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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2. 부통령 시절 : 민주주의 수회의 정신적 지주로 우뚝 서다.(3)


3) 신 정책의 산실로서의 부통령 공관

 부통령 시절 운석 선생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를 자처하며 대안 없는 비판과 투쟁을 한 것이 아니었다. 4년간의 부통령 생활 동안 선생은 부단히 정책 대안을 개발해 이를 제안함으로서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때를 예비하고 있었다. 즉, 2공화국 총리로 집권했을 당시 표방․실천된 “자유민주주의와 경제 제일주의”의 정책, 구체적으로 다원화된 시민사회의 확립, 효율적 관료제도의 정착, 민간 주도형 경제건설, 국제사회와의 교류 확대 등은 선생의 정치입문 이래 지속적으로 개발․확충된 정책 구상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제 방면에 걸친 후진성 극복을 위해 선생이 제안한 정책 대안들은 선생이 남긴 , 「부통령 취임사」(1956), 「부통령 취임 후 UP통신 기자회견」(1956), 「민족갱생의 길―청년과 더불어」(1956), 「부통령 광복절기념 연설」(1957), 「민주당부통령후보 지방유세 1(대구)」(1960), 「민주당부통령후보 지방유세 2(부산)―나의 정치이념 “자유”―」(1960) 등의 연설문과 기고문 등에서 추출할 수 있다.

먼저 부통령 당선 직후인 1956년 6월 6일에 발표한 「부통령당선에 감격하여 나의 소신을 피력한다」라는 글에서 선생은 “경찰의 전횡”과 연속된 “경제적 불안”이 민중의 자유정신을 짓밟고, 자포자기의 타성으로 몰아넣음으로서 민주주의 성장을 방해했다고 전제하고 부통령으로서 자신의 역할이 “서정(抒情)의 혁신을 위하여 시시로 대통령께 국민들이 원하는 정책을 제안”하는데 있음을 천명하였다.



《부통령 당선 직후 패기만만한 운석 선생》

[부통령의 소임은 국민을 위한 비판적 정책 대안 제시에 있음을 천명하다. 선생이 말하는 정책 제언의 방향을 들어보자. “부통령이 대통령께 정책 진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반대당에서 나온 부통령’으로서 나의 제언은 왕왕 자극적인 것이 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국민 제위의 끊임없는 편달을 앙망하는 바이며, 그럼으로써 우리의 정치는 진전하고 향상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대통령과의 대립을 일부러 조성하고 정부 내에서 견제 역할에만 치중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누차 언명한 바이지만 나는 이 대통령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나는 대통령에게 가능한 한 협조를 아끼지 않을 것이며 정부를 화목하게 이끌고 가기에 힘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방침이 국민들의 열망을 대변하는 데 지장을 초래하는 일은 없을 줄 안다.”]

 

