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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 민주주의의 상징 (유홍열)

유홍열(柳洪烈, 문학 박사·대구 대학장)


나의 견진 대부


 
내가 장 박사를 처음 뵈온 것은 1936년 가을이라고 생각된다. 내 나이 26세로 명동 성당에서 견진을 받을 때였다. 이때 나는 경성 제대 역사학과를 나와 대학의 조교로 있었다. 나는 마침 동성 상업 학교 박 교장을 알고 있었던 터이라 박 교장의 소개로 명동 성당에서 견진을 받게 되었다. 내게 견진을 내리신 이가 바로 장 박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미 그분은 아우 장발(張勃) 씨와 더불어 우리 나라 최초의 방지거 제3회원이실 뿐더러, 이 나라 가톨릭 발전에 크나큰 공적을 쌓아 오신 분이었다. 그 뒤부터 나는 장 박사를 견진 대부로 모시게 된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 너그러운 인품, 그리고 한국 가톨릭 역사에 영원히 빛날 분을 대부로 모신 것이 어찌 영광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서울 대학에서 조교 생활을 3년 간이나 했다. 당시 일제 치하인 만큼 일본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유능한 우리 나라 사람이라도 교수가 되지 못했다. 조교 생활은 3년 이상 할 수 없게 되어 있어, 나는 부득이 다른 직장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러한 내게 한 일자리가 나섰다. 내 전공이 본래 역사학이라 역시 그 방면의 직장이었다. 다른 곳이 아니라 총독부에 있는 조선사 편찬국이었다. 내가 잘 아는 일본인 ‘이마이다’라는 사람이 소개한 곳이었다. 나는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서울 대학에서 교수도 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 데다가 또 일본인의 관청에서 일본인들의 녹을 먹고 산다는 것은 일종의 수치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자리를 주저하자 ‘이마이다’는 끈덕지게 나를 설득하려 했다. 바로 이때 나는 대학 병원에서 맹장 수술을 받았다. 1938년이 되던 해였다. 하루는 교우이며, 동성 학교에 직을 두고 있던 한창우(韓昌愚) 씨가 나를 찾아왔다. 한창우 씨는 내 병문안을 하고 나더니 자기가 온 뜻을 밝혔다.

 
“유 선생, 당신 대부(장 박사)께서 동성에 와서 같이 일하자고 합디다. 어떻겠소?”

 
“글쎄요….” 나는 그 자리에서 확답을 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총독부에 있는 조선사 편찬국도 별로 마음에 있는 곳은 아니지만, 동성 학교는 그래도 서울 대학의 조교였던 나로서는 약간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또 하루는 나의 대부이신 장 박사께서 몸소 나를 찾아 주셨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세상에 일본 사람의 관청 생활을 하는 것은 후일을 생각해서라도 좋지 않을 것 같소. 우리 다른 사심이 없는 교우로서 같이 일을 해봅시다. 내가 알기로는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고 하니 와서 같이 일을 합시다. 우리 교우로서 같은 학교를 위해 서로 힘을 모아 일을 하는 게 좋지 않겠소.”

 
장 박사의 말씀은 간곡한 것이었다. 나는 나의 견진 대부가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해 주시는 데에도 면구스러울 정도로 황송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 지당하신 것이었고, 또 간곡한 것이어서 나는 이를 뿌리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또한 그분의 말씀을 듣고 나니 일제 치하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끼리 단합하여 일을 한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일 뿐더러, 훗날의 독립이라는 광명을 바라볼 때 매우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리라 생각되었다. 또한 나는 그분의 너그러우신 위품에 눌리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동성으로 갈 것을 마침내 승낙했다. 그리하여 대학 병원에서 3월 초순에 퇴원한 나는 새 학기가 시작된 4월 8일 동성 학교의 역사 담당 교사로 부임했다.

 
부임하자마자 내게는 여러 가지 고초가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일본 역사와 세계사를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인 교사들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어느 날의 일이다. 일인 교무 주임 ‘사이고’는 “조선 사람이 어떻게 우리 대일본 제국의 역사를 가르칠 수 있느냐?”고 정면으로 불만과 공박을 주었다. 그러나 교장인 장 박사는 이를 일축해 버렸다. 그리하여 장 박사는 아니꼬운 ‘사이고’ 교무 주임을 몰아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이고’는 총독부 학무국의 상당한 배경을 가지고 들어와 동성을 일인 교육 기관으로 바꾸려 하였던 자인 만큼, 그를 내쫓는 데 당국의 압력을 염두에 둘 때 몹시 힘든 일이었으니, 그분의 결심과 실천이 어떠했는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교무 주임의 후임으로 ‘오다무라’가 들어왔고, 나는 훈육 주임이란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장 박사가 보기 드문 대담성을 지닌 분으로 알게 되었다. 그분의 전체를 말할 때 나로선 외유 내강한 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분은 일제 치하에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자주성을 종교적인 교육을 통하여 일관했다.
또한 우리 한국인 교사들은 만날 적마다 어떻게 하면 일인 세력을 꺾느냐에 의견을 나누곤 했다. 당시 우리는 장 박사를 중심으로 하여 한창우 씨, 유동진 씨, 나 등등으로 팀워크가 잘 짜여져 있었다.

