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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 및 저서 - 신앙백서

신앙백서 - 반세기 유서 깊은 호교서 “교부들의 신앙” 1 (1964. 03. 29.)


번역 출판 경위와 개정판 구상


신앙 생활의 반려

 전교생 120명 중 내가 유일한 천주교 신자임을 알게 되었다. 대다수가 무종교자요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4, 5명 있을 뿐, 종교 문제는 교내에서 별로 화제에 오른 일조차 없었다.


 그러던 중 서울서 유명한 설교자 현(玄) 목사가 수원 3·1교회에서 부흥 운동차 내려와 연일 연야 그의 독특한 웅변으로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현 목사는 원래 웅변가로서 설교 중에 독립 사상을 교묘히 고취하여 젊은 학도들의 정열을 자극하고 항일 의식에 피끓게 하였다.


 수원 농림 학생들은 너도 나도 현 목사의 설교를 듣고자 수십 명씩 짝을 지어 예배당으로 내왕이 빈번했다. 일제 억압하의 울분도 풀 겸, 허탈한 공허감에 신앙의 양식도 맛볼 겸 감격과 흥분의 회오리바람에 쓸려 학업도 제쳐놓고, 밤이면 설교, 새벽이면 산상 기도로 수십 명이 열광적 신자로 돌변하여 교내는 어느덧 프로테스탄트 일색으로 뒤덮였다. 연일 화제가 현 목사 설교의 예찬이요 그리스도 복음의 토론이다. 그중에도 두드러진 지도자가 한 사람 있었으니, 그는 곧 나보다 한 반 상급인 김모 씨다. 그는 열성도 대단하려니와 일찍 성서 공부를 철저히 한 분이라, 교내 목사 격으로 매일 기숙사의 이 방 저 방을 순회하면서 전도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자연 천주교 문제가 나오기만 하면 “천주교란 완고하고 미신적이고 부패한 사교”라고 하여 여지없이 조소하는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학우들은 교내에서의 유일한 천주교인인 내 얼굴을 주시하면서 비웃곤 하였다.


 자아시(自兒時)로 천주교가 골수에 배인 나로서 천주교만이 옳다고 확신해 왔던 내게는 청천 벽력이었고 그지없이 놀랐다.


 나는 분격을 참지 못하여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였지만, 그 김씨는 청산 유수로 성서 구절을 연상 인용하면서 ‘고린토 전서’ 몇 장 몇 절에 이런 말이 있지 않느냐, ‘골로사이서’ 몇 장 몇 절의 이 말씀을 모르냐는 식으로, 또 이러한 부패 사실이 있지 않느냐고 교회사의 사실을 들어 육박하는 데는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고린토 전서가 무엇이고 골로사이서가 무엇인지 들어 본 일도 없고 읽어 본 일도 없고, 더욱이 교회사는 캄캄할 뿐이라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우리 교회의 성서 관계 서적이라고는 ‘성경 직해’밖에 없었고, 호교 관계로는 진교 사패(眞敎四牌)가 있을 뿐, 이나마도 보급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모두가 이 방면에 어둡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여지없는 부전 참패(不戰慘敗)를 당하고 나서 내가 받은 정신적 타격이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가톨릭 신앙에 대한 신뢰감만은 확고 부동했지만, 너무나 교리에 암매(暗昧)했던 탓으로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냉소의 쓴잔만 마신 울분이란 나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어언간 나도 20세쯤 되고 보니, 우리 교리 자체에 대한 나로서의 의문도 차차 머리를 들게 되어 이에 대한 만족한 해답을 구해 보려 했으나 적당한 서적도 없고, 신부님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여 다른 성무에 바쁜 몸들이라 개인 지도의 시간적 여유조차 별로 없었다.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내 신념을 채우려면 외국으로 유학 나가 외국 원문을 통한 광범위한 섭렵으로 마음껏 교리 연구와 교회사 연찬에 정진해 보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따라서 농림 학교를 졸업한 후, 도미할 준비로 당시 유일한 영어 학교인 YMCA 영어반에 통학하였다.


 마침 그때 미국 메리놀 외방 전교회 총장 월쉬 신부가 아시아의 전교 실정을 시찰하러 중국 기타 몇 나라를 역방(歷訪)하고 귀로에 한국에 들렀을 때, 그분이 중국 상해 부호 주(朱)씨의 아들 형제를 대동하고 미국 유학을 주선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망을 금할 길 없어, 가친께 나도 도미케 하여 달라고 연일 간청하여 드디어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는 기미년 3·1 운동 때라 일정하 한국 청년의 도미 유학을 허용할 리가 없었다.


 그 다음해인 1920년에 여권 신청을 내고 몇 달을 기다려도 종무소식이었으나, 천신 만고 끝에 겨우 여권이 발급되어 그해 11월에 도미한 것이다.


 미국에 도착하는 대로 곧 메리놀 본부로 월쉬 총장 신부를 찾아 내의를 고하고 지도를 청하였다.


 그는 교회 학교 중 역사 깊은 맨해튼 대학으로 입학하기를 권하면서 우선 예과에서 영어 공부를 더하라고 하여 우리 초대 교황 사절이 되신 방(方) 주교님이 교장으로 계시던 베나드 소신학교에서 영어를 습득하도록 주선해 주셨다.


 그 다음해의 신학기부터 맨해튼에 입학하여 필수 과목으로 매일 한 시간씩 교리를 배우기는 하였으나, 나는 따로 교리·교회사·호교학 등을 자습하면서 여러 신부님께 개인 지도를 청하여 거의 무제한한 질문으로 신부님들을 괴롭혔다.


 하루는 월쉬 총장 신부님과 기차 여행을 같이할 기회가 있어 차중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오해를 풀어 주는 데는 어떤 책이 제일 좋으냐고 물었더니, 그분 말씀이 “‘교부들의 신앙’이면 그만이니 이것을 정독하여 보라. 또 ‘퀘스천 박스’도 매우 좋으니 이 두 책만 철저히 공부하면 대답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지체 않고 이 두 권을 구독하여 곧 탐독하기 시작했다.

(1964. 03.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