 그러면 선생은 어떠한 정책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자. 먼저 선생은 1956년 8월 15일에 공표한 「부통령취임사」에서 “민주정치의 발전과 기본민권의 수호”를 위한 구체적 실천책으로 “불안으로부터 해방”과 “궁핍에서의 해방”을 강조하였고, 취임 하루 뒤 UP 통신기자와 가진 단독회견에서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천명하였으며, 다시 이틀 뒤에 중앙일보와 가진 회견에서 “우리는 인접국인 일본과의 정상적인 대외관계는 시급한 문제이다. 나도 이 대통령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일본이 구보다(久保田) 망언을 취소할 것과 한국내의 재산권을 포기할 것을 중요 골자로 하는 선행조건에 변함이 없으나 국제관계란 어디까지나 이성에 입각한 외교관계이니 만치 과거의 민족적 감정을 일소하고 선린의 우의에 입각하여 국민여론을 통한 대일 우호관계의 촉진을 이룩토록 하여야 될 것이다”라고 하여 이를 재확인 한 바 있다. 선생이 대일관계의 정상화를 촉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UP 통신과의 회견에서 선생은 “한국인들이 일본 혹은 공산주의에 대하여서 보다도 ‘불안과 빈곤이라는 두 개의 위기’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고, 이어 “이 나라의 경제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한국통일에 대한 제1보가 되어야 한다”고 부언했으며,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국가자원을 동원하고 우호국가들의 경제원조를 유효하게 이용함으로써 가능한 한 조속한 시일내에 특권계급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즉, 그는 “불안” 즉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민주주의의 실현과 이를 담보할 경제적 번영을 위해 외국 경제원조를 적절히 이용해 국민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며,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도 경제 성장을 위한 대일 청구권 자금의 활용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제 개발 우선론과 대일관계 정상화론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극단적 반공과 반일정책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자 합리적인 정책 대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취임 초에 피력된 정책은 민권 수호, 민주주의 실현, 경제성장, 대일관계 정상화를 포함한 국제교류 강화 등이었으며, 이러한 정책은 「민족갱생의 길―청년과 더불어」(1956)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이 글에서 선생은 정치란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 하에 국민전체 또는 각개국민의 정치적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여 줌으로써, 즉 “정부가 일반국민에게 정치경제를 통하여 자유로이 성장할 수 있는 최선의 환경을 베풀어줌으로써 국민의 자라나는 힘을 북돋아 주는” 데 그 요체가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현실이 이에 반한 원인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자연발생적인 밑으로부터의 것이 아니라 외래적이요 접붙이 가지와 같은 상부조직에 불과하기 때문에 강력한 민의가 아직 성장하지 못하고 따라서 집권자 만능을 제재할 힘의 존재를 찾기 어려운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이 지체된 근본적 원인은 “제도의 결함”이나 “국정을 담당한 인물의 결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선거민 자신들의 역량문제에 귀착되는 것이며 민주주의의 후진성”에, 실질적으로는 “대의정치가(代議政治家, 국회의원)들의 민주정신의 불철저 내지는 실천력의 결핍”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선생은 한국이 그 후진성을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거민과 대의사(代議士)”들의 의식 개혁과 “개별적․분화적인 시민의 의사와 이익을 공공의 일반의사 내지 이익으로 통합해 대표”하는 정당과 “노동조합 협동조합 혹은 제종(諸種) 단체 연합” 등 “사회대중운동”의 건전한 발전과 같은 제도적 장치의 기능 발휘 및 민주주의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생산력을 증강하여 근로하는 국민대중에게 공정하게 분배됨으로써 국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는 경제적 안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1960년 7․29 총선 당시의 유세모습