 
내가 45년 해방을 맞은 다음 달인 9월까지 7년 반이란 세월을 동성에서 장 박사를 모시고 일을 해 오며 많은 인간적인 지도를 받았지만, 보다 더 보람된 것은 신앙적인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의 견진 대부인 장 박사의 극진한 신앙적인 지도가 없었던들 나는 아마도 오늘날과 같은 신앙 생활을 누리지 못했을 게 아닌가 생각된다.


파리에서의 조선 고적 도보


 
해방 후 구성된 민주 의원은 각계를 대표한 사람들이었다. 장 박사는 민선 및 관선을 통하여 유일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분이 그렇게 정계에 첫 진출을 하게 된 것은 모든 가톨릭 신도들의 열망이기도 했지만, 특히 노 대주교의 권유와 밑받침에 의해서 된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가톨릭은 이 나라 역사의 한 측면을 단단히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혹자는 지나친 정치성이라고 비난을 했지만, 그것은 정치를 떠난 이 나라의 소개, 즉 8·15와 더불어 진주한 미군을 위시한 자유 우방에게 가장 신임을 받을 수 있는 비정치 단체로서 이 나라를 널리 알리는 역할만 했을 뿐이다. 그러기에 장 박사를 가톨릭의 대표로 민주 의원에 내보낸 것이며, 명동 성당 앞에서 ‘하지’ 중장의 환영회를 가진 것도 정치적인 저의가 아닌, 그들이 원하는 순수한 중립적 입장에서였다.

 
그러기에 장 박사는 민주 의원 시절에 정치적 역량에 앞서 교우로서의 활약을 더 크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또한 국내 사정에 밝아 오랜 망명 생활에서 환국하여 국내 사정에 어두운 이 박사를 처음에 많이 도와 준 것은 기정 사실이다.

 
그러던 중 48년 이른 봄에 한창우, 유동진, 이해남(李海南) 씨, 나 등 일행이 장 박사를 모시고 장 박사 댁의 응접실에 모여 긴급 회의를 가진 적이 있다. 5·10 제헌 국회를 앞두고였다. 당시의 그분은 계속 정계에서 일하기를 몹시 꺼려하시었으나, 우리는 대주교의 의견에 따라 모인 것이다.

 
“내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해보니 내 성격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별로 자신이 없소.”

 
장 박사가 솔직히 자신의 심경을 피력하자,

 
“교육자로서 정계 진출은 환영할 일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반대하오. 교육자는 역시 교육자가 되어야지, 정계에 진출한다면 어떤 모진 풍파가 닥칠지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박사님은 교육계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나의 사촌 동서인 이해남 씨는 적극 반대론을 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나는 잠시 여유를 두다가 찬성론을 폈다.

 
“박사님께서 이왕 정계에 몸을 두셨었고, 또한 그동안 국가를 위해 많은 일을 하시면서 지키기 어려운 지조를 지키셨는데 이제 와서 무얼 꺼려하십니까? 나가십시오. 나가셔서 지금까지 해오신 것 이상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을 하신다면 우리가 미흡하나마 뒤에서 보좌해 드리겠습니다.”

 
내 말을 듣고 한참 생각에 잠기셨던 장 박사는 내 말에 자신을 가지셨는지는 몰라도 그럼 다시 정계에 나서 보겠다고 결정을 보기에 이르렀다.

 
5·10 총선에서 그분은 당당히 이 나라 제헌 국회 의원으로 무난히 당선되었다. 일단 결심하고 또 그 결심이 보람된 승리의 결실로 맺어지자 그분은 무척 기뻐했다.

 
그 후 장 박사가 파리 유엔 총회의 수석 대표로 떠나기에 앞서 만나 뵐 기회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나라를 잘 소개할 수 있겠소?”

