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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 및 저서 - 신앙백서

신앙백서 - 교회의 유일성 2 (1933.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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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교회는 그 신도들의 정치상 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당파에 속하든지 어떤 주의를 받들든지 도무지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 문제에 이르러서는 결코 저들의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다.

 신도 중에 만일 순수한 가톨릭 신앙에서 한 걸음이라도 빗나가는 자가 있으면, 교회는 “여기서 한 걸음이라도 넘어가지 못하리라. 이단의 물질은 일체 이 신앙의 바위 언덕에서 부서져라!” 하고 부르짖는다. 실로 신앙의 전당만은 평화와 협동과 일치의 안식처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가톨릭 신앙에는 이런 신앙의 일치가 있기 때문에 그 신자들은 세계 어느 곳에를 가든지 다 같은 교리를 듣게 된다. 서울에 있든지, 런던이나 파리에 가든지, 로마나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 가든지, 북경이나 동경에 가든지, 다 똑같은 예식과 제전에 참례하게 되고 다 같은 성사를 받는다. 이것은 가톨릭 신도들이 가히 자랑할 만한 일이며, 더욱이 각지로 여행을 다니는 신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제일 큰 위안이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조는 과거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과연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 선전하고 있는 교리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산상에서 가르치시던 그 평화의 복음이다. 성 베드로가 안티오키아와 로마에서, 성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금구 성 요한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성 아우구스티노가 히포에서, 성 암브로시오가 밀라노에서, 성 레미가 프랑스에서, 성 보니파시오가 독일에서, 성 아타나시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선전하던 바로 그 교리다. 성 바드리시오가 아일랜드에서, 성 아우구스티노가 영국에서,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인도와 중국과 일본에서 전하던 것도 다 똑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 동일한 가르침이 2천년 세계 도처에서 선전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히브 13, 8). 가톨릭 교회는 교리에, 신앙에 있어서만 이와 같이 기묘하게 일치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통치 기관에 있어서도 또한 완전히 통일되어 있다. 사람의 지체가 그 머리에 연결되어 있음과 같이 3억 6천만 가톨릭 교도는 다 한 사람의 두령에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떠나지 아니한다.


 태양계에 속한 여러 별들이 만유 인력의 법칙을 따라 태양을 중심으로 각각 돌고 있음과 같이 가톨릭 교회의 신도들도 각 그 소교구 신부들의 지도를 받고, 신부들은 주교의 지도를 받고, 주교들은 로마 교황을 성 베드로의 계승자로, 교회 전체의 두령으로 인정하고 그의 지배를 받고 있다. 또 로마 교황은 직접 예수 그리스도께 종속되어 있다. 즉 말하자면 3억 6천만의 대중이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큰 원형을 그리고 정연한 질서 가운데서 회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운행되고 있다.


 시기가 아무리 불리하든지, 원수가 아무리 공격하든지, 어떠한 폭력과 압박으로든지, 감히 이 질서를 문란케 하거나 일치를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가톨릭 교회에서 때때로 교리상 정의를 내리고 새로 신덕 도리를 공포하는 것을 가져 신앙의 일치가 깨진 것같이 말하는 이가 있다.


 과연 얼른 보기에는 전에 없던 새 교리를 가르치는 것같이 보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아무 근거도 없는 교리나, 처음부터 반포된 그리스도교 천계 중에 도무지 포함되지 아니한 교리를 교회가 새로 지어내는 것은 결코 아니다(요한 14, 26).


 사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해 줄 부탁을 받았으니,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6, 13)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가 반드시 믿어야 할 신덕 도리로 가르치는 교리는 최초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도들에게 가르쳐 주신 바로 그 교리니 변화도 변천도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가르침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교리를 누가 감히 변화시킬 권리도 없으려니와 변화시킨 사실도 없다. 한번 교회에서 이러한 교리는 가톨릭 신조에 속한 것이니 꼭 믿어야 한다고 정의를 내린다면, 그 교리는 반드시 벌써 사도들에게 계시되고 사도들이 성경이나 성전(聖傳)으로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좀더 명확하게 밝혀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공의회의 질문을 보든지, 각 신조가 정의된 역사를 보든지, 교회가 전에 없던 교리를 새로 묵시받아 가르친다고 선언한 데는 한 곳도 없다.


