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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 및 저서 - 신앙백서

신앙백서 - 일반의 교회관 비판 (1964. 06. 03.)



서언



 얼마 전부터 ‘가톨릭 시보’를 통하여 교회 밖의 저명 인사 여러분이 피력한 가톨릭관을 읽고 매우 참고된 점이 많았다.


 그중 몇몇 분의 관점은 사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보았기에, 그 몇 가지만 추려서 우리 입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형식주의



 가톨릭 교회의 의식은 “너무 복잡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절차가 많다. 그렇게 복잡하고 기이하게 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공허한 형식주의에 흐르고 있다” 운운으로 마치 가톨릭 전례가 무의미한 형식주의에 빠진 것인 양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관찰은 가톨릭 전례의 유래와 그 표징하는 참뜻을 잘 모르는 데서 나온 표현이 아닐까 한다.


 가톨릭 전례는 말 한마디나 동작 하나가 다 깊은 뜻을 지니고 있으며, 모두가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로 끌어올리는 것뿐이다.


 종교 예식이 인간 행위의 최고 정성인 만큼 거기 따르는 장엄한 예절이 있어야 할 것이며, 교리가 오묘하고 전통이 오랠수록 더욱 정미(精美)해질 것도 당연한 사리다.


 하느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모든 전례 절차를 구체적으로 극히 세밀히 가르쳐 주셨고, 예수께서도 여러 의식을 몸소 행하시고 사도들이 이를 지켜 오늘에까지 전해 내려왔다.


 교회 초창기에 박해를 당하여 굴 속에 숨어서 예식을 올릴 때는 부득이 간소하게 지냈지만, 교세가 크게 확장된 오늘에 와서 더 인상적이고 장엄하게 지내야 할 것은 당연한 자연의 추세다.


 물론 내적 숭경의 정성이 없이 의식에만 그친다면 이것이야 말로 허례일 뿐이지만, 이는 결코 교회의 뜻이 아니고 따라서 전례 자체가 허식적일 수 없는 일이다. 전례는 오히려 신앙의 열렬한 불꽃을 더욱 치열하게 일으켜 주는 것이다.


 국외 인사로서 그 내포된 참된 뜻을 모르고, 겉으로만 본다면 ‘복잡하고 무의미하고 기이하게’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러한 평을 내리기 전에 한번 그 유래와 상징하는 심볼의 뜻을 먼저 알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현실과 인간 부정



 또 여러분은 가톨릭교가 지나치게 “현실과 인간을 부정하는 것 같다”고 보고 본능을 학대함은 자기 파탄과 위선으로 흐르게 하며, 자학만이 절대자를 향하는 유일한 길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은 혹 가톨릭의 극기의 교훈과 수도 생활의 근본 정신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한 데서 나온 말이나 아닐까?


 가톨릭에서는 현실도 인간도 부정한 적이 없으며 자학만이 절대자를 향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치는 일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인생의 최종 목표는 현세에 있지 않고 내세에 있다”고 분명히 가르치셨고, 내세의 행복을 위해서는 현세의 향락과 이득에만 몰두하지 말고 이를 정신적으로 초월하여 모든 추잡한 쾌락과 불의의 욕심을 버리고 십자가의 가시밭길을 걸을지언정, 오직 십계명의 테두리 안에서 옳은 길을 걸어가라는 교훈을 우리는 그대로 준수하려고 힘쓸 따름이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 25)고 하신 예수의 바로 그 말씀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세를 위해서 현세의 모든 현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부정한 향락과 불의의 행위를 금할 뿐이다.


 교회는 오히려 내세의 준비 과정으로서의 현세에서 정의에 입각한 인권 존중과 협조 정신으로 진정한 공동 복지를 달성하도록 전폭적으로 사회 현실에 참여하여 꾸준히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역대 교황들의 사회 정책에 관한 회칙들이 바로 가톨릭의 현세 복지를 위한 기본 노선을 보여준 것이다. 이 거창한 목표 달성을 지향하여 무수한 성직자·수도자·평신도가 각종 자선 사업, 개발 사업, 교육 문화 사업 등에 헌신 봉사하고 있는 성스러운 모습을 바로 보아 주기 바란다.



폐쇄적이고 독선적



 외부 인사들 중에는 가톨릭 교회가 아주 완고하고 독선적이라고 보는 이가 많은 모양이다. 이런 관찰은 그분들 나름으로 이유도 있겠지만, 이는 필연코 16세기 종교 개혁의 여파로 조성된 자유주의의 선입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진리는 하나다. 더욱이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신앙의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점을 특히 강조하여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며”(에페 4, 5)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일치의 원칙이 엄연히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개혁 이래 수백 종의 교파가 분열되어 수습할 수 없는 혼란에 빠졌을 때, 아무 분별도 없이 갑도 옳고 을도 옳고 다 옳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유일한 신앙의 진리를 수호하는 올바른 태도일까? 수호를 폐쇄로 보고 독선으로 본다면 너무 지나친 표현인 것 같다.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교파가 종래의 편견과 장벽을 제거하고 형제의 사랑으로 재일치하자는 운동을 전개하여 꾸준히 이를 추진해 왔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 교회 일치 운동을 철저히 실현시키려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고 전세계 주교들과 동방 오도독스,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까지 초청하여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진지하게 토의하였고, 이에 관한 율령까지 내려 전세계 종교인의 누적된 염원을 성취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현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리스도 신봉자뿐 아니라, 비그리스도교 관계와 무신론 관계 사무국까지를 교황청 내에 설치하고, 흉금을 터놓은 대화의 이해를 통하여 다 같이 하느님을 믿고 섬기도록 온갖 정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신앙은 강요할 수 없는 일인 만큼 어디까지나 각 개인의 양심에 맡겨 자유 선택의 권리를 존중하고, 기존 종교의 장점과 각국의 민족 문화의 좋은 전통을 살려 신앙 진리와 적절히 조화되도록 폭넓은 이해로 조물주에 대한 공동 숭경의 거창한 과업을 힘차게 추진하고 있다.


(1964. 06.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