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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대사

운석 장면 일대기 - 19. 주미대사 시절의 업적 평가 주미대사로서 운석 장면의 업적을 평가하는 데 있어 전제가 되는 것은 해방 후 195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 역사를 어떤 눈으로 보느냐다. 즉 해방전후의 현대사를 해방을 기해 남북한에 각각 친미 보수정권과 친소 공산정권이 대두하여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사 발전의 기회를 압살해 버린 암울했던 역사로 보거나, 남한의 경우 분단의 고착화를 배경으로 우익 독재정권이 반공을 내세우면서 그 기득권을 확대해 나가는 한편 대외적으로 미국의 종속국가로 전락해간 시기라고 본다면, 운석의 역할은 비극의 민족사를 이끈 주역 중의 한명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퇴영, 침체, 죄절의 늪이 아니고 한국인이 자유·평등·민주주의 동 보편적 이상을 향해 전진을 재촉”했던 시기로 보는 발전적 입장에서 조망할 때, 그리고 당시의 한..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7. 사진으로 보는 주미대사 시절 주요 활동상 경제적으로 곤궁한 신생 국가 대사로서의 어려움을 무릅쓰며, 주미대사 시절 운석 선생은 어떠한 활약을 보였을까. 6·25 전쟁 발발 전까지 선생이 개괄하는 자신의 활약상은 다음과 같다. “대사관 청사 구입 및 증축, 직원 조직, 국무성과의 특별유대 설치, 재화부(在華府, 재원싱턴) 제국 공관과의 친선 강화, 한국의 개별적 승인 획득 운동 추진(30여 개국 승인 획득 ― 재화부 각국 공관을 통하여) 한국 사정 주지(周知)를 위한 선전공작(주로 신문기사 강연 등으로), 한국 군사 및 경제 원조 촉진운동(주로 국무성 및 국방성에 교섭), 재미 한교(韓嶠) 단결 강화 등등에 영일(寧日)이 없이 주야겸행(晝夜兼行)으로 노력. 미 관민간에 대한(對韓) 인식 보급 및 향상이 여력이 보이게끔 되다. 서구의 NATO와 유.. 더보기
6·25 동란과 워싱턴 - 1. 6·25 사흘 전 덜레스의 언약 6·25 사흘 전 덜레스의 언약 대한 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얻기 위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수석 대표로 참석, 외교계에 첫발을 내어디딘 나는 1949년 1월 5일 초대 주미 대사로 임명되어, 1951년 2월 3일 국무 총리 인준으로 사임하기까지 만 2년 동안을 재직했다. 이 동안에 6·25 동란을 겪은 나는 미국 및 유엔과의 외교 관계를 거의 혼자서 전담하다시피 했다. 6·25 동란과 워싱턴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6·25의 역사적 배경을 이룬 몇 가지 국제적 사건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6·25 한 해 앞서인 1949년 4월 4일, 워싱턴에서 나토(NATO) 조약이 체결되어 공산 침략의 위협에 대한 서방측의 집단 안전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날 조인식에 초청되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