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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2. 부통령 시절 : 민주주의 수회의 정신적 지주로 우뚝 서다.(1)


1) 4대 부통령에 당선되기 까지

 운석 선생이 회고하듯이, 민주당은 "사사오입 사건 이래 격분한 재야정치인들과 장시일간 협의한 후 강력한 야당을 창건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발족된 것이었다. 이처럼 "강력한 야당"의 등장과 함께 국민의 정치의식 수즌이 높아지고 의정도 활성화되면서 자유당 독주를 견제하는 민주당의 할동은 전국민적 지지를 얻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한국에서 정책 대결을 통한 국민의 심판을 받아 정권을 얻는 정당정치가 구현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일례로 창당 1년밖에 안된 신생 정당인 민주당은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 신익희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운석 선생이 자유당 후보 이기붕(李起鵬)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은 그 구체적 사례일 것이다.

     
      《민주당 여수지구당 창당대회에 참석한 미눚당 간부들이 순천역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운석 선생 좌측이 신익희 우측은 조병옥과 박순천이다. 박순천이 들려주는 당시의 일화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한다. 장소는 순천에서 70리 정도 떨어진 바닷가의 시골 초등학교. "제일 먼저 해공 선생이 교단에 올라가 그 코흘리개들 50명 앞에서 강연을 한다고 말을 하려는데, 철부지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막상 할 말이 없으니까 '애들아, 내 이름이 익희(翼熙)다. 너희들 깜짝 놀라면 익키! 익키! 그러지? 그래, 내 이름이 신익희다'하고 웃었다. 그 다음 장 박사님이 교단에 올라가셨다. '애들아, 지금 신익희 선생님이 익키! 익키!라고 그랬지?'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아이들이 나를 보고 '자장면, 자장면'하고 놀렸다. 그래서 내 이름이 장면인데 너희들은 자장면이 뭔지 알겠니? 자장면은 국수다, 국수야! 장 박사님까지 그런 말씀을 하시고 나니 나는 할말이 없었다. 하여간 나도 뭔가 그 분들처럼 이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기에 '애들아, 여기에서 가까운 순천이라는 데 있지? 내이름이 바로 순천이다. 내 이름은 본래 순천이 아닌데, 내가 독립운동을 하다 쫓겨다닐 때 감춰준 사람이 거짓말하기를, 자기 동생이 순천으로 시집을 갔다가 소박을 맞고 쫓겨 왔다고 해서 내 이름이 고만 순천이가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민주당 정·부통령 지명 전국대회(1956년 3월 28일)에 참석했던 경북 대의원들의 기념사진》

[정·부통령 입후보자로 지명된 신익희와 장면 선생의 사진을 사진의 상단 여백에 오려 붙여 놓은 모습이 이채롭다. 원래 운석 선생은 신파측이 밀던 대통령 후보였지만, 구파와의 협상을 통해 구파측 부통령 후보 조병옥이 입후보하지 않는 조건으로 대통령 후보를 신익희에게 양보하고 부통령 후보로 나셨다고 한다.]



 그러면 부통령 당선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자. 1956년 3월 29일자 『동아일보』에는 "978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28일 상오 시공관(市公館)에서 거행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는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 씨 부통령 후보에 장면 씨를 무기명 연기(連記) 투표로서 지명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날 실시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투표는 총 투표수의 과반수 이상을 획득한 후보를 지명후보로 결정한다는 원칙하에 진행되었다. 이날 대회에서 주목을 집중한 사실은 정·부통령 후보에 지명된 신·장 양씨가 동당(同黨)이 공약한 정강정책은 물론 특히 '내각책임제의 구현 및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해서 전력을 경주할 것'을 엄숙히 전대의원 앞에서 서약하였다는 점이다."라고 특필(特筆)하고 있다. 이 보도 내용에서 주목되는 점 중 하나는 민주당이 민주주의 정치의 기본 운영원칙인 공정하고 자유로운 정치경쟁의 실현장치로서 선거제도를 ㅏㅇ론 결정과정에서도 관철하고 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민주당이 대의원의 투표라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후보자를 내세우되 정강과 정책의 제시를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으려는 정당정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운석 선생은 당시 국민들에게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로서 어떠한 정책을 제시했을까? 당시 한 신문사에서는 입후보자들에게 3개항의 설문을 주고 이에 답한 바를 보도한 바 있다. 설문은 이러했다. "(1) 귀하는 왜 대통령 혹은 부통령으로 입후보하는가. (2) 귀하는 우리사회의 정치적 · 경제적 현실을 어떻게 보는가 (3) 만약 귀하가 당선된다면 우리 국가나 국민이 처하여 있는 현실을 어떻게 개선하려는가. ①정치 ②경제 ③외교 ④국방 ⑤내치"
 이 설문에 대한 선생의 답변은 아래와 같았다.

