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으로 곤궁한 신생 국가 대사로서의 어려움을 무릅쓰며, 주미대사 시절 운석 선생은 어떠한 활약을 보였을까. 6·25 전쟁 발발 전까지 선생이 개괄하는 자신의 활약상은 다음과 같다. “대사관 청사 구입 및 증축, 직원 조직, 국무성과의 특별유대 설치, 재화부(在華府, 재원싱턴) 제국 공관과의 친선 강화, 한국의 개별적 승인 획득 운동 추진(30여 개국 승인 획득 ― 재화부 각국 공관을 통하여) 한국 사정 주지(周知)를 위한 선전공작(주로 신문기사 강연 등으로), 한국 군사 및 경제 원조 촉진운동(주로 국무성 및 국방성에 교섭), 재미 한교(韓嶠) 단결 강화 등등에 영일(寧日)이 없이 주야겸행(晝夜兼行)으로 노력. 미 관민간에 대한(對韓) 인식 보급 및 향상이 여력이 보이게끔 되다. 서구의 NATO와 유사한 태평양 연안 제국의 단결이 대공(對共) 전략상 필요함에 비추어 이러한 기구를 구상하며 각국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하여 친선사절의 명목으로 1950년 4월 호주, 뉴질랜드, 비국(比國, 필리핀)을 역방하며 교섭한 결과 미국이 참가하면 적극 찬성한다는 동일한 의사임을 확인코 귀국보고.” 그러면 이러한 대사관 청사 구입 및 증축에서부터 태평양연안 제국 순방에 이르는 선생의 주요 활동상을 당신의 사진을 통해 하나 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주미대사 발령 직후인 1949년 초 "10평 짜리 임시 대사관" 사무실에서 집무하는 운석 선생≫
[다음은 선생의 회상. "서울에서는 곧이어 대사관 설치에 착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공관도 없고, 직원도 없고, 예산도 없고, 경험도 없이 일거에 대사관을 건설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UN총회 대표단 동료들도 다들 귀국한 뒤라 누구한테 상담을 해야 할지 종을 잡을 수 없었다. 임병직 씨도 행방을 알 수 없었으며, 그의 여비서였던 루쓰·홍 마저 어디로 가버려서 앞길이 캄캄했다. 일제치하에 이 박사가 주관하던 한국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가 시내 콜럼비아 빌딩 안에 있었다는 기억을 더듬어 주인 스케커쓰 씨를 만나 첫 상담을 시작했다. 스케커쓰 씨가 소개하여 처음으로 구미위원부에 근무하고 있는 김세선 씨를 만나 그와 함께 일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구미위원부에서 쓰던 방 두 개를 우선 임시대사관 청사로 하고 밖에 주미한국대사관이라는 간판을 붙였다."]
≪주미한국대사관 모습≫
[다음은 선생이 말하는 대사관 구입과 증축에 이르는 경과. "빈약한 대사관에서 오는 설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몇 차례에 걸쳐 대통령께 대사관 건물 구입을 상신했으나 그때마다 '너무 화려하게만 하려면 한정이 없다'는 이유 아래 거절을 당했다. 그래도 나는 꾸준하게 나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더니 겨우 허락이 되었다. 약 2개월간 물색한 결과 알맞는 건물을 10만 불에 사들였다. 그것이 지금 사용 중인 대사관 바로 그것이다. 그동안에 흑인 운전수도 채용되었으며 여비서도 2명으로 증원되었고 한표욱씨와 상무관들도 부임해 왔다. 새로 구입한 건물을 대사주택으로 하고 나는 그 옆에다 사무실을 증축할 계획으로 정도에 알맞게 설계서를 꾸며 정부로 보냈다. 몇 번인가 각하되었다가 규모를 줄여서 공사를 착수하여 결국 10만 불로 건축비로 1950년 봄에 완성을 보았다." 이홍렬의 회고에 따르면, 선생은 어렵게 장만한 대사관에 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장 박사가 대사로 계실 때 워싱턴 대사관을 찾으니 나한테 전 관내와 정원을 자세히 보여주면서 적은 예산으로 공관을 요만큼이나 마련한 것을 되풀이해서 자랑하셨다. 정원에 장미밭을 만다는 데 애쓰신 일, 건문 내의 실내장식이며 벽의 색채와 가구의 조화, 주단의 종류, 빛 등 식당에쓰여지는 홀 세트에서부터 실버 웨어에 이르기까지 놀라울 만큼 완벽하게 꾸미고 장만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절대 호화찬란한 것은 아니었다."]