 
그분은 나의 의견을 듣고자 하셨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나라의 문화가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하고, 나는 조선 고적 도보 16권을 가져가기를 권했다. 그것은 우리 나라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문화 고적의 진본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책이다. 후일에 들은 이야기지만, 장 박사는 이 조선 고적 도보 16권을 호텔의 응접실에 비치해 놓고 찾아오는 외국인, 특히 유엔 대표나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기자에 이르기까지 이 책을 보이며 한국이 비록 신생국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의 오랜 전통과 역사는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소개하였다 한다. 다른 외교적 활약도 컸겠지만 조선 고적 도보 16권으로 한국의 유구하고 찬란한 문화를 소개함으로써 얻은 효과도 컸으리라 본다.

 
문화적으로 이렇게 한국을 소개하는 한편 천주교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엔 대표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한국 승인 문제를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 당시의 유엔 총회 의장인 호주 대표 에버트 외상을 만나려고 했으나 좀체로 만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우리 나라 문제가 토의 일정에 들어가 있었지만, 유엔 총회 의장을 직접 만나서 한국 승인에 관한 도움과 또 그의 힘을 빌리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바쁜 의장직에 있는 사람이라 만나기가 힘들었다. 장 박사는 몹시 초조한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가 10월 3일 소화 데레사 축일 아침에 파리 서북방에 있는 성녀 소화 데레사의 리지외 성지를 참배하기 위하여 기차를 탔다. 그 기차 안에서 장 박사는 한 사람의 성직자를 만났으니, 그는 다름이 아닌 호주 시드니 시의 부주교 오브라이언 씨였다.

 
“나도 리지외에 가는 길입니다.”

 
그도 리지외에 가는 길이라 했다. 장 박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가웠다.

 
“신부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저는 코리아에서 온 장 요한(영세명)입니다. 유엔 총회 의장인 에버트 씨를 만나고자 했으나 만날 길이 없으니, 신부님께서 어떻게 주선을 해주셔야겠습니다.”

 
장 박사는 오브라이언 신부를 붙잡고 다짜고짜로 간청부터 했다.오브라이언 신부는 장 박사를 일찍이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 에버트 씨를 만나게 해줄 것은 물론, 자기도 같은 가톨릭으로 장 박사를 돕겠다고 언약했다.

 
그 후, 장 박사는 에버트 유엔 총회 의장을 만나 한국 승인의 의제(議題) 토의를 원만하고도 성공적으로 이끌어 줄 것을 호소했다. 한편, 그분은 오브라이언 신부를 통해서 더 많은 가톨릭 신자인 유엔 각국 대표들을 만나 눈부신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기의 소임을 완수하기에 이르렀으니, 48대 6으로 한국이 자주 독립 국가로 인정받은 게 바로 그분의 크나큰 업적이다.

 
그분은 가톨릭 신자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일이 전혀 없었고, 모든 것을 종교의 힘에 의지했으며 또 그렇게 성실히 실천한 분이다. 아주 사소한 일 같지만 역사의 한 측면으로 내다볼 때 그분의 종교의 힘과 신앙인의 도움이 이 나라 역사에 한 주춧돌이 된 것임을 아무도 감히 부인하지 못하리라.


민주주의의 등불


 
초대 주미 대사로 가 있던 장 박사는 호주를 비롯한 우방을 친선 방문하고 귀국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6·25가 발발하기 불과 1개월 전이었다.

 
그분은 38선을 돌아보고 38선의 경비가 너무나 허술한 것을 알자 장차 도래할지도 모를 어떤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계셨는지 몹시 걱정하시는 빛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귀임함에 앞서 나는 그분과 정략적인 약속을 나누었다. 이때의 일을 생각해 보면 하나의 드라마인데 그 드라마는 한국을 위기에서 구해 주었던 것이다.

 
“덜레스 씨가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6월 중순경에 우리 나라에 오게 되어 있는데, 나는 미국에 가서 그에게 한국은 고립되어 있지 않고 어떤 침략을 받든지 미국은 한국을 도울 것이라는 것을 국회에서 연설케 하겠으니, 우린 그 대신에 당신이 있는 서울 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의 학위를 줍시다.”

 
나는 그것을 쾌히 승낙했다.

 
덜레스 씨는 사실 우리 나라 국회에서 한국은 절대로 고립되어 있지 않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덜레스는 장 박사와 나와의 내약대로 서울 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리고 4일 후엔가 6·25가 발발하였다. 덜레스 씨가 당황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엄숙히 우리 국회에서 언약하지 않았던가.

 
유엔이 그만큼 빨리 출병케 된 것은 덜레스의 약속 이행과 더불어 장 박사의 유엔에서의 활약이 컸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겠다.

 
장 박사는 매일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하여 국내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국제 여론을 들려주어 국민을 안심케 하였으니, 그분의 정치적 수완도 높이 살 만하지만, 그분이 국민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가히 알 만하다.