"과거 8년간 이 박사 집권으로 인하여 정치적으로는 일인정치 내지 일당독재로서 헌법을 위반하는 일이 다반사 로 되었고 자가(自家)의 집권을 장구화(長久化)하기 위해서는 정치파동과 사사오입 개헌 등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여 헌정의 정신을 유린하고, 민족의 양심을 마비시켜 버렸다. 그리해서 안으로는 국민을 혼란과 거짓과 절망 속에 빠트리게 하였고, 밖으로는 국가위신과 민주우방의 신뢰를 떨어트렸다. 경제적으로는 조변석개하는 정책의 무정견과 국가의 경제권을 비법(非法)적으로 독점하는 소수관료, 특권계급을 조성하는 반면에 대다수의 국민대중은 무한한 고통과 불안에 헤매게 하고 있다. 이때에 이것을 교정하여 일대 혁신정치를 행하지 아니하고서는 민주국가의 기초가 확립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민생활 및 국가 경제가 송두리째 파탄되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8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이 박사의 영단(英斷)적인 개혁으로 정치 · 경제의 신국면이 타개될 것을 기대하여 왔으나 날이 갈 수 록 위헌과 비법과 부패는 심하여 가고 있으니 이제 와서는 이 박사는 혁신적인 정치를 행할 능력이 없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음으로 이번 정부통령 개선기(改選期)를 당하여 정권을 교체하여서 정치의 혁신을 단행하는 것 이외에 아무 도리가 없는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민주당의 공천을 얻어 평소에 나를 아껴주고 편달하여 주는 동지들의 권(勸)에 의하여 부통령에 출마할 것을 결심한 것은 다름 아닌 정치 혁신의 의욕과 포부에서이다. ① 만일 내가 당선된다면 정치면에 있어서는 민주당의 당론에 따라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로 개헌함으로써 국회에 대하여 정치책임을 지는 의회내각을 조직하는 동시에 먼저 인권을 옹호하며 자유분위기를 보장하는데 특별히 주력할 것이며 이리하여 국민들이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보람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고자 한다. 한편 현재 관권에 부당히 이용 지배당하고 있는 농민회, 어민회, 부인회, 국민회, 노동조합, 협동조합, 재향군인회, 학도호국단 등 모든 민간단체들을 관권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각자의 자주적 입장에서 진정한 민주적 발전을 도(圖)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그리고 금후의 모든 급의 선거에 있어서 관권의 간섭을 일체 배제하고 자유분위기를 확보하며 경찰 기타 공무원의 엄정중립을 지킬 수 있는 제도를 확립하겠다. 이것은 과거에 우리가 그러한 간섭과 압력에 쓰라린 체험을 가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실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는 이 나라를, 데모크라시의 낙원으로 만드는데 기본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② 경제에 있어서는 첫째로 관료독점을 타파하는 것이다. 금융기관 귀속(歸屬)사업 특수회사 등을 지배하는 관권을 청산하고 민간자유기업을 조장 · 육성하여 허가 · 인가 등의 제도를 가능한 최대한도로 철폐하고 인정과세 폐지 기타 세제를 혁신하여 산업의 자주적 발전을 조장할 것이다. 정부는 경제에 관하여 총합적인 계획의 울타리 안에서는 모든 국민 즉 기업가나 근로자나 최대의 자유와 창의를 가지고 활동 할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이며 한편 노동자와 농민의 자발적인 이익옹호와 단체행동을 조장하는 동시에 국민소득이 일부특권계급의 농단(壟斷)하는 바 됨이 없도록 이에 주력할 것이다. ③ 외교에 있어서는 현재의 고립적 경향을 시정하여 모든 민주우방과의 친선과 협력을 증대하며 특히 국제연합과의 연계를 원활이 해서 북한 동포를 공산압제 정치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자유세계 전체의 단결력과 정치력을 강화하는데 우리들이 이니시어티브를 취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④ 국방에 있어서는 정병주의를 목표로 훈련을 강화하고 화력을 현대화하며 병무행정에 절대공정을 확보함으로써 장정의 입영기간을 단축하는 반면에 질적 향상을 도(圖)할 것이다. 특히 일반 사병의 대우와 급식을 개선하여 사기를 앙양시키며 또한 하급장교와 하사관 등 직업군인의 최저생활을 보장하여 후고(後顧)의 염려없이 군문에 복(服)할 수 있게 주력할 것이다. ⑤ 기타 내치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국민의 교양을 높이고, 품성을 향상시키는 것이 민주주의 향상의 근본이므로 의무교육과 성인교육의 확충에 주력할 것이요, 예술, 학술, 기타 문화면에 있어서 조성(助成)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그리고 종교 방면에 있어서는 쓸데없는 간섭을 배제하고 신앙의 자유를 절대로 보장 할 것이다. 그 밖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지면관계로 일일이 나열할 수 없으나 요컨데 본인은 부패된 관료정치를 근본적으로 혁신함을 당면 목표로 하고 진정한 자유와 민주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온갖 희생과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현재의 국민들의 고통을 덜고 나아가서는 후진(後進) 청년들에게 보람있는 민주정치의 가치와 전통을 물려주려는 것이 나의 단심(丹心)이다."



