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석 선생이 남긴 “회고록 초안”에는 7․29총선을 거쳐 국무총리 인준에 이르는 과정을 “내각책임제 개헌후 4대 국회 자진해산. 7․29 선거에 용산갑구에서 출마 당선. 제 2차 지명으로 국회에서 국회에서 총리 인준(1959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당선, 1959년 전당대회에서)”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왜 운석 선생은 2차 지명으로 국무총리에 인준되었을까? 왜 선생은 1959년의 대표최고위원 당선 사실을 가로 안에 병기해 놓았을까?
1959년 전당대회에서 운석 선생이 조병옥을 70여표차로 제치고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오른 것은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3표차 박빙의 리드를 보인 조병옥 후보에게 다수결 원칙이라는 민주주의 기본원칙을 지켜 대통령 후보자리를 양보하는 미덕을 보인데서 얻은 영예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부터 눈에 띠게 금이 가기 시작한 신파와 구파간의 균열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벌어지기만 하였다. 민주정치의 꽃은 대화와 타협이다. 조병옥 서거후 국민적 지지를 받을 만한 인물이 부재했던 구파는 4․19 혁명 이전부터 자유당과 제휴해 내각책임제 개헌을 통해 신파를 배제하고 정권을 장악하려 기도한 바 있었다. 내각제 개헌 논의는 4․19 혁명 발발이후 구파에 의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운석 선생이 “이 정권이 무너짐과 동시에 개헌을 먼저 하느냐, 총선거를 먼저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논란이 거듭되다가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킨 후 민․참 양의원 총선거에 들어갔던 것이다”라고 술회한 바 있듯이, 자유당 소속의원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현 국회에서 개헌을 논의하는 것은 순리가 아니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3․15 부정선거를 먼저 치러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는 운석 선생이 상대적으로 구파쪽 인물에 비해 지명도가 높았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구파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었다. 왜냐하면 운석 선생과 신파의 입장에서는 자유당 정권하에서 신파 배제하에 자유당과 제휴해 내각제 개헌을 추진한 바 있던 구파에 대한 유쾌하지 못한 기억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운석은 중대한 정치적 양보를 행한다. 선생은 4월 28일 기자회견을 통해 내각제 개헌안의 수용의사를 밝힘으로써 구파의 정치적 입장을 배려했다. 이러한 양보는 선생이 민주당 창당이래 부통령 재직 기간 내내 밝힌 내각책임제 개헌이라는 민주당의 정책을 존중한데서, 그리고 일인 장기 집권에 시달린 민의가 내각제 개헌을 원하고 있던데서 취해진 조치일 것이다. 그러나 이 개헌이 “자유당의 ‘생존 욕구’와 민주당 구파의 ‘대통령감 부재’라는 정파적 이해가 결탁해 서둘러 추진된 점은 역사의 교훈으로 삼을 만하다”는 한 연구자의 지적과 내각제 개헌안 통과 이후 “개헌이 독재를 배격하고 책임정치를 구현하는데 목적이 있지만 앞으로 이 제도를 운영하는 데도 철저한 민주정신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운석 선생의 고언(苦言)이 가슴에 와 닿는다.
《개인 정견 발표회에서 유세하는 운석선생》
《민의원 선거 당시 운석 선생의 선거 사무소》
7․29 총선 당시부터 분당을 추진했던 구파는 총선 이후 분당을 공개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총리인준 전까지 신․구파 사이에서 정권을 놓고 벌어진 사태의 추이를 당시의 신문 보도를 통해 살펴보자. 먼저 1960년 8월 1일자 『민국일보』에는 구파가 분당에 대체로 합의했으며 곧 구파당선자 총회를 열 것이라는 윤보선 민주당 최고위원의 언명과 “분당은 국민의사에 배치”되는 것이라는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운석선새의 기자회견 내용이 실려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 “윤보선은 ‘민주당이 너무나 비대하면 독재할 우려가 있다는 점과 건전한 의회정치를 위해서는 여․야가 서로 견제해야 한다는 점등으로 미루어 볼 때 대답은 스스로 명백하지 않느냐’고 말하여 구파가 분당하기로 간부간에는 대체적인 합의를 본 바 있음을 간접적으로 비치었다”고 한다. 반면 “장 대표최고위원은 이날 보수양당제를 실현키 위해 분당을 해야한다는 구파측 다수주장에 명백한 반대의사를 나타내면서 ‘민주당이 압도적 다수로 승리한 것은 책임정치를 위한 안정세력을 확보시켜준 유권자의 의사에 의한 것이지 분당을 시키기 위해서 민주당에 표를 던진 국민은 없을 것이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신문은 운석 선생과의 문답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문: 구파서는 당선자 대회에 앞서 구파만의 총회를 연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같은 집안 일을 구파․신파가 따로 총회를 갖는다는 것은 생각한 적도 없다. 구파가 따 로 총회를 연다고 해서 신파가 열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 보수양당제 실현을 위한 당내 분당론자에 대한 태도는?
