 요망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상대편을 더 잘 이해하자면 그들과 자주 접촉하고 자주 대화하여 성서·교리·역사에 정통하도록 부지런히 연수하고, 아예 쟁론으로 이기려 들지 말고 어디까지나 겸허한 태도로 진리와 사랑의 공통 착점을 마련하기에 힘써야 하며, 상이점을 영구화시키지 말고 관용과 협동과 합작으로 일치의 공동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가톨릭 교회가 종가이니, 덮어 놓고 우리 교회로 오라고만 외쳐 봐도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두 팔을 벌리고 마중 나가야 하며 솔선하여 일치에의 모든 장애물을 치워 주어야 한다. 일치에의 거대한 과업은 개인간의 대화만으로는 성취되기 어렵다.


 가톨릭 신도의 시대적 요구이며 동시에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의 절실한 희망인 교회 전례의 대중화, 성서의 보편화, 평신도의 지위 향상, 기타 개혁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바티칸 공의회에서 진지하게 토의하여 교황이 선두에서 지도 추진함으로써, 이런 모든 문제는 불원 원만히 해결되어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다 같이 천주 성령의 총광이 공의회의 교부들과 모든 크리스찬 개개인의 머리 위에 충만하여, 주 예수님이 원하시는 한 신비체로 합일되기를 열성껏 기구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특히 프로테스탄트 형제 제위께 가톨릭교에 대한 종래의 편벽된 선입견이 깃들였다면(가톨릭은 우상 숭배자라거니, 독재하에 있다거니, 성모를 예수보다 더 높이 숭배한다느니, 성경 읽기를 금한다거니, 미신자라거니, 신부의 사죄권 행사는 월권이라느니, 돈을 받고 사죄한다느니 등등), 피차에 철저한 대화와 교류로써 이를 깨끗이 청산하고, 꼭 같은 선의의 이해와 열성적 기도로 일치 달성의 성업을 향하여 협조 매진하는 아량을 가져 주시기를 절실히 요망하는 바이다.



(1964.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