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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5. 거인 운석 신화의 나래를 접다.

 
 운석 선생은 평생 수첩에 일지를 기록하였다. 1966년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1966년도 수첩은 5월 24일 “성가병원에 입원”이라는 기록으로 끝을 맺고 있다. 선생은 그해 6월 4일 명륜동 자택으로 돌아와 향년 67세로 서거하셨다. 




《〈1966년도 수첩〉의〈5월 24일자 기록〉》

 문인 박종화는 선생의 묘비문을 다음 글로 장식했다.

 형산의 흰 옥은 그 빛깔이 본시 조촐하고 깨끗하거니와 부서질 때 그 소리 더 한층 맑고, 깨끗하고, 여수(麗水)의 황금은 그 광채 본디 찬란하거니 떨어질 때 그 음향이 더욱 쟁연하게 세상을 진동하는 법이다. 전 국무총리 운석 장면 요한 박사가 서기 1966년 6월 4일에 홀연 명륜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니 가족들의 슬픔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슬퍼했다. 공의 백옥 같은 몸가짐을 아까워하고, 공의 황금같이 빛난 업적을 돌이켜 생각했던 것이다. 정부와 국회는 공의 장의(葬儀)를 국민장(國民葬)으로 받들 것을 결정하고, 6월 12일 상오 11시 서울 운동장에서 십만 조객의 오열하는 울음 속에 영결식을 거행한 후, 포천 천보산에 안장하니 향년이 68세다.

 공의 본관은 인동(仁同), 부친은 구한국(舊韓國) 부산 세관장 장기빈씨요 모친은 장수(長水) 황씨 황 누시아 여사다. 서기 1899년 8월 28일 서울 적선동에서 출생하니 공은 장자다. 아우 발(勃)과 극(勀)이 있다. 1916년 5월 20일 경주 김상집(金尙集)씨의 장녀 옥윤(玉允)과 결혼하여 이학박사 진(震), 건(建), 익(益), 순(純), 흥(興)의 5남과 의숙(義淑),명자(明子) 두 딸을 두었다. 공은 소년 때 큰 뜻을 품고, 1917년에는 수원 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곧 도미하여 뉴욕 맨해튼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나라에 돌아와서는 인재 양성이 큰 임무라 생각하고, 힘을 후생(後生) 교육에 기울였다. 나라가 광복되자, 공(公)은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 입법의원(立法議院) 의원, 제헌국회(制憲國會) 의원에 선출되어 건국 대업에 참획(參劃)하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1948년 12월 파리에서 개최된 제 3차 유엔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하여 공산진영의 맹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대한민국 승인을 얻어 찬란한 공적을 거두었다.

 1949년 1월에는 초대 주미전권대사가 되어, 건국 초기 국제외교의 기초를 닦았고, 1950년 6․25 남침을 당하자, 불면(不眠) 불휴(不休) 동분서주(東奔西走) 기민과감(機敏果敢) 외교활동을 전개하여, 유엔군의 급속한 출동을 얻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던 조국의 위기를 모면한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불멸의 금자탑을 세운 것이라 하겠다.

 공은 다시 1951년 가열한 전쟁 속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난마와 같이 어지러운 국정을 수습하여 전재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52년에 한 때 야인이 된 공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떨어지고, 일당독재가 형성되거 가는 것을 앉아서만 볼 수 없게 되었다.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 박사 등 동지와 함께 민주당을 창건하여 국민의 열광적 지지를 받아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슬프다. 1960년에 3․15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공은 국민의 선두에 서서 항거 분투하였고, 4․19혁명 후에는 7월 29일 총선거를 거행하여 내각 책임제 국무총리로 민국(民國)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공은 민주정치를 수립하고,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여 불철주야 심혈을 경주하던 도중 뜻밖인 5․16사태로 큰 경륜을 펴지 못한 채 정치에서 물러나, 두문불출 민족의 번영을 위하여 옥 같은 마음으로 기도와 신앙에 살다가 병환으로 장서(長逝)하니, 깨끗한 교육자요, 근엄한 종교인이요, 불굴의 정치가의 생애는 천주(天主)의 부름을 받아 하늘 높이 흰 구름을 탔던 것이다.

 공은 1921년 8월 28일 성 프란치스코 제 삼회에 입회하여 1922년 9월 24일 회원명 프란치스코가 되고, 1925년 7월 한국 천주교 청년 대표로 로마에서 있었던 한국 순교자 시복식 참열(參列), 교황 알현, 1963년 9월 1일 교황청 훈장을 수령하였고, 1963년 9월 19일 한국 프란치스코 제삼회 총회장에 피선되고, 1966년 4월 16일 프란치스코 제일 회원 특전을 수령하다.




《정원을 돌보는 만년의 운석 선생》



《프란치스코 제삼회 회원들과 함께》




《은퇴 후 작성한 가톨릭 교리 강연록》




《운석 선생을 떠나 보내던 날의 모습들》



《운석 장면 선생 탄신 백주년 기념 미사에 참석해 선생을 기리는 김대중 대통령》

[다음은 김대중 현 대통령의 운석 선생에 대한 회고. “하루는 장박사가 ‘제게 이 자리[2공화국 총리]에 오래 있는 것보다는 여야간 정권교체가 한 번 되어야 이 나라가 진정한 민주주의가 온다’는 이야기를 아주 진지하게 했습니다. 그 말씀에 저는 ‘참, 이 어른에 대해 사람들이 약하다고 그러는데 또 약한 말씀을 한다.’ 그런 생각밖에 못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겪고 나서야 저는 그 말씀이 바로 민주주의 요체였다는 사실을 아주 깊이 깨닫게 되었고 정말 그 훌륭한 민주정신에 대해서 새삼스레 감복한 기억이 있습니다.” 즉, 운석 선생이 몸소 실천하고 보여주었던 민주주의 실현에의 꿈은 김대통령과 같은 민주화 추진세력들이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장기적․지속적으로 그들의 일생을 통해 영향을 미친 “희망의 기억”이었음에 틀림없다.]



 거인 운석 선생은 신화의 나래를 접었다. 그러나 시민의 자각에 기반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이라는 그의 이상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달과정에서 항상 꺼지지 않고 빛을 발하며 좌표로서 기능한 등대였다. 운석 선생은 말한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총리나 각료들의 헌신적인 노력만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뼈에 새겼다. 아무래도 전국민이 합심해서 이끌어야 하는 하나의 수레와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협력할 때 수레바퀴는 잘 구른다”라고. 이 경구는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아직도 유효한 처방이다.

 운석 선생이 우리에게 맛보여준 자유민주주의와 자율에 기반을 둔 시민사회의 경험은 어둡고 긴 군사독재의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한국민주주의 운동이 그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우리 모두가 공유한 희망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