답: 분당론자가 몇이나 되는지 호응할 사람이 몇이 되는지도 모르나 결코 분당론은 당내 몇 사람의 의사에 불과하다고 본다. 특히 국민이 민주당에 많은 표를 던져준 것은 당 을 가르라고 한 것은 아닐 것이며 국민의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다. 강력한 야당이 없 다고 해서 독재할 우려는 없으며 신․구파가 서로 견제하기 때문에 자유당 의원처럼 거수기(擧手機) 노릇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수 양당이 있어야 한다는 이론엔 반대하 지 않으나 지금 민주당을 깨자는 것은 국민의 현명한 판단을 모독하는 일이며 불안과 불쾌감밖에 줄 것이 없다.
문: 조각 방침은?
답: 2, 3일내에 최고위를 열고 대통령․국무총리의 인선원칙 및 방법을 비롯한 낙천자 포 섭 여부 등을 논의해서 의원 총회 상무위 등 다른 당기구에서 결정토록 하겠다. 조각 은 신․구 어느 파의 일색으로 한다는 데 반대한다.
《"민주당 구파 분당을 선언"을 보도한 1960년 8월 5일자『동아일보』》
8월 5일자 『동아일보』는 “민주당 구파 분당을 선언”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민주당 구파는 4일 오후 하오 4시 특별성명을 발표하고 내각책임제 하에서 건전 야당이 없는 이 정국에서 너무 비대해져 있는 민주당은 두 개의 정당으로 갈라져야 하며 강력한 국정의 수행은 뜻맞는 인사들끼리 책임지는 정치를 통하여서만 가능함으로 구파는 국민여망에 따라 책임지고 정권담당에 매진할 것임을 선언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서울신문』 8월 7일자는 “완전 분당상태에 이른 민주당 신․구파의 세력분포는 6일밤 별도로 열린 양파 당선자 대회에의 출석인원수로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었다. 하오 5시부터 시내 대명관에서 소집된 신파대회에는 85명(참10명, 민 75명)의 당선자가 참가했으며, 하오 7시부터 아서원에서 열린 구파대회에는 95명(참12명, 민 83명)이 출석하였다. 이 날 회의결과 신파는 안분(按分)조각의 인선을 위한 13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통령에 윤보선(구) 국무총리에 장면(신) 민의원 의장에 곽상훈(신) 부의장에 이영준(구) 이재형(무)씨 등 후보를 결정하였고 구파측은 23인으로 된 전략위원회에서 조각인선을 맡기고 지난 4일의 분당성명을 추인하는 한편 7일 의원총회의 보이콧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민주당의 신․구파는 완전 분당상태하에 서로가 실력대결의 태세를 갖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양파가 국회 본회의에서 표결로써 집권투쟁을 전개하는 것뿐이다”라고 기술하였다. 8월 9일자 『민국일보』를 보면 “민주당 구파의 장면 박사를 비롯한 민주당 신파의 영수들은 8일 하오 오위영 의원댁에 모여 정세를 재검톻란 끝에 윤보선 대통령, 장면 국무총리선을 변동치 않기로 하였다. 회의가 끝난 다음 현석호씨는 ‘만약 구파가 원내 다수표를 얻어 정권을 독점하더라도 신파는 당을 떠나지 않고 여당의 비주류로 남게 될 것이다’고 말하였다…소장파의 김재순 의원은 ‘윤씨의 태도 여하를 불문하고 우리는 기정방침대로 그를 끝까지 대통령으로 밀 것이며 만약 그가 구파의 김도연씨를 국무총리로 지명하면 원내에서 실력으로 이 지명을 뒤엎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8월 11일자 서울신문은 “마지막 타협 기회 상실, 윤보선씨 협상필요 없다고 일방통고”라는 제하에 “곽상훈씨가 주선한 이 회담벽두 윤보선씨는 구파의 23인 위원회가 회담에의 참가 필요성을 인정치 앟았다고 통고했을뿐 아무런 의사도 표명치 않았다, 이에 따라 양파절충의 마지막 기회였던 3자회담은 서로 말도 건네 보기 전에 깨어졌으며 신․구파의 분당은 더욱 확고한 기정사실로 굳어져 버렸다…장면씨는 이날 회담 결렬에의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분당을 하지 않고 끝까지 대의명분을 세워 고루고루 안분해 나가려고 했는데 상대방이 응치 않으니 이제 일은 다 된 것 아니냐’고 말했다. 또 윤보선씨는 ‘대통령 선거를 불과 이틀 앞둔 이 때 신․구파는 서로 태도를 바꿀 형편이 못되므로 이야기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였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신문 보도를 보면 운석 선생이 이끄는 신파는 시종일관 신․구파의 사전 협상을 통한 권력 균점을 위해 노력한 반면 구파는 권력 독점을 위해 분당을 기정사실화하고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있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이러한 구파의 권력 독점 기도는 의석 수에서의 구파의 박빙의 우세에 입각한 독선으로 판단된다. 물론 신파의 타협안에 보이는 대통령과 총리의 신․구파 배분에서 의석 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내각책임제 하에서 실질적인 국가 수반인 총리를 신파에서 장악하려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협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신문의 보도를 볼 때 구파는 어떠한 권력도 신파에 나누어 줄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애초에 신파와의 협상은 고려치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파의 숫적 우세를 과신한 구파의 이러한 비민주적 정략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귀결되었다. 왜냐하면 구파의 독선에 비해 신파의 전략은 합리성과 설득력을 갖고 있었으며, 이는 국무총리에 대한 지명․인준 과정에서의 표결로 입증되었다. 8월8일 개원한 5대 국회는 같은 달 12일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윤보선 대통령이 지명한 김도연에 대한 인준 거부를 거쳐 19일 2차로 총리에 지명된 운석 선생의 총리 인준이 찬성 117표 반대 107표로 통과됨으로써 제 2공화국의 시대가 개막되기에 이른 것이다. 구파의 독선에 대비되는 협상과 양보의 정신을 일관되게 유지한 운석 선생에게 무소속의 지지표가 집중된 결과이었다.