 이 장문의 입후보장의 변은 운석 선생의 현실인식과 정책의 골자가 무엇인지를 잘 웅변해준다. 먼저 선생의 현실인식은 당시 한국은 일인 장기 집권을 위한 헌정질서의 파괴와 경제적 독점의 심화로 인해 민주국가의 기틀이 흔들리고 국가경제가 파탄된 상태이나 현 정권에서는 개혁을 바랄 수 없기 때문에 정권의 교체와 새로운 정책의 시행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가 제시한 정책의 주 내용은, 정치면에서는 일일 장기집권의 저지를 위한 방안으로 당론인 내각책임제 개헌과 함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보장을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데, 경제면에서는 관권의 개입에 따른 부의 독점을 막아 민간 자율의 시장 경제체제의 발전을 도모하는 데, 외교면에서는 고립탈피를 위한 유엔과 서방 제국에 대한 외교 역량 강화와 국제적 협력을 증진하는데, 국방면에서는 복무기간의 단축과 장비의 현대화 및 처우개선을 통해 군사력의 질적 향상을 이루는데, 그리고 내정면에서는 민주주의 실현의 요체인 국민 의식 수준의 향상을 위한 교육과 문화 예술부분을 육성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한마디로 선생이 제시한 정책은 민주주의 체제의 확립을 위한 정치 · 경제적 토대의 준비와 국민의 의식 수준을 향상 시키는데 주안점이 두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당시 한국이 처한 정치 · 경제적 모순에 대한 국민의 정서에 부합하는 현실인식 위에 이를 개혁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한 민주당의 선거전략은 "못살겠다 가라보자"라는 선거 구호에 함축되어 국민들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못살겠다 가라보자"》

[이 구호에 얽힌 일화 한 토막을 운석 선생에게서 들어보자. "어떻게 해서든지 정권을 교체해야겠다는 생각은 우리의 철석같은 신념이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민주당의 이 구호는 바로 민심 그대로의 표현으로서 국민의 공감을 얻게 되었다. 이때, 민주당이 내걸 표어를 정하기 위해 당내에서 이를 모집하였다. 응모작이 무려 백여 개 나왔고, 구 중 가작 10여 개를 예심하여 중앙 상임 위원회에서 최종 투표를 결정하게 되었는데 이 투표에 당선된 것이 "못살겠다 갈아보자"였다. 아마도 조재천 민주당 대변인의 머리에서 나온 모양인데 이것이 바로 민심의 꾸밈없는 표현이었다. 이 표어에 대한 열화와 같은 국민의 인기가 그 것을 말해 주었다. 자유당측에서는 이 표어에 대해서 심한 반발을 보이기도 했다. 민주당을 지지했던 일반 국민들의 호응이 누구의 시킴이거나 사주가 아님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지마는 왜 민심이 미눚당과 함께 있었는가는 새삼스레 물을 필요조차 없다.]





