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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운석 장면 일대기 - 18. UN군의 6·25 전쟁 파병을 이끌어내다. 여기서는 운석 선생이 동서간 이데올로기 대립의 산물로서 한반도에서 벌어진 국제전인 6·25 전쟁을 맞아, 그의 정치적 신념인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활동을 전개했는지를, 선생이 남긴 “우리는 자유를 수호했다―피어린 6·25 동란의 회고”라는 부제가 달린 「화부서 겪은 6·25」(1954)와 「(한국의 은인) 덜레스 씨를 추억한다: 상 」(1959), 「6·25 동란과 워싱턴」(1965)이라는 3편의 6·25 전쟁 관계 기고문과 당신의 긴박한 현장을 담은 사진과 문서들을 곁들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운석 선생은 6·25 전쟁 발발 두 달전 미국 국방장관 애치슨의 아시아지역에 있어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애치슨라인’으로 야기된 국방상의 결함을 태평양 연안국가간의 집단안보체제인 ‘태.. 더보기
6·25 동란과 워싱턴 - 3. 미군 파병이 결정되기까지 미군 파병이 결정되기까지 유엔 안보 이사회에서 정전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던 6월 26일(미국 시간 25일) 하오에 주말 여행을 즐기던 트루먼 대통령은 예정을 앞당겨 급거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이날 맥아더 장군과 주한 미 고문단에서는 한국군에 실탄이 필요하니, 급히 공급해 달라는 요청이 국무성 당국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덜레스 씨로부터도 화급한 전문이 도착했다. 6·25가 터지기 사흘 전에 한국을 떠났던 덜레스 씨는 일본에 들러 경도 지방을 관광하다가 맥아더 장군의 급보를 받고 동경으로 돌아왔다. 맥아더 장군이 보낸 전용기로 동경에 비래(飛來)한 덜레스 씨는 한국 사태에 관해 맥아더 장군과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눴다. 평소 한국을 아끼고 뒷받침해 주던 맥아더 장군과 유사시에는 한국을 지원하겠다는 언질을 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