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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장면기념사업회

[기사] [특별기획] 신앙인 장면(張勉)을 말한다

[특별기획] 신앙인 장면(張勉)을 말한다

조국에 ‘복음화·민주화’의 빛을 비추다

자유민주주의 신봉한 한국교회 대표적 평신도 지도자
투철한 신앙심으로 교회의 부름과 시대적 요청에 응답
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인 1호…정회원 자격으로 선종

1966년 6월 12일, 서울운동장은 십만 조객의 오열로 가득 찼다. 고 운석(雲石) 장면 박사와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별을 고하는 영결식이었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 그러나 장면의 모습은 이 시간 더욱 빛을 발했다. 관 속에 누운 그의 모습은 온전히 수도자였다.
장면은 성프란치스코회 제1회 수도자로서 수도복을 갖춰 입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프란치스코회 세계 총장의 허락에 의해 평신도임에도 불구하고 제1회 회원이 된 특전을 누린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례적인 이 특전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프란치스칸의 영성을 그 누구보다 충실히 살아온 결과였다.
교육자이자 문화·종교운동가, 외교관이자 정치가, 또한 문필가이자 교회사가라는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녔지만, 그의 일생을 가장 빛낸 수식어는 성실한 '하느님의 자녀'이자 '가톨릭 지도자'였다.
투철한 수덕생활
장면은 세속적 지위가 어떠한 모습으로 변하든 관계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수덕생활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재속 프란치스코회 입회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의 면면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장면은 재속 프란치스코 국제형제회(성프란치스코회 제3회) 첫 한국인 회원이었다. 미국 유학중이던 1921년, 장면은 재속회원이 됐다. 이후 동생 장발을 비롯해 가족과 지인들을 차례로 입회시키고 귀국 후에는 재속회 서울형제회 발족에까지 나섰다. 서울 형제회 초대회장에 이어 1961년에는 재속회 한국연합회 초대 회장으로도 선출된 바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장면의 삶은 무엇보다 순교자적 영성과 수도자적 복음 삼덕의 실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수도 삼덕 중 '청빈의 덕'은 정치인이 된 후에도 부정부패를 엄격히 근절해나가는데 밑거름이 됐다. 삶의 단 한순간에도 '정결의 덕'을 어기지 않고 살며 자녀들에게도 그러한 행동을 굳건히 가르쳤다. 또한 그는 '순명의 덕'으로 교회 일에 헌신하는 생을 보냈다.
소명에 충실한 가톨릭정치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면모는 장면이 교육자로 외교관으로 또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시기에도 유감없이 드러났다.
장면의 인생에서 가장 큰 화두는 조국의 복음화를 통한 독립정신 고취와 자유민주주의 확립이었다.
장면은 이미 고등교육기관인 수원 농림학교 재학 중 교리 연구와 교회사 연찬에 정진할 뜻을 세우고 유학을 결심한다. 특히 유학을 준비하며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 교사로 재직 중일 때에는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한 신학생들을 퇴교 조치하는 암울한 상황에 맞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일깨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독립투사들의 진정한 지도자는 오직 한 분이 계셔. 천주님이야. 맨주먹으로는 왜놈들의 총칼을 당해내지 못하지만 신앙심과 천주님 앞에서는 무기란 무력한 것이지. 모든 동포가 천주님을 믿도록 우리가 노력해야겠는데…."
장면은 민족의 복음화가 독립에 기여하는 길임을 굳게 믿으며, 이를 위해 신학적 지식을 갖추고자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이 유학생활을 통해 장면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배우고 맛보며, 언행을 종교적 양심에 비추어보고 행동하는 습성을 길렀다.
해방은 교육과 종교운동을 통해 민족의 미래에 투자해온 그의 역량을 외교와 정치 일선으로 돌리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당시 장면은 민족의 최대 당면 과제를 자주자립과 문화·교육 정책의 강화로 판단했고, 또한 정치에 적극 참여해주길 원하는 교회의 권고에 따라 1946년 2월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 의원으로, 같은 해 12월에는 입법의원 의원으로 활동한다.