《부통령 후보 장면의 홍보전단》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와 부통령 후보 장면의 홍보 전단》

[자유당 정권의 실정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면서 이를 개혁하기 위한 정책 대안의 제시를 통해 정권 교체를 호소
한 민주당 선거전략은 "못살겠다 가라보자"라는 선거 구호에 함축되어 국민들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신익희 대통령 후보와 장면 부통령 후보의 정견 발표회는 가는 곳마다 대성황을 이룰 정도로 민심을 파고들었다. 당시의 신문 보도를 보자. 4월 18일자『동아일보』는 "민주당에서는 지난 14일부터 부산, 대구, 대전 등의 순서로 '유세행각'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 '정견발표회'는 가는 곳마다 대성황을 이루어 일찍이 보지 못하던 선거민들의 일대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14일 개최된 부산에서는 청중의 쇄도로 연설장은 물론 인근 가옥의 지붕 가로수 할 것 없이 인파로 뒤덮여 일시 교통이 두절되는 형편. 15일 대구에서는  1백리 밖에서까지 모여드는 소동이어서 대구 탄생 이후 초유의 대성황으로 약 20만 명을 헤아릴 수 있었다는 정도. 16일에는 대전에서 개최하여 예정시간보다 2시간 이전에 벌써 장내는 만원이 되는가 하면 인근 골목길까지도 꼭 들어찰 정도록 신익희 장면 양 씨의 연설이 시작되자 청중은 종시 박수갈채로 환영일관"이라고 보도했으며, 5월 5일자에서는 "사상최대의 인파"라는 사진 설명과 함께 "20만의 청중 운집, 민주당 정견발표회 한강변서 대성황"이라는 표제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전군장병에게 고한다"라는 격문이 붙은 대군(對軍) 홍보전단》





《제2차 민주당 서울지역 정견발표회장인 한강 백사장에 모여든 인파들》

[당시 신문의 한 칼럼에는 "지상(地上) 최대의 쇼" 중에서도 "사상(沙上) 최대의 쇼"인데다가 "사상(史上) 최대의 쇼"라고 풍자하면서 한강 백사장(白沙場)이 "흑사장(黑沙場)"으로 변했다고 운집한 인파의 거대함을 묘사했다. 다음은 기사 내용. "5월 3일 하오 2시부터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민주당 후보 신익희 · 장면 양 씨의 정견발표대회에는 무려 20여만을 추산하는 청중이 모여들어 삼각지 이남에는 일시 차마(車馬) 통행이 두절되는가 하면 보트장을 중심한 강안(江岸) 일대의 백사장을 흑사장으로 뒤덮고 남은 군중은 마이크도 안들리는 건너편 흑석동 구릉과 인도교에까지 벌통에 벌 모여들 듯 들어붙어 교통경찰들은 교통정리에 총동원."]

"서울에서는 두 번째로 민주당 정 · 부통령 입후보자 신익희 · 장면 양 씨의 정견발표회가 3일 하오 2시 한강 모래사장에서 열리게 되자 개회시간 두 시간 앞서부터 시내 각처에서 모이기 시작하는 수많은 시민들로 모래사장을 꼬박 메워 청중수 추산 이십삼사만 말그래도 '지상(地上) 최대의 정견 발표회'로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이 날 한강으로 밀려드는 시민들은 도중에서 닥치는 대로 버스 전차를 집어타고는 '빨리가자!'고 호령호령… 때 아닌 손님들로 차안이 터져 나갈 듯 하자 영문도 모르는(?) 운전수들은 눈이 둥굴어진채 차를 몰아대는데…하오 1시경 '삑삑'소리도 요란하게 달려온 수많은 교통경찰들은 순식간에 남대문 앞서부터 서울력, 갈월동, 용산, 한강에 이르는 사이에 쭉 깔려 즉시 교통정리 차 '교통차단'에 착수. 먼저 노량진행 전차가 일제히 정거되고 이어 버스도 시종 스톱되고 말았다. 불퉁거리면서 차안에서 내려선 시민들은 계속 한강으로 한강으로 걸어나가 양쪽 인도 위는 대혼잡… 교통순경들은 이를 정리하느라 진땀을 빼기 시작. '벌써 시작했겠다' '빨리 가보자!'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러한 정견발표회라는 대규모 유세를 통해 국민들을 직접 파고드는 민주당의 선거전략이 주효해 커다란 호응이 일자이에 자극된 자유당 측도 이승만 대통령의 유세 계획을 세우는 등 바야흐로 정당정치의 시대가 개막되는 듯 했다. 다음은 "야당공세에 자유당 당황, 이 박사도 유세계획"이란 제하에 자유당측의 선거전략을 보도한 5월 1일자 『경향신문』의 보도.