≪1949년 주미대사관 요원 일동≫
[좌로부터 최운상(崔雲祥) 3등 서기관, 김세선(金世琁) 참사관, 운석 선생, 한표욱(韓豹頊) 1등 서기관, 주미대사 임명 직후 3개월간 선생은 워싱턴 주재 각국 대사관과 접촉하여 대한민국에 대한 개별적 승인을 얻어내는 작업에 열중하였으며, 그 결과 "주요 우방국가 33개국의 개별승인을 얻기에 성공하였다. 이에 따라 중·영·불·필리핀·로마교황청과의 외교관계가 열려 대사·공사의 교환이 개시되고 추후에 호주·서독 등지에 우리 영사관을 설치하게까지 되었다. 소련의 거부로 우리나라가 아직도 유엔멤버로 정식가입은 못하였으나 계속 노력 중에 있으며 방계적 유엔기구에는 벌써 식량·농업기구, 유네스코, 노동기구, 만국우체국기구, 보건기구 등에 가입되어 바야흐로 국제진출에 비약적 태세를 갖추"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다.]
≪1949년 주미 외교단≫
[좌로부터 남궁염(南宮炎) 뉴욕 총영사, 김용식(金溶植) 호놀룰루 총영사, 운석 선생, 주영한(朱榮翰)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민희식(閔熙植) 로스앤젤레스 총영사]
≪1949년 미국 각지 순회 강연을 떠나는 운석 선생과 수행하는 김세선≫
[한표육의 회고에 따르면, 주미대사관의 활동 지침은 "정보 수집에 치중할 것, 한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이고 남한의 인구가 전체의 3분지 2라는 점을 미정부와 국민에게 꾸준히 주지시킬 것, 경제원조와 무기가 절실함을 설득하고 다액의 원조를 얻어낼 것" 등이었다.]
≪호주를 친선방문한 운석 선생을 대서특필한 신문보도≫
[세계에서 가장 새롭고 흥미로운 나라인 한국의 친선사절단의 방문을 다룬 호주의 신문보도. 이 기사에는 NATO에 필적하는 공동방위체제인 태평양 동맹 체결을 모색하는 그의 본래 방문 목적은 보도되고 있지 않지만, 운석 선생의 경력과 학력에 대한 상세한 소개와 함께 한국에서의 여권신장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점이 재미있다.]
≪'태평양동맹'을 모색하는 운석 선생의 활동을 보도한 호주의 신문기사≫
[이제 막 독립한 신생 독립국가가 집단 안보체제의 구축을 주도하려 했다는 점에서 독자적 외교역량을 대외적으로 과시하였지만, 친선방문을 다룬 보도보다 비중이 낮게 다루어진 점으로 그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호주와 뉴질랜드 파견 친선사절로 '태평양동맹'을 교섭한 1950년 4월 10에서 5월 7일까지의 활동보고≫
[총 15쪽의 영문으로 된 이 활동 보고서에는 운석 선생 일행의 여정 및 접견 인물, 교섭 내용 등이 잘 요약되어 있다. 다음은 선생이 회고하는 태평양동맹의 체결을 모색한 이유. "6·25 한 해 앞선 1949년 4월 4일 워싱터에서 NATO의 성립으로 서방국가들의 공산침략에 대해 철석같이 단결한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당시의 미 국방장관 애치슨 씨는 워싱턴 프레스·클럽에서의 연설을 통하여 '한국과 자유중국은 미국의 방위권에서 제외된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국방과 관계되는 극동정책을 밝힌 이 연설에서 이와 같은 청천벽력의 발언이 튀어나오자 우리가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뜻밖의 발언에 대해 한국의 실망과는 대조적으로 공산측의 희희락락한 것은 물론이다. 남침을 꿈꾸고 있던 소련과 북괴는 이 발언을 계기로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이 연설내용을 즉각 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이어 국무성을 방문, 그 발언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애치슨 씨로부터 한국을 방위권 안으로 포함시키겠다는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그 밑에 국방성 관계관들도 내가 납득할 만한 아무런 대책도 못하고 어물어물하고 있어다. 그후 나는 본국정부와 협의한 끝에 태평양지역의 자유국가들도 NATO와 마찬가지로 집당방위조약 체결을 추진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나는 이 대통령의 지시로 태평양연안국가에 대해 집단안전방위체제의 체결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그해 4월 10일 대통령특사 자격으로, 황창하(黃昌夏) 씨를 대동하고 워싱턴을 떠나 뉴질랜드, 호주, 필리핀 등을 역방했다. 필리핀의 퀴리노 대통령과 호주, 뉴릴랜드 등의 수상과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이들은 그 필요성은 절실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이구동성으로 미국이 이 조약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태도였다."]
≪운석 선생을 대표로 하는 친선 사절의 방문을 보도한 1950년 5월 5일자 『필리핀 헤랄드』에 실린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