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자취

운석 시대 7대 사건 - Ⅱ. 해공 · 유석 서거

 운석 장면 박사 생존 시에는 하고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 많은 사건들 가운데서도 장 박사가 몸소 체험했던 가장 벅찬 정치적인 사건들을 사건별로 간추려 드라마틱하게 엮어 본다.

 픽션 냄새를 풍긴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사실 위주임은 물론이다. 세상에 잘못 알려진 허위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데 기여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생생한 역사적인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정치 비화를 추적하면서 해명키로 한다.

 이 운석 시대의 대사건은 원칙적으로 사건 발생의 순위이며, 그 내용에 대한 책임은 운석 기념 출판회에 있음을 밝혀 둔다.

1


  한강은 역사와 더불어 흐르고 있다. 거기에 비명에 가까운 함성이 들려온다.

  "못살겠다. 갈아 보자." 격렬한 목소리에 박수와 함성이 터진다. 3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더 이상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한강 백사장에 모인 인파는 그대로 자발적인 민의의 충동이었다. 얼마나 시달렸던가? 자유당 독재하에서 정치가 얼마만한 암흑 속에서 자라 왔고 민권이 얼마나 무참히 짓밟혔던가?

  국민은 염원했다. 그래서 55년에 대야당인 민주당이 창당된 것이다. 그리고 곧 대통령 후보에는 해공 신익희 씨를, 부통령 후보에는 운석 장면 박사를 공천하여 제3대 정 부통령 선거에 임한 것이다.

  민주당은 곧 "못살겠다. 갈아 보자"는 선거 표어를 내세웠다.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리던 말이냐! 얼마나 국민의 폐부를 깊숙히 찌른 구호냐! (당시 민주당 선전 부장 조재천 씨의 창안에 의한 선거 슬로건이라 함.)

  민의는 민주당의 대열에 호응했다. 그리하여 56년 5월 3일 30만의 서울 시민이 집을 비우고, 직장을 비우고, 거리를 비우고 서울 장안이 텅 비다시피 하여 한강 백사장으로 모여 그들이 다음에 뽑을 정 부통령 입후보자에게 뜨거운 호응과 박수를 보냈던 것이다.

  해공과 운석은 그 민의를 보고 가슴이 벅찼다. 이번 선거의 승리는 결과를 보나마나 당선이 기정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은 분명하다.

  정견 발표를 끝내고 시내로 들어오는데 그때도 수많은 인파들이 한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운석 이것 좀 보시오. 이것이 민심이지, 민심이란 게 어디 따로 있소."

  해공은 벅찬 가슴을 억누릴 길이 없어 옆에 앉은 러닝 메이트에게 말했다. 두 사람이 시선을 주는 거의 모든 요소요소에는 그들이 소속한 민주당이 내세운 "못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표어가 나붙어 있었다.
 




  
 한강 백사장의 감격된 흥분도 가시기 전인 5월 4일 밤 10시, 그들은 조재천 선전 부장 등 소수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친지들과 당원 및 수많은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호남선 제3열차의 2등 침대차에 몸을 실었다.


  해공 선생은 연일 계속된 강연, 면접, 유세 등 몹시 다망한 일과에 시달려 극도로 피곤해진 몸이라 침대에 눕자마자 곧 곤한 잠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그들은 이튿날인 5월 5일 전주와 이리에서 각각 두 차례의 유세를 하기로 일정을 짜놓고 있었다.

  그 무렵 해공 선생은 선거를 앞두고 이미 술과 담배를 끊은 터였다. 이 나라의 야당 지도자를 태운 열차는 남으로 남으로 달렸다. 4일을 보내고 5일의 새벽이 차창 틈으로 서늘하게 스며들었다. 4시 30분경, 열차가 충남 강경을 통과하고 있었다. 하단 침대에서 해공 선생이 잠을 깼다.

  "창현아! 뒤지 어디 있느냐?"

  선생은 비서를 불렀다. 그리고 변소를 다녀왔다. 그 사이에 잠을 깬 장 박사와 조재천 씨와도 서로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장 박사가 세수하려고 열차 내 화장실 쪽에 가 보니 물이 나오지 않았다.