"정 · 부통령 선거운동이 백열화함에 따라 자유당은 나날이  가중되는 야당측의 공세 앞에 당황상을 보이고 있다. 강력한 조직과 금력과 권력을 자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은 나날이 고조되어 가는 국민의 반대여론에 부딪치고 있으며 이러한 사태는 자유당으로 하여금 모종의 비상대책을 강구케 할 것으로 보인다…자유당에서는 이 박사가 직접 국민 대중 앞에 나서 그의 출마 이유를 말하고 또한 이기붕 씨에의 투표를 종용하면 농촌은 물론 세불리한 도시층에서의 지지표 흡수에도 중대한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전기 소식통은 말하였다."



《백사장 유세 때 신익희 대통령 후보의 유세장면》

[운석 선생은 백사장에서의 유세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해공 선생과 나의 정견발표 강연회가 가뜩이나 과로해 내려오신 선생의 심심에 크나큰 충동과 긴장을 주어 그것이 불행하게 된 원인의 일부분이 되지나 않았는가도 생각된다. 그날은 사실 우리의 예측보다도 엄청나게 더 많은 시민이 운집하여 유사 이래의 기록을 이루었든 만큼 선생은 고맙고도 기쁨을 억제 할 수 없어 벅찬 흥분과 책임감에 눌리는 것 같았다. 그날 선생은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연단 주변의 까마득한 청중들을 둘러보든 중, 인도교위와 강 건너 흑석동 강 안쪽의 새까만 군중을 뒤돌아보며 '운석 저기까지도 저렇게 많이 모여 있구려! 이 파도치는 진짜 민의를 누가 감히 막을 수 있단 말이오!' 하시며, 그날은 유달리 더 감격적인 장시간의 강연을 하셨다."



《1956년 5월 23일 치루어진 신익희 선생의 국민장 모습》

[5월 5일 서거한 신익희 선생의 장례가 18일 뒤에야 치루어진 이유를 운석선생에게서 들어보자. "5 · 15 선거의 날은 드디어 왔고 모든 유권자는 묵묵히 투표장으로 나갔다. 개표의 결과 서울을 위치한 전국 여러 주요 도시에서는 고 해공 선생에 대한 추모투표가 다른 생존하고 있는 입후보자들에 대한 투표수보다도 더 많았으니 세계 선거 사상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새 사실이 나타났다. 이것은 해공 선생이 얼마나 국민의 깊은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었는가를 입증하고 남음이 있다. 최후의 개표구였던 대구의 개표중단 사건에 대하여 이제 새삼스러이 하등 비판을 가하고 싶지는 않지만, 단 한 가지 해공 선생과 관계하여 다시 상기되는 것은 처음에 해공 선생의 장례를 선거가 끝나는 대로 거행하기로 하고 5월 17~18일까지는 선거결과가 완전히 발표될 것으로 예측하여 5월 19일로 결정하였던 것이 난데없는 대구 개표중단 사건으로 해공 선생의 국민장까지도 연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 해공 선생께 대하여는 너무나 죄송스러운 일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장례가 일시 연기되고 대구개표가 정당하게 완료된 후 5월 23일에 선생의 국민장이 수십만 동포의 참례와 전국민의 애도 속에서 엄숙히 거행되었다는 것은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



《사자후를 토하는 운석 선생의 유세장면》

[선생이 맨해튼 대학 시절 수강한 "수사학"과 "대중연설" 과목은 그를 논리 정연하면서도 때로는 사자후를 토해내는 명 연설가로 이름을 떨치는데 기여한 지적 자산이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5월 13일 "전국 유권자에게 호소한다"는 유인물을 통해 신익희 대통령 입후보자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운석 선생을 부통령에 당선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거점을 구축"하자고 호소하였다. 이 호소문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만일 이 부통령 선거에 있어서도 실패한다면 이 나라는 공포와 빈곤이 지배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 바라건대 전국 유권자 각위(各位)는 3 · 1 운동 정신으로서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그 초지와 소신대로의 투표를 과감히 단행함으로써 주권자인 국민의 엄정한 심판을 내리시어 이 나라를 구출하고 희망의 신천지를 개척하시기를!"]

