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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장면기념사업회

[기사] [특별기획] 대한민국 승인과 장면(張勉)의 역할

[특별기획] 대한민국 승인과 장면(張勉)의 역할

공산진영 방해에도 열성·믿음으로 승부


회기(會期) 넘기며 설전 … 극적 승인 '쾌거'

유엔 승인 얻기 위해 유럽 교회 신자·지도자들 접촉
보편 교회 지원 얻어 20개국 대표로부터 지지 약속
찬성 48표·반대 6표 … 압도적 지지로 유엔 한국 승인
대통령 특사로 교황 예방해 보편교회와의 가교 역할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지니는 숱한 애환과 갖가지 논란들도 종국에는 이 물음에 가닿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대한민국 수립은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 역사에 있어서 분수령을 이룬 일대 사건이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대한민국 '승인'은 우리나라가 독립 국가로 발전하는데 단초가 된 역사적 전환점이다. 이 같은 전제가 있었기에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파병은 물론 전후 우방국들의 지원 등 우리나라의 존립과 발전에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국제사회와의 조우가 가능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정부 수립 당시 대한민국 수석대표로 유엔의 승인을 이끌어낸 장면 박사의 존재는 대한민국의 현재를 있게 한 초석이라 할만하다.
주교회의가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과 가톨릭교회의 역할'을 주제로 마련한 세미나를 계기로 지식인이자 정치가임에 앞서 투철한 신앙인이었던 장면 박사와 그의 삶의 뿌리였던 가톨릭교회의 역할을 돌아보는 것은 우리 민족사는 물론 교회사를 새롭게 세워나가는데 디딤돌을 더하는 일이다.
신앙인 장면이 맞닥뜨렸던 결단의 순간을 재구성해봄으로써 우리 민족과 함께 하시는 주님의 숨결을 되돌아본다.

■1920년 11월 : 하느님의 섭리, 오래 전부터 준비시키시다 - 미국 유학길에 오르다

'바라고 기다리던 도미(渡美)는 드디어 1920년에 실현되었다. 그 전해는 기미년 3·1 운동이 있던 터라 한인 학생의 도미 유학이란 좀처럼 여권관계로 바라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여러 날을 두고 각 방면으로 모책(謀策)한 결과 도미가 가능하게 되어 그 해 11월에 시애틀에 상륙하였다'(장면 '나의 학창시절 회고').

장면의 유학은 그를 통해 드러날 하느님의 섭리를 향한 본격적인 투신이며, 우리 민족에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주는 그리스도의 숨결에 자신의 호흡을 맞춰나가게 되는 최초의 결단이었다.
장면이 유학을 결행하게 된 것은 세속적인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제하에서 고통 받는 민족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천주교 신앙전파에 자신을 바칠 결심을 한 데서 비롯됐다. 당시 평안도지역 선교를 맡게 된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가 선교전략 차원에서 인재 양성을 필요로 했던 점도 중요한 배경이었음을 볼 때 그의 한걸음 한걸음은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이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장면이 유학길에 오를 즈음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유학생이 채 10명도 되지 않을 때였다. 유학 시절 습득한 영어 불어 능력과 대중연설 등의 과목을 통해 얻은 소통 능력은 앞으로 주님의 재목으로 쓰일 그의 자산이 됐다.

■1946∼48년 : 평신도 대표로 십자가를 지다

'해방 직후 민주 의원 때에도 또 제헌 국회 의원 선거를 앞두고, 유지 및 교우들과 교계를 대표하여 누구를 의원으로 보내느냐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긴 논란 없이 장박사가 적임자로 만장일치의 인정을 받았다. 정계에 그가 나간 것은 정치인 되기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교인을 대표해서 빈틈없이 일해 줄 적임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윤형중 신부 '다채로운 업적').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 교육과 종교운동을 통해 민족의 미래에 투신하기 시작한 장면은 해방 후 천주교를 대표하는 적임자로 꼽혀 미군정기인 1946년 2월 군정자문기관인 민주의원의 의원으로, 그 해 12월에는 입법의원 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듬해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제헌국회 의원이 됐다. 이러한 장면의 행보에는 해방 후 민족과 교회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새로운 국면에 천주교 신자들이 참여하기를 바란 당시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를 비롯한 교회의 권유가 큰 영향을 미쳤다.

