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썸네일형 리스트형 운석 장면 일대기 - 26. 부정적 장면상(像)의 수정을 바라며 1. 무엇이 문제인가 운석 장면(1899 ~1966)은 1960년 8월 19일부터 약 9개월 동안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국정을 운영하다 5․16군사쿠테타로 인해 실각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그가 1948년 정계 진출이후 보여준 많은 업적―한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과 한국전쟁시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 낸 외교적 성과 및 민주당 창당 이후 야당 지도자로서 보여준 반독재 투쟁등―에도 불구하고 그의 치적이나 사상을 논함에 있어 정치가로서 장면이 갖고 있던 어떠한 결함이 5․16 군사쿠테타를 촉발하게 하였는가라는 결과론적 인식틀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종래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정치가로서의 장면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여겨진다. 5․16..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5. 거인 운석 신화의 나래를 접다. 운석 선생은 평생 수첩에 일지를 기록하였다. 1966년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1966년도 수첩은 5월 24일 “성가병원에 입원”이라는 기록으로 끝을 맺고 있다. 선생은 그해 6월 4일 명륜동 자택으로 돌아와 향년 67세로 서거하셨다. 《〈1966년도 수첩〉의〈5월 24일자 기록〉》 문인 박종화는 선생의 묘비문을 다음 글로 장식했다. 형산의 흰 옥은 그 빛깔이 본시 조촐하고 깨끗하거니와 부서질 때 그 소리 더 한층 맑고, 깨끗하고, 여수(麗水)의 황금은 그 광채 본디 찬란하거니 떨어질 때 그 음향이 더욱 쟁연하게 세상을 진동하는 법이다. 전 국무총리 운석 장면 요한 박사가 서기 1966년 6월 4일에 홀연 명륜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니 가족들의 슬픔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슬..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5. 민주주의의 황금시대와 경제제일주의의 시정방침을 천명 · 실천하다 운석 선생은 8월 19일 민의원의 인준을 받은 직후 그를 에워싼 기자들에게 발한 첫 성명에서 구정권의 독소 제거를 통한 민주화 방안과 장기 경제개발 계획을 입안 추진할 것임을 공언하였으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앞으로는 우리가 모두 새 출발해야겠습니다. 새 헌법아래서 새 공화국의 첫 국무총리로 지명된 데 대하여 책임의 중대함을 통감하는 바입니다. 제 2공화국의 건설을 위하여 민주당이 내건 선거공약을 실천함으로써 경제를 부흥시키고 구정권의 독소를 제거하는 것이 첫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또한 장기 건설계획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의 창의력과 기업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전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제 2공화국의 첫째 과업이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국회의원과 국민은 새출발을 하여야 할 것이며,..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4. 제2공화국 국무총리에 취임하다 운석 선생이 남긴 “회고록 초안”에는 7․29총선을 거쳐 국무총리 인준에 이르는 과정을 “내각책임제 개헌후 4대 국회 자진해산. 7․29 선거에 용산갑구에서 출마 당선. 제 2차 지명으로 국회에서 국회에서 총리 인준(1959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당선, 1959년 전당대회에서)”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왜 운석 선생은 2차 지명으로 국무총리에 인준되었을까? 왜 선생은 1959년의 대표최고위원 당선 사실을 가로 안에 병기해 놓았을까? 1959년 전당대회에서 운석 선생이 조병옥을 70여표차로 제치고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오른 것은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3표차 박빙의 리드를 보인 조병옥 후보에게 다수결 원칙이라는 민주주의 기본원칙을 지켜 대통령 후보자리를 양보하는 미덕을 보인데서 얻은 영예였던 것이다. 그러..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3. 부통령을 사임하다 1. 부통령을 사임하다 1960년 4월 23일자 『조선일보』 호외는 현 부통령 운석 선생의 사퇴 성명과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의 사퇴 고려와 내각책임제 개헌 고려를 언명하는 성명이 상오 11시 동시에 발표되었음을 알렸다. 이 호외는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1956년 9월 28일에 일어났던 운석 선생에 대한 저격사건은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을 우려한 자유당 핵심부의 소행이었다. 이를 뒤집어 보면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축출되면 운석 선생은 자동적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왜 선생은 부통령을 사직했을까?