 정책 대결과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일어난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갑작스런 서거는 한국에 있어서의 정당정치의 제도화 기회를 일순에 물거품으로 돌려버렸다. 그러나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없이 부통령 후보만으로 선거를 치루기로 결정하였으며, 민심은 운석 선생의 부통령 당선을 "민주주의 거점 구축"으로 규정한 민주당의 편에 섰다. 5월 15일 실시된 선거에서 운석 선생은 총 득표율 41.7%(4,012,654표)로 39.6%(3,805,502표)에 머문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를 20여만 표 차로 따돌리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운석 선생의 부통령 당선은 한국 정치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경향신문』이 번역 · 전제한 5월 28일자 TIME 지에 실린 "투표를 통한 반기"라는 제하의 5 · 15 총선 논평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남한의 노령의 강인형(强人型) 정치가 이승만 박사는 대통령에 3선됨을 원치 않는다고 언명한 후 결국 '우리 한국 인민의 요구에 의해서' 대통령에 입후보함을 승인하였었다. 그는 자기의 개인적 인기와 자기의 선거 조직체를 굳게 믿고 있었다. 81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명랑쾌활한 그는 선거운동의 마지막 수일간을 영화감상이나 또는 그의 마음에 맞는 설계로 된 서울에 있는 호화스러운 반도호텔에서 불결한 장소를 지적하는 등으로 지냈다. 이 박사가 전번 선거시의 대승을 반복하리라 혹은 더 좋은 성적을 내리라는 것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의 주적(主敵)인 민주당 대통령 입후보자 신익희 씨는 선거 운동 중 서거하였었다. 그의 단 한 사람의 도전자인 전 공산주의자 조봉암 씨는 암살의 협박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었다. 6명의 부통령 입후보자 중 신익희씨와 동일조였던 장면 박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 박사 지지를 공언하였다. 이 박사는 자신 있게 민의원 의장 이기붕 씨에게 공적 지지를 천명하였다. 사실로 이 박사의 반대파들은 전보다 일층 더 떠들어서 그를 공격하였으며 도시에서는 반 이승만의 소동이 있었다. 그러나 이 박사의 잘 조직된 경찰기구를 전복시킬것 같이는 보이지 않았다. 야당 선거 운동원들은 정부를 지지하는 폭력배들에게 박해를 받았었다. 그리고 도시에서나 지방에서나 전 남한을 통하여 4만 8천 명의 국립경찰은 공공연하게 이 박사와 이기붕 씨를 위하여 선거운동을 하였다. 이와 같은 이 박사의 이미 정해진 승리를 어찌 막을 수 있으랴? 선거일에 9백여만 유권자의 94% 이상이 남한의 6,342개소의 투표소에 참집(參集)하여 인주 칠한 대롱으로 투표용지에 기표하고 투표함에 투입하였다. 투표지는 신익희 씨 사망전에 인쇄되어서 그의 이름이 그대로 박혀져 있었다. 불상사도 별로 없었으며 토표자들에 대한 간섭도 증명된 경우는 없다. 밤에 들어가면서 큼직한 생나무의 투표함은 그 내용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승만 박사에게 고통스러운 결과임을 증명하였다. 도시와 지방에서 다 같이 퍼져나간 반항에서 남한의 인민들은 이 박사와 그의 정부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 박사는 물론 재선되기는 하였지만 그의 생애 중 가장 낮은 율을 - 간신히 투표자의 반수를 조금 더 얻었다. 고 신익희 씨는 약 백오십만 표의 특이한 유령표를 득표하였었다. 개표에 있어서 진실로 놀라운 사실은 이 박사가 지지한 부통령 입후보자가 이 박사의 강한 적이며 건장하고 유화한 인상을 주는 장면 박사에 의해서 낙선된 사실이다. 그는 미국식 이름으로 '죤. M. 장'이라 불려지고 있으며 한 때는 이 박사의 친우였으며 전 주미대사였었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장면 박사는 조심성 있게 안전지대로 피신하였었다. 돌연 대구에서 계표(計票)가 중단되었고 반대파들은 이 박사가 선거표를 도둑하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 박사의 고전은 물가앙등과 정부의 "사바사바"  ·  무능력한 시정(施政)  ·  경찰의 야만성  ·  극심한 빈곤 등에 대한 남한의 누적적인 불만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충격을 받고 노한 이 박사는 처음에는 개표결과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었었다. 주말에 이르러 피로하고 단념한 그는 "나는 장 박사가 당선된 것으로 믿는다"라고 언명하였다. 그가 이렇게 언명하자 긴장은 현저하게 완화되었다. 부통령으로 당선된 장박사는 "그것은 시기에 맞는 현명한 조처다. 우리 둘은 잘 화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대단히 강력한 반공주으ㅟ자이며 나도 또한 그렇다. 그도 나와 같이 크리스천이다"라고 말하였다."