"가톨릭교도는 그 국민의 번영을 위해 저마다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가족 또는 그가 접하는 집단과 단체를 그리스도교화 함으로써 … 이 감화는 더 넓게 그 나라의 온 사회적 및 정치 생활에까지 미칠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제헌국회 의원이 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정치 이념과 제도의 보편화 작업에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었다. 제1·2공화국 시기에는 국무총리와 부통령 등을 역임하며 부정부패 불식과 반독재 투쟁 등에 나섰다. 이러한 노력 뒤에는 민주주의 정신의 보편화와 민주세력 성장에 크게 공헌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종교 및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민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생활의 민주적 발달을 도울 수 있는 … 그리스도교 원리를 따라 깊은 지혜와 굽힐 줄 모르는 결심으로 장애와 싸워야 한다. 정당에서 지도하는 자리를 차지하는 그리스도교도도 정당의 정책에 그리스도교 원리를 침투시키고 정부에게 그 실시를 촉구함으로써 나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1956년 9월에는 자유당 정권의 암살 기도로 총격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면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형선고를 받은 저격수의 회개를 위해 대통령에게 감형을 요청한다.
아울러 장면은 신앙심에 입각해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뜻은 국가를 초월한 인류 평등을 지향하는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났고, 글로벌 리더로서의 면모 또한 엿보게 했다.
"세계는 나날이 좁아져 가고 모든 종족과 모든 국민 사이의 접촉은 더욱 친밀하게 되어간다.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일치와 참된 평등을 구하는 소망은 당연한 것이며 정당한 것이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형제라는 이 교회의 가르침은 피부의 색깔, 인종, 사회적 지위의 구별없이 인격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평등한 존엄을 각자에게 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닌 우리 형제, 특히 지식인에게 교회의 이 가르침을 열심히 또 절실하게 알려야 한다."
장면 신앙의 뿌리
그렇다면 그는 어떤 학문, 어떠한 종교적 수련 과정을 거쳤기에 투철한 신앙인으로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의 이러한 신앙은 모태에서부터 이어져왔다. 독실한 구교우 집안의 3남4녀 중 장남이었던 그는 부친 장기빈(레오)과 모친 황 루치아의 깊은 신심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신앙인으로서의 가치관을 키워왔다. 부친 장기빈은 근대 문물에 일찍 눈뜬 지식인으로 자녀들의 신앙교육은 물론 근대식 교육을 적극 지원했다. 덕분에 장면과 그의 형제자매들 모두가 뛰어난 재량과 신심을 갖추고 교회 봉사에 나서게 된 것도 집안의 특징이다. 남동생인 장발(루도비코, 1901~2001)은 한국 가톨릭미술의 개척자이자 한국 근대화단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인물. 여동생인 장정온(앙네다·1906~1950(?)) 수녀는 첫 한국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초대 원장을 역임한 이다. 미국에서 생활 중인 장극 박사(바오로·1913~)는 항공 유체공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유명하다.
슬하의 자녀들도 모두 뛰어난 지식인, 종교인으로 성장했다. 그중 삼남은 현재 춘천교구장인 장익(요한) 주교다. 삼녀인 장의숙(분다)은 노틀담 수녀회에 입회, 미국에서 활동 중이다.
더욱이 장면은 평신도사도직 실현에 있어서도 일찍부터 선구자적 역할을 펼쳐왔다. 유학 후에는 평양교구 업무에 헌신했으며, '영한교회용어집'과 '교부들의 신앙' 등의 번역과 '구도자의 길', '조선천주공교회 약사' 등의 저서 출간에도 힘썼다.
이에 앞서 1925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조선순교복자 79위 시복식에 평신도 대표로 참가하며 순교 신심을 더욱 확고히 한다.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그의 마음은 '조선천주공교회 약사' 저술을 통해 한껏 드러난다.
해방 직후 장면이 정치에 입문한 것도 신자로서의 소명을 실현하기 위한 큰 결단이었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의 길을 택한 보편교회 흐름에 따라, 조국의 복음화를 통해 이 땅의 공산화를 막고 민주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비록 자유민주주의의 뜻을 한껏 펼치진 못했지만, 그의 생은 한 알의 밀알이 죽어 열매를 맺어나가는 삶에 맞갖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었다.

사진설명
▲ 미국 맨해튼 대학 유학시절(1921~25) 동생들과 함께. 왼쪽부터 장발, 장면, 장 앙네다(정온·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초대 원장) 수녀, 처조카 김 말가레다 수녀.
▲ 1948년 맨해튼대학 토마스 총장으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있는 장면 박사. 가운데는 스펠만 추기경.
▲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들과 함께 한 장면(원안).

주정아 기자 stella@catholictimes.org
[기사원문 보기]
[가톨릭신문  2009.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