■1948년 9월 9일 : 기적의 시작 - 유엔 총회 파견 대한민국 대표단 수석대표로

'우리 대표단을 이끌고 갈 사람은 장면이 될 공산이 가장 크오. 그는 유엔한위가 가장 쉽사리 동의해줄 인물이오. … 또한 그 사람은 정당인이 아니며 어딜 가나 가톨릭교회의 후원이 있을 것이고 그는 국회의원이오'(이승만 대통령이 정치고문 로버트 T. 올리버에게 보낸 서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우리나라는 주한미군 철수문제 등으로 장래가 불투명하던 시기였다. 특히 그 해 9월 3일 북한지역에서도 정부 수립이 선포돼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국제적 승인 획득 여부가 곧 국가 생존을 위한 최우선 과제로 부상했다. 이런 시기 정부 수립을 국제적으로 승인받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장면은 당대 찾아보기 힘든 외교통으로 건국외교와 관련된 입법안을 주도했다. 이런 점을 고려해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유엔 총회에 파견할 대한민국 대표단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이로써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발행한 제1호 외교관 여권을 지닌 외교관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기적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1948년 9월 9일 : 장도에 오르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어느 한 국가가 일방적으로 그 독립과 존재를 선포만 한다고 그대로 인정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 파리에서 개최되는 유엔 제3회 총회에 우리 정부의 국제 승인을 받기 위한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된 것이다'(장면 '한국민주주의 십년').

장면을 수석대표로 한 대표단은 9월 9일 김포공항을 출발해 장도에 올랐다. 미국 뉴욕을 경유해 다시 배편으로 총회가 열리는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것이 한국을 떠난 지 열하루만인 20일이었다. 장면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프랑스 외무성을 예방하는 등 본격적인 대한민국 승인 외교에 뛰어들었다.

■1948년 9월 21일∼12월 6일 : 갖은 어려움을 뚫고 대한민국을 알리다

총회가 열리는 파리에 도착했지만 발붙일 자리는 고사하고, '대한민국'은 거의 완전한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9월 21일 열린 제3차 유엔 총회 개회식도 일반 방청석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당시 소련이 중심이 된 사회주의 블록과 영연방은 대한민국의 승인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유엔 총회에서 한국 문제는 그해 5월 14일 건국을 선포한 이스라엘 문제보다 관심도가 떨어졌다. 또한 소련 대표 비신스키를 비롯한 공산진영의 고의적인 지연작전으로 대한민국 승인 문제는 상정을 기약하기 힘들었다.
이때부터 장면의 순교자적인 노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리에 머물면서 불철주야 신자들과 접촉하며 대한민국 승인을 위한 지지를 호소하고 다녔다. 총회를 앞두고는 후에 교황 요한 23세가 된 주불(駐佛) 교황대사를 찾아가 한국 문제를 애절하게 설득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그는 늘 기도의 힘을 믿었다. 기도 앞에서는 어떠한 난관도 돌파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한번은 성녀 소화 데레사가 찾던 가르멜 수도원을 찾아가 기도를 요청하기도 했다. 장면은 수녀원장(성녀 소화 데레사의 언니)에게 자신이 프랑스에 온 사명과 수녀원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간절한 사정을 전해 수녀원 전체가 한마음으로 한국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는 결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당시 교황 비오 12세는 후에 교황 바오로 6세가 된 교황청 국무장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 대주교와 프랑스 주재 교황청 대표인 론칼리 대주교(훗날 요한 23세 교황으로 즉위)에게 한국 대표를 적극 지원을 해줄 것을 명했다.
이런 교회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장면은 10월에 들어서면서 미국을 비롯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인 칠레 페루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20개 국 대표들로부터 한국 승인을 약속받았다. 특히 우연한 기회에 만난 오브라이언 부주교의 도움으로 유엔 총회 의장으로 한국 문제의 유엔 이관을 반대해온 호주 대표단을 설득해 한국 승인을 약속받는 쾌거를 이뤄내기도 했다.

■1948년 12월 6~8일 : 값진 승리를 향해

장면은 미국 대표단으로 총회에 참가하고 있던 주한 특사 무초에게 요청해 중화민국 대표가 12월 6일 한국 대표를 정치위원회에 초청하는 동의안을 제출하도록 했다. 설전 끝에 한국 대표 초청안이 가결되고 소련측이 제기한 북한측 초청안은 부결됐다. 이튿날 장면을 필두로 한 한국 대표단 9명은 정치위원회에 참석해 대한민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호소했다.

"본인은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한 바 있는 한국정부가 곧 본인이 대표하는 대한민국 정부임을 재확인하고 우리 정부를 이 자리에서 공식으로 승인하는 동시에 모든 회원국가들이 또한 개별적으로도 승인하도록 권장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12월 7일 장면의 연설).