《8월 19일 총리 인준일 민의원 회의장의 모습》
[운석 선생의 긴장된 모습과 주변인물들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운석 선생이 말하는 총리 인준에 이르는 신․구파간의 갈등. “8월 12일에는 국회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윤보선씨가 당선되었다. 원내에서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민주당 내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선출되어야겠다는 것은 당연한 당론이었고, 이에 따라 당원들이 몇 차례 회합을 가지고 토의한 결과 대통령에 윤보선씨를 적극적으로 추대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당내 신․구파 전체의 합의로 제1차 대통령에 윤보선씨가 당선되었다. 이것은 제2공화국의 출항과도 같은 것이다. 이제 내각 책임제 헌법 체제하에서 대통령의 임무는 국무총리를 지명하여 국회의 인준을 받아, 그로 하여금 조각케 하는 일이다. 따라서 대통령에 당선된 윤보선씨의 첫 중대 과업은 물론 총리 지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신․구파의 잡음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점, 그 책임이야말로 어디 있던 우리는 정치인으로서 국민 앞에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민주당이라는 대여당이 신․구 양 세력으로 구성된 것이 사실인 이상, 어디까지나 대의 명분에 입각하여 대통령이 일을 처리해 나가야 했을 것이다. 마땅히 일반 국민의 상식과 정치 도의라는 것을 존중하여 사리에 좇아 총리의 지명이 처리되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제1차 지명에서 국무 총리에 구파 인사인 김도연씨를 지명하여 국회에 통고하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평지 풍파를 초래하는 정치 투석(投石)에 틀림없다”고.]
《한 표를 행사하는 민의원 운석 선생》
《총리 인준 후 윤보선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 총리》
[외쪽은 곽상훈 민의원 의장. 세 사람의 웃는 모습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윤 대통령에 대한 운석 선생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구파의 대표자로 우리가 윤씨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일치 단결하여 행동 통일을 한 이상, 그 덕분으로 대통령이 된 윤보선씨는 응당 신파 측과 손을 잡아 국정을 해 나가도록 아량을 가지는 것이 정치 도의인 것이요, 인간의 모럴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의 기대는 아랑곳없이 대통령직과 국무총리직을 자파에서만 겸점하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김도연씨를 지명하여 놓고 보니, 일반 국민은 물론 당내 신파측의 격분은 걷잡을 수 없이 폭발점으로 달리게 되었다. 설사 김도연씨의 지지가 국회 의원 중에 더 많았다고 치자. 그럴수록 장면을 먼저 지명하여, 내가 국회 인준에서 표를 얻지 못한다면 한층 더 자연스럽게 김도연씨가 국무총리가 될 것이니, 얼마나 떳떳한 일이었을 것인가. 민주당 전당 대회 때부터 모든 자리를 자파 일색으로 독점하려는 그분들의 생리를 모르는 내가 아니었으나, 김도연씨의 제1차 지명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이고, 정치 도의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처사라고 새삼 다시 느꼈다. 만약 윤 대통령의 의도대로 김씨가 국회에서 인준을 받았다면, 민주당은 일대 혼란에 빠져 수습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했을 것이다. 내각책임제하에서의 대통령은 마땅히 정당을 초월하여 어느 정당이나 파벌에도 가담하지 않고, 초연한 입장에서 국가의 상징으로 점잖게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그러나 제2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은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마치 구파의 참모 본부처럼 쓰고 있어 갖은 정략을 꾸미는 데 제공되었다. 신․구측이 합심하여 대통령으로 추대한 사실에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이라는 태도였다. 총리 지명을 둘러싸고 원내에서는 내가 먼저 지명되리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으나, 이 예측이 전복되었음은 구파측이 행정부까지를 병점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표시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를 둘러싼 비화가 많으나, 새삼스레 중언 부언하고 싶지 않다.”]
《기쁨을 부인 김옥윤 여사와 함께 나누다》
《총리 인준을 보도한 8월 19일자 『서울신문』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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