[운석선생은 민족의 다시 태어남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을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참말로 민주정치―대의정치의 제도를 확립하며 그 운영을 위해서는 궁국적으로 선거민과 대의사들의 개혁을 행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민주주의 경제는 경제활동이 유력한 동기로서 또는 경제발전의 유력한 추진력으로서 개인의 창의, 재능, 식견, 경험 등을 존중하는 것이지 결코 경제계를 무정부상태로 방치하여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민주주의의 이념이 자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등과 우애에 있다는 것을 상기함에 있어서랴…어쨌든 민주정치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배고파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백성을 그대로 두고는 가능성이 없다. 생산력을 증강하여 근로하는 국민대중에게 공정하게 분배됨으로써 국민의 생활이 안정되며 그 수준이 향상되는 것이 “데모크라시”의 전제조건이다…정당은 민주적인 사회를 구성하는 데에 필연적인 산물이다…개별적 분화적인 시민의 의사를 통합하여 나가는 과제를 담당하고 나선 것이 정당인 것이다 …정당의 건전한 발전이 민주정치 구현의 불가결한 조건일진데 국민자신의 자연발생적인 밑으로부터의 자유와 창조의 업으로서 정당이 육성되어 나가기를 소원하는 바이다. 갱생하는 민족의 새로운 질서와 공평한 복지사회의 건설은 결코 개개인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여기에는 정당을 비롯하여 노동조합, 협동조합 혹은 제종단체 연합 등 팽배하게 일어나는 사회대중운동에 의하여 이룩하는 것이다. 실로 새로운 민주조국의 건설은 아닌 조국의 흥망은 사회집단운동의 건전한 발전과 진행에 달려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선생에게 있어 민주정치의 진정한 가치는 “지도자의 질이나 정책의 내용에 대한 가치보다도 오히려 만인이 협력하여 그러한 가치를 찾는 그 과정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선생에게 있어 민주주의란 도달해야 할 목표이기 이전에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 속에서 “국민 모두가 성장하는 교육적 가치”가 더 중요한 것이었으며, 또한 민주사회란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교류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었다. 다음은 선생의 말. “그 ‘과정’ 속에서 모든 인간의 인격의 향상과 발전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민주정치는 그 현실적 제도의 과정 속에서 생활 속에서 교육적인 가치를 낳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야 날로 선한 정치 옳은 정치라고 할 것이다. 민주정치는 국민이 평등한 입장에서 자유로이 논쟁하며 비판하며 결국에는 투표와 다수결로 정치의 의사를 결정하는 제도이기는 하나 그 최종은 사해동포애(四海同胞愛)의 이상향이며 영원한 청년들의 세상과 연결되는 것이다.”
 운석 선생은 1957년 8월 15일에 행한 「부통령 광복절기념 연설」에서도 “선거의 공명성 확립, 사법권의 독립, 공무원의 처우개선” 등을 통한 민주정치의 확립 및 “농촌과 도시의 균등발전, 중소공업의 육성”을 통한 경제성장 방안 같은 정책 대안을 제시한 바 있으며, 「민주당부통령후보 지방유세 1(대구)」(1960), 「민주당부통령후보 지방유세 2(부산)―나의 정치이념 “자유”―」(1960) 등을 통해서도 인권 보호와 정치적 자유 보장 및 경제성장과 공정 배분 등의 정책을 제시한 바 있었다.
 다음과 같은 선생의「제 2공화국 경축사」는 제 2공화국이 추진한 제 정책들은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라, 정계 입문 이후 특히 부통령 시절 선생이 꾸준히 개발․제기했던 정책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정치적 부면에 있어서 모든 독재적 요소를 제거하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포함한 제반 기본 인권을 확보 확대하며, 사법권의 독립과 권위를 신장하여 공명 선거의 확보와 권력의 정치적 중립과 지방 자치 제도의 강화 등을 기도함에 있어서 우리는 이미 성실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민주당 내각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여야 한다는 것과, 정부는 일당 일파의 것이 아니고 오직 국민의 복리에 봉사하는 국민의 정부임을 명심하여 국사를 처리할 것을 이 자리에서 다시금 엄숙히 선언하는 바입니다. 다음으로 민족의 당면한 과제가 산업의 현대화와 소득의 가증(加增)적 증가에 있음을 재확인하고, 정부의 시정 목표로서 경제 제일주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주로 국민의 경제적 활동의 기회 균등을 보장하는 환경 개선에 노력을 집중하고, 국민의 최대한의 창발력(創發力)과 기업적 모험심을 발휘하여 계획성 있는 자유 기업체의 장점을 살려서 하루속히 국민 경제의 비약적 성장을 가져올 수 있는 인화점에 도달할 것을 기도함이 새로운 공화 정체하의 당면한 최대 과제임을 다시금 강조하는 바이며, 그런 견고한 터전 위에서 점차적으로 복리 사회 건설의 여러 가지 시책을 준비할 것입니다. 국토의 통일을 바라는 민족적 염원은 신생 공화 정부의 국방과 외교 정책의 기본이 될 것입니다. 민주 진영의 여러 나라와의 우의를 더욱 두텁게 하는 한편, 아시아, 아프리카의 모든 신생 독립국가는 물론이요, 이른바 중립국들에까지 과감한 외교의 폭을 넓혀, 우리 주권의 소재와 민주 국가로서 우방과 공존 공영하려는 우리 민족의 열의를 널리 선양하는 것이 신정부의 외교의 대본이 될 것입니다. 우리와 인접하여 있는 일본에 대하여서는 36년에 걸친 그들의 침략의 쓰라린 기억이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우리의 국민 감정을 이해하면서 재일 교포 문제, 어족 보호 문제, 재산권 문제 등 과거 오랜 시일을 두고 쉽사리 타협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문제를 양국 상호간의 이익에 부응하도록 해결하려는 성의를 호혜적으로 표시하기 시작하였고, 일본측으로서도 한국의 유엔 가입을 꾸준히 지지함으로써 대한 민국 정부의 주권을 인정하여 왔습니다."

 이상 살펴 본 바와 같이, 운석 선생은 부통령 재임기간 현실의 독재정치와 관료 지배하에 왜곡된 경제구조 및 고립적 대외관계를 초래하는 극단의 반공․반일 정책 등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인권의 옹호, 다원화된 민주사회 건설, 민간 위주의 경제건설과 공정한 배분구조의 정착, 대일관계의 정상화 등에 관한 제 정책을 제안한 바 있었다. 선생이 부통령 시절 입안․제기한 이러한 정책들은 제헌국회 의원 등 정계입문 당초부터 선생이 피력한 바 있던 정책들이 보다 발전된 형태로 제기된 것이었으며, 이처럼 무르익은 선생의 정치적 이상들은 제 2공화국이 발족 이후 실천에 옮겨지게 된 것이었다. 요컨대 제 2공화국 당시 천명․실천된 제 정책은 하루아침에 급조된 장미빛 청사진이 아니었다. 그것은 운석 선생과 민주당이 이 땅에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이 처한 현실에 부단히 투영해 보았던 정책 대안들의 종합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