 천계의 진리는 영원 불변하는 것이며 이 진리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경우에 따라 각기 변화하는 것이니, 어제는 잘 모르던 것이라도 오늘 와서 명백하게 알게 되는 수가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진리가 함축적으로 은연중에 제시되어 자세히 논정할 필요가 없다가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점점 의혹과 오해와 이단의 말이 날 때에는, 이것을 한층 더 똑똑히 의무적인 신조로 판정 반포하여 모든 의심과 이설을 일소하여 버리고 일반 신도들로 하여금 안온히 진리에 순목케 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하기를 “이단자의 교활한 공격에 대하여 가톨릭 진리의 어느 점이든 옹호해야 할 필요가 생길 때에는 자연히 더 면밀하게 연구하고, 더 똑똑하게 그 뜻을 이해하고 일층 더 열심히 가르치게 된다. 이단자가 문제를 일으켜 주기 때문에 우리가 더 철저하게 지식을 개발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신국론 16, 2).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사도들이 전하는 교리 가운데는 어떠한 진리가 다만 간접으로만 포함되어 있는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모든 초자연적 선행을 하는 데는 반드시 은총이 있어야 한다”라는 교리 가운데는, 영혼을 구하는 데 유익한 선행에 착수하는 데도 반드시 은총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 간접으로 포함된 것이다. 반펠라지안파 이단자들은 이것을 부인하였으므로 가톨릭 교회는 그 점을 명백히 정의하여 저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 밖의 여러 문제에 대하여도 무슨 쟁론이 일어나거나, 새 이단의 말이 생길 때에는 종내 간접으로 믿어 오던 것을 명확하게 선언하여 신도들이 믿어 나갈 바를 똑똑히 일러 준다. 성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를 세우고 저에게 최상권을 주었다는 교리 가운데는 베드로가 교회 전체 일치의 중심이 되어 여러 특권을 받고 의무를 가졌다는 것도 간접으로 긍정되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탁월하신 지위와 비할 데 없이 정결하시다는 천계 중에는 성모 ‘무염 원죄’의 교리도 은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여러 진리 중에는 처음 계시될 때에 명백히 표시되지 아니한 것도 있었다. 아직 이단이 일어나지 않고 반대가 생기지 아니했을 때에는, 그 의미를 더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접으로 다소 명료치 못하게 계시된 교리는 이를 등한히 하고 오해하여 여기에 대한 이단을 일으킨 일이 종종 있었으니, 지금은 전 가톨릭 교회에서 일반이 의심 없이 믿어 오는 교리 중에도 전에 한동안은 의문이 나고 쟁론이 생겼던 일도 있었다.


 “신앙에 길을 잃은 자는 완전히 신앙하는 사람의 건전함을 일층 명료하게 증명하여 준다. 성경 가운데는 뜻이 명백하지 아니한 곳이 적지 아니하니, 이단자들은 그 자신이 교회에서 끊겨져 나간 것을 통분히 생각하여 이런 명백치 못한 점을 꼬집어 내어 여러 가지로 쟁론을 일으켜 교회를 괴롭게 해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숨어 있던 의미는 명확하게 드러나고 하느님의 성의(聖意)로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시편 제4 강의)라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하였다.


 신앙에 있어서 이런 종류의 진보 발전이 있을 것은 우리도 당연히 인정하는 반면, 또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진리가 조금일지라도 변하는 것은 아니다. 대 알베르토가 말한 바와 같이 “신앙이 신도들 가운데서 진보한 것이 아니고 신도들이 신앙 가운데서 진보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차라리 적절할 것이다.


 어찌하여 이런 진보 발전을 인정하여야 하느냐 하면,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아무리 천계의 진리라 하더라도 사도들이 다만 간접으로 가르치고 다소간 분명치 않게 말하고 과히 힘들여 말하지 아니한 교리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도 적지 않다. 따라서 여기 의심이 생기고 이론이 일어날 것도 또한 괴이치 않은 일이다.


 둘째로 이런 의심이 생기고 이론이 일어날 때마다 교회는 이런 기회에 성경의 참뜻을 명백히 하고 이를 풀어 설명하고 결정하여 준다. 이것은 성경과 교부들이 이미 증명하였을 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자신들도 입증하는 것이니, 오늘까지 저들이 발간한 성경 주석 서적은 몇백 종으로 헤일 것이다. 저들이 이와 같이 많은 노력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이유는 역시 성경의 본뜻을 더 명확하게 더 철저하게 알아보자는 데 있는 것이다. 만일 성경에 기재된 모든 사실이 일목 요연하여 누구든지 한번 읽어서 곧 그 참뜻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프로테스탄트측에선들 어찌 굳이 이렇게 힘들여 연구할 필요가 있으랴.


 이와 같이 성경을 힘써 연구하기는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나 매일반이다.


 그러면 한 가지 문제 되는 것은 천계의 참뜻을 더 명백히 알 수 있고 없다는 데 있지 아니하고, 다만 그 뜻을 제의하고 이것을 결정할 권한을 교회가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 하는 점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톨릭 교도와 다른 교도와의 논점은 필경 언제든지 교회 권위 문제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즉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경의 뜻이 명확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이것을 각 개인이 제각기 연구하여 각자의 판단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고 오직 교회에서 최후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요, 모든 신도들이 이 결정을 좇음으로 말미암아 신앙의 일치가 보존되는 것이라 가르치고, 또 이대로 2천년 간을 실행하여 내려온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교파에서는 교회의 권위를 인정치 않고 각 개인이 자기 주장을 고집하므로 자연 의견의 충돌과 교파의 분열을 보게 되어 오늘날 3백여 종의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교회의 유일성의 문제에 대하여는 성 원선시오 레닌스의 말을 빌려 결론을 맺으려 한다.


 “영혼에 관계되는 종교 문제는 형상을 가진 육체에 비할 수 있으니 육체는 시일을 따라 점차로 장성하여 근육과 골격이 발달되어 간다. 그러나 언제든지 처음부터 항상 같은 개체다. …그와 같이 오늘날 우리가 거두는 교리의 열매는 가톨릭 교회가 이른봄에 뿌려 두었던 종자에서 싹이 나와 열린 것이며, 그때 뿌렸던 씨와 지금 거두는 열매가 서로 다를 리가 만무하다. 그리스도 교회는 그 의탁을 받은 교회를 가장 충실하게 보호하고 있다. 그 귀중한 위탁물을 털끝만치도 변화시키는 일은 없다. 하나도 버리는 일도 없으며 덧붙이는 일도 없다.”

(1933.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