  "물이 안 나오는군요."

  "뭐 급한 일도 아닌데 아침 세수는 전주에 가서 합시다."

  해공 선생은 걸터앉은 채 그렇게 대답했다. 열차는 이리를 향해 그냥 달려가고 있었다. 전북 함열을 지나 이리를 눈앞에 두었다. 이때 해공 선생은 옷깃을 바로잡으려는 듯이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은 옷깃에 머물지 않았다. 보스턴 백에 엎어져 그의 목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힘없이 상체를 앞으로 꺾었다.

  "해공, 왜 이러십니까?"

  장 박사가 급히 달려왔다.

  "왜 그러십니까?"

  조재천 씨가 해공 선생을 잡았다. 그러나 해공 선생의 입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손이 차갑다. 당황한 일행들은 열차 내를 뛰어다니며 의사를 찾았다. 하늘도 무정한가, 그 많은 승객들 가운데 있을 법한 의사가 한 사람도 없다니…. 겨우 한의 한 사람이 와서 그저 급체인 것 같다고만 하고 돌아갔다. 이리가 가까워 온다. 열차는 거기에나 가야 설 수 있다. 1분 1초가 시급한 처지에 모두가 애를 태웠다. 





  "해공 선생님!"

  수행원들은 선생을 부르기에 이미 얼이 빠져 있었다. 이리역에 마중 나온 지방 당원들에 업혀서 부랴부랴 역전의 호남 병원으로 모셨다. 해공 선생을 맞은 의사의 안색은 벌써 침착성을 잃었다. 우선 강심제를 놓고 다른 병원의 의사도 초치했다. 수행원과 지방 당원들은 그들 의사에 의한 기적을 바랐다.

  "심장 마비인 것 같습니다…."

  태양은 떴는가? 그것은 동편에 솟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야는 암흑으로 변하고 말았다. 선생의 혼은 이미 선생의 육체에서 떠나 저 멀리 있었다. 불과 이틀 전 한강 백사장에 모인 30만 군중을 향해 사자후를 토하던 선생은 한갓 유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태극기에 덮였다.

  5일 그날 오후, 하늘은 땅위에 서글픈 비를 뿌려 주고 있었다. 퍼붓는 빗소리를 장송곡으로 대신하여 태극기에 싸인 유해는 이리역을 일반 열차로 출발하여 조치원에서 특별 기동차로 옮겨졌다. 어제는 숨쉬며 내려가던 철길을 오늘은 끊긴 숨, 태극기에 덮여 올라왔다.

  "못살겠다. 갈아 보자!"

  심금을 깊이 찌르던 이 구호를 이제 어쩌란 말인가! 백사장으로 모였던 인파가 서울역 앞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오매불망 목놓아 울어도 선생은 돌아올 길이 없다.

  이날 오후 4시 10분, 유해는 말없이 서울역에 도착했다. 독재의 아성을 능히 무너뜨릴 수 있던 선생은 말없이 돌아왔다. 비참과 절망과 울분을 억누르지 못한 시민들은 눈물 속에 만세를 부르며 앰뷸런스를 호송했다.

  "살인적인 독재는 물러가라!"

  중앙청 앞에서 만세를 부르던 군중들은 진명 여고 입구에 도달하여 흥분하기 시작했다. 앰뷸런스를 경무대로 몰고 가려 했다. 여기에서 경찰과 혈투극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총알이 날아왔다. 돌이 날아갔다. 그러나 군중들은 비분과 한탄 속에 흩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국민의 애틋한 심정은 민주당 중앙 본부를 향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선생께서 그렇게 급서하시니 말이 되느냐! 정말 자연사냐? 아니면 모측의 암살이냐?

  민주당은 독재 정권과 싸워 왔지만 거짓되이 국민을 선동하지 않았다. 만약 그때 정략적으로 "암살의 혐의가 있다. 당에서는 조사 중이다" 이 한마디의 성명을 발표했다면 이 나라 역사의 판도는 퍽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의 확률이 크고도 남음이 있었다.