뒤를 이은 인도 프랑스 버마 네덜란드 대표들의 지지연설로 8일 밤 10시가 넘도록 사회주의권과 오간 설전 끝에 41대 6, 기권 2표로 한국 독립승인안의 총회 상정이 가결됐다. 이 때 한국 대표단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이렇게 3개월에 걸친 외교전은 숨 가쁘게 전개되고 있었다.

■1948년 12월 11일∼12일 새벽 : '일을 이루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라'

대한민국 독립승인안은 총회 회기 마지막 날인 11일 최종채택의안으로 상정됐다. 하지만 동서 양진영은 소모적 논쟁만 벌이다 상정안 처리가 물 건너 갈 처지에 놓이게 됐다.
특히 마지막 날이 가까워오자 각국 대표들은 자국 이해와 관계가 깊은 의제가 끝나 한국 승인문제에는 관심이 없거나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 짐을 꾸리고 비행기편을 예약하는 등 귀국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장면은 발이 닳도록 그들을 찾아다니며 호소도 하고 붙잡고 늘어지기도 했다.
회기가 끝나도록 결정이 나지 않자 대한민국 승인 문제를 둘러싼 논의는 12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야간회의 때도 날은 춥고 배는 고픈데 새벽 2시까지 문에 지켜 서서 우리 편 제국 대표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애쓰던 일과 다음날 고단해 잠자는 각국 대표들을 찾아가 깨워서 오후 3시까지 회의에 참석하도록 사정사정하던 일이 생각나다'(장면 '한국의 은인').

■1948년 12월 12일 : 주님께서 이루시다

"드디어 날이 밝아온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늠하게 될 날이다. … 주님, 저희 민족을 어여삐 여기소서. 당신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나이다."
회기일을 넘기면서까지 갑론을박을 거듭하다 결론을 내지 못한 총회 참가국 대표들이 모두 숙소로 돌아간 12월 12일 새벽 3시, 장면은 하느님 앞에 조국의 미래를 간구하기 위해 잠도 잊은 채 성당을 찾았다.

'촛불이 켜진 성모상 앞에 경건히 무릎을 꿇고 기도의 세계에 몰입되었다. … 장박사는 거의 1시간 만에야 일어섰다. … 성당을 나왔을 때도 날은 아직 채 밝지 않았다. 나는 그냥 호텔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요 근처 아베마리아 성당이 있는데 거기 가서 미사에 참례합시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 12월 12일의 먼동이 터 온다. 9시에 개최되는 총회를 앞두고 다시 장박사가 명령을 내린다. "각국 대표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다시 찾아가 확인합시다. 최후의 승리를 확보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운명은 우리의 양어깨에 얹혀 있습니다. 자, 어서!"'(모윤숙 '완전한 신앙의 인간')

장면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12월 12월 새벽 2시20분 휴회했던 총회는 그날 오후 3시 속개됐다. 드디어 오후 5시15분 한국은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유엔의 승인을 얻었다. 이날 장면은 대한민국의 유엔 가입을 유엔 사무처장에게 신청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비로소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때 대한민국이 국제적으로 승인받기란 일종의 기적을 실현하는 노릇이었다. 그것을 무난히 해치운 것은 장박사의 성(誠)과 열(熱)과 믿음의 결과였다'(윤형중 신부 '다채로운 업적').

■1948년 12월 16일 :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지다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얻은 직후 장면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바티칸으로 향한다. 그는 12월 16일 교황을 예방하고 신생 대한민국에 대한 정신적 지원을 요청해 이를 약속받았다. 또한 교황에게 당시 주한 교황사절로 와있던 메리놀외방전교회 번 주교를 교황청 대표로 격상시켜줄 것으로 요청해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등 한국 교회와 보편교회를 잇는 다리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사진설명
▲장면 수석대표(앞줄 왼쪽) 등 제3차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 대표단들. 장대표는 파리에 머물면서 불철주야 신자들과 접촉하며 한국 승인을 위한 지지를 호소했다.
▲장면 대표가 작성한 유엔 총회 연설 원고.
▲유엔의 한국 정부 승인을 위한 표결에 앞서 각국 대표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장면 수석대표.
▲유엔의 한국 승인 직후 교황 비오 12세 예방차 바티칸궁을 공식 방문한 장면 박사(오른쪽에서 두번째) 일행. 장면은 교황과의 알현에서 신생 대한민국에 대한 정신적 지원을 요청해 이를 약속받았다.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 이후에도 장면 박사의 헌신은 계속됐다. 1950년 주미대사 시절 미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6·25 전쟁의 참상을 알리며 미국인들의 지원을 호소한 장면 박사(왼쪽 세번째).

서상덕 기자 sang@catholictimes.org
[기사원문 보기]
[가톨릭신문  2009.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