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기남

운석 장면 일대기 - 7. 최초의 교육 경험 :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강사 1918년 4월 운석 선생은 용산 예수 성심(聖心) 신학교에 강사로 취직함으로 인해 기독교 청년회관 영어과에는 야간부로 적을 옮겨 계속 수학하였다. 운석 선생은 이 신학교에서 1918년 4월부터 약 2년 이상 근무하면서 주로 예과(豫科)의 보통과목을 교수하였다. 선생은 약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연배가 불과 3~4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 신학생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선생이었다 한다. 다음은 당시 선생에게 배운 노기남 대주교의 회상. “그는 국어, 수학 등 세속 과목을 담당하여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는 그때 수원고등 농림학교를 갓 졸업한 약관의 청년이었지만, 이미 신학교에 초빙교수로 초대될 만큼 신앙이 깊고 인격이 높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개화기였던 당시라 새 학문을 배운.. 더보기
회고 - 거룩한 평신도 장 요한 (노기남) 노기남(盧基南, 천주교 대주교) 거성은 지다 1966년 6월 4일, 이날은 다만 해마다 맞고 보내는 평범한 날이다.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던 이날은 바야흐로 저물어 가면서 역사상 슬픈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오후 4시 50분, 한 인간의 고귀한 생애가 막을 내렸다. 아니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드디어 생명은 육체에서 떠나고 영혼은 하느님의 곁으로 안주하러 갔다. 요한 장면 박사가 서거한 것이다. 이날 저물어 가는 해를 따라, 한국 가톨릭계에 공헌한 거성이 떨어지고 한국 정계의 굵은 기둥이 꺾이었다. 이래서 평범한 이날은 영원한 슬픈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그와 사귀어 왔던 정치인들은 그의 죽음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평소에 그를 따르던 많은 교인들과 국민들이 그의 부음을 전해 듣고 애통해했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