  국민은 선생을 추모하기를 잊지 않았다. 10일 후에 거행된 총선거 중 서울에서 이 박사가 불과 20만 5천을 얻은 반면에 선생의 추모표는 무려 28만 4천여 표나 나왔다. 그리고 짝을 잃은 장면 박사에게는 총 73퍼센트인 45만여 표를 던져 부통령의 자리에 앉혔다.

  해공 선생의 장례는 선거가 끝난 5월 23일 국민장으로 치렀다. 





  "나는 입원할 생각은 없으며,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선거 유세에서 한 시간 반 정도는 연설할 자신이 있다. 장에 이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나는 입원할 생각은 없으며, 수술 진단 운운은 모르는 일이며 의사로부터 통고받은 바도 없다."

  1960년 1월 19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유석 조병옥 박사는 기자 회견에서 그렇게 잘라 말했다. 그러나 1월 22일,

  "조 박사는 위장에 관한 X선 시현에 의하여 개복 수술을 즉시 해야 한다"고 주치의는 진단 결과를 유석에게 알렸다.

  민주당으로서는 두 번째 맞는 정 부통령 선거다. 그리고 또한 국민들은 모든 기대를 그들에게 걸었다. 자유 민주주의가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 이 판국에 조 박사의 병세가 위독하다니. 불과 4년 전 해공 선생을 잃은 슬픔이 북받치기에 앞서 왠지 모르게 걱정이 되었다. 이번에 또 장 박사가 러닝 메이트를 잃을 리는 만무다. 그러나 인간들이기에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나 보다. 조 박사는 미국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낫는 대로 지체없이 돌아오리다."

  1월 29일 하오 1시 30분, 3 15 선거를 앞둔 조 박사는 김포 공항을 떠나며 그런 말을 남겼다.

  1월 30일의 월터 리드 미 육군 병원의 수술 결과가 쾌조를 보여 2월 22일경에는 퇴원, 그리하여 월말경에는 귀국하리란 외신이 전해져 와 국민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2월 15일 유쾌한 기분으로 조반을 마치고 난 조 박사는 침대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목이 앞으로 숙여진 듯하여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어인 일인가! 그때 조 박사는 영영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으니….

  심장 마비로 급서했다는 외신 보도에 국민들은 깜짝 놀랐다. 의혹을 품어 보는 사람도 있으나 장 박사가 또다시 러닝 메이트를 잃은 것은 이미 또 하나의 기정된 사실이 되고 말았다.

  유해는 출국한 지 22일 만인 2월 20일 하오 1시 55분에 CAT 항공기 편으로 돌아왔다. '낫는 대로 지체없이 달려오리다'던 조 박사의 육성은 어디로 갔는가?

  1960년 2월 25일 상오 10시에 해공 선생에 이어 또다시 국민장에 모셔진 조 박사의 유해는 저 수유리에 유택(幽宅)을 잡기에 이르렀다. 


5 


  서거한 두 대통령 후보는 못다 피는 안타까운 운명을 지녔고 연달아 두번씩이나 대통령 후보를 잃은 장 박사의 운명 또한 기구한 것이었다. 세계 역사상 두 번이나 연거푸 그런 비극의 주인공이 된 사람은 일찍이 없다.

  돌이켜보건대, 지난 4년 간의 부통령직은 얼마나 허수아비직이었던가. 그러나 그 비통을 되씹으며 이번에는 기필코 승리하자 했는데, 이번에도 러닝 메이트를 또 잃고 말았으니 우리 나라 역사에 두 번 다시는 기록되지 못할 사건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기에 60년 2월 28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가진 연설에서 장 박사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어찌하여 우리 민주당이 이렇게 거듭 불행한 슬픔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마는,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하는 일이라 하늘에서 그렇게 하시니 어찌하오리까. 나는 짝 잃은 외기러기처럼 혼자 여러분 앞에 나서서 외치지 않으면 안되는 이 운명은 무엇인지 모르게 저로 하여금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