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사퇴 하루 전까지 선생은 4․19혁명의 원인이었던 3․15부정선거를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실시하자는 입장이었다. “‘정․..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2. 부통령 시절 : 민주주의 수회의 정신적 지주로 우뚝 서다.(3) 3) 신 정책의 산실로서의 부통령 공관 부통령 시절 운석 선생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를 자처하며 대안 없는 비판과 투쟁을 한 것이 아니었다. 4년간의 부통령 생활 동안 선생은 부단히 정책 대안을 개발해 이를 제안함으로서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때를 예비하고 있었다. 즉, 2공화국 총리로 집권했을 당시 표방․실천된 “자유민주주의와 경제 제일주의”의 정책, 구체적으로 다원화된 시민사회의 확립, 효율적 관료제도의 정착, 민간 주도형 경제건설, 국제사회와의 교류 확대 등은 선생의 정치입문 이래 지속적으로 개발․확충된 정책 구상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제 방면에 걸친 후진성 극복을 위해 선생이 제안한 정책 대안들은 선생이 남긴 , 「부통령 취임사」(1956), 「부통..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2. 부통령 시절 : 민주주의 수회의 정신적 지주로 우뚝 서다.(2) 2) 민주주의의 보루 순화동 공관 운석 선생의 부통령 당선은 선생이 투표를 통한 국민의 심판을 받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부상하였음을 보여준느 사건이자 고령의 대통령 유고시 권력 승계해 집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이유때문에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선생은 헌법에 의해 규정된 부통령의 지위 즉 참의원(參議院) 의장과 탄핵재판소 재판장 및 헌법위원회 위원장으로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 당하고 말 그대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만 머물 수 밖에 없었다. 명목뿐이었던 4년간의 부통령 생활에 대한 선생은 토로한다. "정부의 부원수인 부통령의 직책을 국민으로부터 수임받고서 4년간 엄격히 말해서 3년 8개월간에, 나는 먼저 국민의 고난의..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2. 부통령 시절 : 민주주의 수회의 정신적 지주로 우뚝 서다.(1) 1) 4대 부통령에 당선되기 까지 운석 선생이 회고하듯이, 민주당은 "사사오입 사건 이래 격분한 재야정치인들과 장시일간 협의한 후 강력한 야당을 창건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발족된 것이었다. 이처럼 "강력한 야당"의 등장과 함께 국민의 정치의식 수즌이 높아지고 의정도 활성화되면서 자유당 독주를 견제하는 민주당의 할동은 전국민적 지지를 얻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한국에서 정책 대결을 통한 국민의 심판을 받아 정권을 얻는 정당정치가 구현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일례로 창당 1년밖에 안된 신생 정당인 민주당은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 신익희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운석 선생이 자유당 후보 이기붕(李起鵬)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은 그 구체적 사례일 것이다. 《민주당 여수지구당 창당대회에 참석..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1. 민주당 최고위원 시절 1952년 8월 이 대통령은 발췌개헌에 의해 직선으로 치루어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의도한 대로 다시 당선되었다. 이후 이 대통령은 외생 정당인 자유당을 중심으로 해 독재의 아성을 더욱더 굳건히 쌓아나가기 시작하면서 종신집권의 포석을 놓고 있었다. 1954년 11월 27일에는 “초대 대통령에 한아여 중임(重任)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중심제 개헌안이 재석 203명 중 135명만이 찬성하여 개헌선인 3분의 2선에 이르지 못해 부결되자 이틀 뒤인 29일 사사오입(四捨五入)의 논리를 내세워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의 헌정유린과 폭압통치가 연이어 자행되자 민국당을 비롯한 보수야당 계열은 점차 반독재 투쟁을 위해 힘을 합치기 시작하였다. 1955년 초 민국당과 무소속동지회 소..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0. 제2대 국무총리 시절 운석 선생은 주미대사로 근무 중이던 1950년 11월 23일 제2대 국회에서 148대 6표라는 압도적 지지로 대한민국 제2대 국무총리로 인준·통과되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6·25 전쟁 개입이라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에 따라 대 유엔 업무를 수행하느라고 귀국을 늦추었으며, 1·4 후퇴 이후 정부가 부산으로 옮긴 뒤인 1951년 월 28일 귀국해 2월 3일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선생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11월 6일에는 맥아더 원수가 중공의 월경을 발표하고, 28일에는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 본국으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인준되었으니 곧 귀국하라는 것이다. 