 
장 박사가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이에 평양에 있는 그분의 누이 메리놀 수녀는 북괴의 보복을 당하다가 끝내는 학살되고 만 비운을 겪었다. 그분은 국가를 위한 위대한 업적을 남기었지만 누이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죄스런 오빠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국가의 대사를 감당함에 있어서 스스로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불상사라 하겠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길에는 언제나 수난이 닥쳐온다. 장 박사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를 몸소 받아들였다. 국민의 기대에 따라 과감하게 싸울 때는 싸워,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의 터전을 구축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장 박사는 국민의 심볼이었다. 극단의 독재 정치가 무기력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진실을 확신했고,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자유와 민주의 역량이 국민의 체온에서 우러나오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누가 뭐라고 이론을 들고 나온다고 하더라도 4·19는 혁명이다. 계승해 나갈 주체 세력이 없었다는 것이 물론 비극이었다. 그것을 대행하는 세력이 장 박사 중심의 정치 세력이었다.

 
어찌 되었든 “악정을 적수 공권으로 무너뜨렸으므로 4·19는 혁명이다.” 단순한 의거라는 견해에 나는 반대한다. 4·19 직후의 과도 기간이 다소 길었다는 점에는 나도 동감이다. 4·19의 혁명 정신이 흐려지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압정에서 풀린 데다가 과정을 거치는 동안 혁명 정신이 흐려졌으며, 설상 가상으로 민주당의 분파적 생리가 작용했으니, 4·19의 완성이란 기대하기 어렵게 되고 만 것이다.

 
4·19 직후에 장 박사가 임기 만료 전에 부통령직을 자퇴한 것은 옳다고 본다. 깨끗이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권세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라면, 그런 결정을 스스로 내리기가 퍽 어렵지 않았을 것인가. 나는 그때의 장 박사의 용단을 찬양하는 사람의 하나다. 정치인이기에 앞서 신앙인이기 때문에 취할 수 있는 건실한 태도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무렵 서울 대학교 학생처장으로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장파(張派)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총리 지명과 인준을 전후하여 한국일보 기자가 찾아와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를 평가하는 말을 했을 뿐인데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상징적 인물


 
집권 후의 장 박사는 모든 일이 뜻대로 안되어 난관에 봉착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신·구파의 민주당 분열이 그 하나요, 인사 정책에 있어서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그 둘이다.

 
소수의 참모들이 인의 장막까지는 안 가도 그 비슷한 것이 형성되어서인지 8시에 만나러 가서 11시가 넘도록 기다려도 만날 수 없었다. 비서를 추천했으나, 장 박사 자신이 쓰고 싶은 사람인데도 직계 비서로 채용되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것이 5·16 직전의 일인 듯 싶은데 명동 성당에서 장 박사는 외람되게도 내게 문교 장관직을 맡지 않겠느냐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서울 대학교 교무처장으로 있었다.

 
“난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 박사님 뜻을 받들기가 어렵습니다. 서울 대학교에 계속해서 있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5·16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만나, “박사님, 주의하셔야 되겠습니다.”

 
그 무렵 이상한 얘기들이 떠돌기 때문에 몇 말씀을 드렸더니 별 반응이 없었다. 정계에서 은퇴한 뒤로 성당에서 만나는 일이 잦았다. 그리고 8·15 해방 16주년을 맞이하여 ‘경향 신문’에 “민족·정치·역사”라는 글을 연재하던 중 민주당의 치적을 다소 혹평하여 ‘허울 좋은 자유 민주주의’ 운운하는 대목이 들어가 장 박사를 괴롭힌 일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아도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요담엔 그걸 좀 고쳐 줘….”

 
그 글로 인해서 장 박사로부터 직접 충고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분 생각으로는 그럴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장 박사는 우리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상 하나의 상징적 존재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앞으로의 사가들도 당연히 그렇게 평가해야 할 것으로 나는 믿는다.

 
돌이켜볼 때 해방 후 우리 나라 정치 풍토는 착잡하였다. 그 와중에서 장 박사는 미국에서 받은 민주 사상의 정치 이념을 배워 와 교육자로서 또 민권 옹호를 위한 정치 투사로서 혁혁한 공적을 쌓았다. 전란 시에 독재가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장 박사는 이 정권 독재 치하에서 하나의 희망이요, 광명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 교육 이념과 가톨리시즘에 입각한 반공 노선을 굳게 지킨 분으로 큰 공적을 남겼다. 장 박사는 와병 중에도 걱정이 늘 전교에 있었다.

 
한마디로 한국 인텔리에 가톨릭 신도가 많은 것은 장 박사의 힘이다. 장 박사는 교육자로서 종교인으로서 또 정치인으로 우리 역사에 길이 빛날 상징적 인물이라는 점을 나는 강조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