《운석 선생 제4대 부통령에 당선되다》

[5 · 15 총선 결과를 게시하는 집계판 앞에 모인 군중들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

 


《"제3대 대통령 취임식 및 광복절 기념식"현판이 붙은 중앙청 앞 행사장》

['제 4대 부통령 취임'을 알리는 글자는 취임식장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은 운석 선생이 말하는 “부통령에 당선된 후에 받은 구박과 설움”. “8월 15일에 있은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내외 귀빈을 소개하던 이 박사가 좌석의 밑단까지 모두 소개하면서 부통령인 내 소개는 빼놓았다. 남산의 국회 의사당 기공식에 내외 귀빈들의 좌석은 모두 준비되었는데 부통령에게는 청첩까지 보내고도 막상 가보니 좌석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시청 앞에서 부통령 공판까지의 도로 포장만 제외되는가 하면, 외국 귀빈들의 부통령 면회는 여러 가지로 방해까지 하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고, 아시아 반공 연맹 회의 때 왔던 외빈들이 나를 예방하려 할 때에 관례적으로 제공해 주기로 된 자동차도 내주지 않아, 그들이 스스로 자동차를 구하거나, 호텔에서 순화동 공관까지 걸어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나마 부통령 공관에 드나드는 사람을 일일이 감시하고 귀찮게 굴어, 내 친척들마저 출입에 큰 곤란을 당했다.





《부통령 취임식장의 운석 선생》

[다음은 부통령 취임식장에서 의도적 홀대를 당한 운석 선생의 회상기. “1956년 8월 15일, 그 날은 나 개인으로서나 내가 속해있는 민주당으로서나 또 나를 선출해준 국민으로서 감격적인 날이면서 한편으로는 무한히 불쾌한 날이기도 하였다. 사실 그 날은 민권의 승리를 확인하면서 관권의 승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율배반적인 날이었다. 나는 그날 국민의 초라한 한 대표로서 정․부통령 취임식전에 참가했던 것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그 날은 결코 대통령의 취임만을 위한 날이 아니고 부통령의 취임도 동시에 행하는 정․부통령취임의 날이었다. 그렇지만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고위층과 주한 외국사절들의 좌석은 정중히 마련되어 있었음도 불구하고 그 날의 주인공의 한 사람인 새 부통령이 앉을 자리는 뚜렷한 위치에 놓여있지 않았었다. 이 사소한 듯한 고의적인 처사는 이승만 정권이 장차 민주당출신 부통령을 어떻게 처우할 것인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예시한 도전적인 서두였던 것이다. 그날 나 장면에게 취임사를 할 기회를 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이미 명약관화한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미리 기초해 두었던 다음과 같은 취임성명서를 발표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성명서는 국민들이 모두 읽어주었을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요약해서 그 일단만을 되풀이하기로 하겠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의 선출로 불초 이 사람이 오늘 부통령의 중직에 취임하면서 스스로 책임이 중대함을 느끼는 동시에 이번 선거에 있어서 국민제위께서 갖은 고난을 무릅쓰면서 우리 민족의 민주주의 정신을 내외에 선양하여 주신데 대하여 깊은 존경을 드리며 감명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과 더불어 민주정치의 발전과 기본민권의 수호를 위하여 분투할 것을 다시 한번 굳게 결심하는 바입니다…’ 이와 같은 취임사를 발표하였다. 정․부통령취임식전에서 취임사를 할 수 없었던 심정을 이제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