나는 귀국할 수 없다는 뜻을 이 박사에게 전했다. 중..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9. 주미대사 시절의 업적 평가 주미대사로서 운석 장면의 업적을 평가하는 데 있어 전제가 되는 것은 해방 후 195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 역사를 어떤 눈으로 보느냐다. 즉 해방전후의 현대사를 해방을 기해 남북한에 각각 친미 보수정권과 친소 공산정권이 대두하여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사 발전의 기회를 압살해 버린 암울했던 역사로 보거나, 남한의 경우 분단의 고착화를 배경으로 우익 독재정권이 반공을 내세우면서 그 기득권을 확대해 나가는 한편 대외적으로 미국의 종속국가로 전락해간 시기라고 본다면, 운석의 역할은 비극의 민족사를 이끈 주역 중의 한명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퇴영, 침체, 죄절의 늪이 아니고 한국인이 자유·평등·민주주의 동 보편적 이상을 향해 전진을 재촉”했던 시기로 보는 발전적 입장에서 조망할 때, 그리고 당시의 한..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8. UN군의 6·25 전쟁 파병을 이끌어내다. 여기서는 운석 선생이 동서간 이데올로기 대립의 산물로서 한반도에서 벌어진 국제전인 6·25 전쟁을 맞아, 그의 정치적 신념인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활동을 전개했는지를, 선생이 남긴 “우리는 자유를 수호했다―피어린 6·25 동란의 회고”라는 부제가 달린 「화부서 겪은 6·25」(1954)와 「(한국의 은인) 덜레스 씨를 추억한다: 상 」(1959), 「6·25 동란과 워싱턴」(1965)이라는 3편의 6·25 전쟁 관계 기고문과 당신의 긴박한 현장을 담은 사진과 문서들을 곁들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운석 선생은 6·25 전쟁 발발 두 달전 미국 국방장관 애치슨의 아시아지역에 있어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애치슨라인’으로 야기된 국방상의 결함을 태평양 연안국가간의 집단안보체제인 ‘태..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7. 사진으로 보는 주미대사 시절 주요 활동상 경제적으로 곤궁한 신생 국가 대사로서의 어려움을 무릅쓰며, 주미대사 시절 운석 선생은 어떠한 활약을 보였을까. 6·25 전쟁 발발 전까지 선생이 개괄하는 자신의 활약상은 다음과 같다. “대사관 청사 구입 및 증축, 직원 조직, 국무성과의 특별유대 설치, 재화부(在華府, 재원싱턴) 제국 공관과의 친선 강화, 한국의 개별적 승인 획득 운동 추진(30여 개국 승인 획득 ― 재화부 각국 공관을 통하여) 한국 사정 주지(周知)를 위한 선전공작(주로 신문기사 강연 등으로), 한국 군사 및 경제 원조 촉진운동(주로 국무성 및 국방성에 교섭), 재미 한교(韓嶠) 단결 강화 등등에 영일(寧日)이 없이 주야겸행(晝夜兼行)으로 노력. 미 관민간에 대한(對韓) 인식 보급 및 향상이 여력이 보이게끔 되다. 서구의 NATO와 유..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6. 초대 주미대사 시절 미국은 조선왕조가 최초로 그 문호를 개방한 서구 국가로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래 서구제국 중 한국과 가장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은 두 개의 상충하는 눈으로 미국을 보고 있다. 하나는 호의적인 시각으로,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일제를 몰아내고 해방을 가져다 준 세계 최강의 문명국이자 우리의 이해를 대변하는 최대의 “우방”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사발전을 왜고하는 제국주의적 패권국가로 인식하는 것이다. 해방 후 특히 6·25 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전자에 속하는 대미인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운석 선생의 경우 전자에 속하는 시각으로 미국을 보고 미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 대한민국이 미국에 파견한..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5.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하여 1948년 6월 25일 UN 한국 임시위원단은 “한국 인구의 거의 3분지 2 이상이 거주하며, 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었던 한국내 지역에서 선거권자의 자유의사를 유효하게 표현한 1948년 5월 10일의 투표결과”를 선언하였다. 1948년 7월 12일 국회에서 헌법이 채택되었고, 7월 20일에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李始榮)이 선출되었으며, 8월 15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전세계에 공표되었다. 한편 9월 3일 북한정부의 수립도 선포되었다.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건국의 일등 공신으로 부상한 운석 선생은 자신이 수행한 과업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파한다. "이제 헌법이 제정되고 대통령이 당선되고 정부가 수립되어 8월 15일 해방일을 기하여 대한.. 더보기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