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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2. 부통령 시절 : 민주주의 수회의 정신적 지주로 우뚝 서다.(2)


2) 민주주의의 보루 순화동 공관

 운석 선생의 부통령 당선은 선생이 투표를 통한 국민의 심판을 받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부상하였음을 보여준느 사건이자 고령의 대통령 유고시 권력 승계해 집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이유때문에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선생은 헌법에 의해 규정된 부통령의 지위 즉 참의원(參議院) 의장과 탄핵재판소 재판장 및 헌법위원회 위원장으로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 당하고 말 그대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만 머물 수 밖에 없었다. 명목뿐이었던 4년간의 부통령 생활에 대한 선생은 토로한다. "정부의 부원수인 부통령의 직책을 국민으로부터 수임받고서 4년간 엄격히 말해서 3년 8개월간에, 나는 먼저 국민의 고난의 승리로서 주어진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국민의 생활향상을 위해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한편 조국의 민주화와 민권수호, 정치악 제거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는 하였으나 이승만 독재정치로 말미암아 이렇다 할 만한 효과도 거두지 못하였던 것을 쓸쓸하게 생각한다"고. 선생의 항변을 조금 더 들어보자.

"국민들도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부통령에는 헌법으로 명문화된 세 가지 중요한 직무가 있다. 첫째는 참의원 의장으로서 국민의 복지를 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입법을 담당한 기관의 장으로 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둘째는 탄핵재판소의 장으로서 행정부의 모든 요인의 비위를 규탄하고 그것을 견책할 권한이 있는 것이다. 셋째로는 헌법위원회 위원장의 직책을 가지고 행정부의 위헌적인 처사를 심판하고 법의 준수와 헌법의 수호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헌을 예사로 할 뿐 아니라 자기의 독단 정치를 강행하는데 필요한다면 언제라도 헌법을 자의로 뜯어고치던 이승만 정권은 고의로 참의원의 구성을 천연(遷延)시켜 야당 출신 부통령의 권한을 박탈하고 말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예로서도 경향신문 폐 · 정간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헌법위원회 구성이 불가피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방법으로 그 구성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참의원의 구성이 불가능하게 되어 그나마도 부통령으로서 국민에게 봉사할 기회는 전적으로 박탈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정말 부통령이란 유명무실한 허수아비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선생은 이승만 정권의 탄압 하에 재임 4년간 "유명무실한 허수아비"로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암살 기도 등 폭력에 굴하지 않고 정부에 대해 지속적인 정책 대안 제시와 비판을 통해 정부의 독주를 견제하는 한편,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당을 수권 능력을 갖춘 정당으로 육성하는 중심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국민들에게는 무너지지 않는 민주주의 의 보루이자 꺼지지 않는 민주주의의 상징적 횃불로서 우뚝 섰던 것이다. 즉, 선생은 "민주 보루를 사수하기 위한 병사로서의 민권 수호를 위한 한 시민으로서", "민주주의를 위해 생명을 바칠" 각오 하에 국민들이 자신에게 부여한 임무로 다음을 자임했다. "정부의 제이인자(第二人者)라는 위치에서 국민의 권리옹호를 위해 끝까지 싸우라는 명령임에 틀림없으며, 또 가능한 한에 있어서 이(李) 정권의 독재홛의 길을 저지하는 국내외 여론의 근원지가 되어달라고 다짐한 것이 분명하였다. 즉, 야당을 이끌고 나가는 한 사람으로서 독재정권의 행정부를 견제하는 모든 권한과 능력을 동원하여 정부 내에서의 투쟁을 감행하는 유일한 민주근거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추임한 지 한 달 조금 더 지난 1956년 9월 28일 자유당 정권에 의한 암살 기도를 가까스로 모면한다. 당시 암살 기도가 있다는 정보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전당 대회에 참석했던 운석 선생은 저격범 김상붕이 쏜 권총에 왼쪽 손에 관통상을 입는 테러를 당한다. 다음은 선생이 들려주는 당시 상황,
 내가 최고위원의 한 사람으로 있는 민주당 전당대회가 있는 바로 그날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이미 이런 흉모(凶謨)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나의 공적인 회합장 참석을 조심성 있게 만류하는 동지들도 있었으나 나를 당선시키느라 신명을 걸면서까지 혈투한 천여 명 당원동지들이 일당에 모여 전당대회를 하는 마당에 동지들의 노고를 위로하며 격려의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라도 모험을 하면서 출석 아니하지 못할 심경이었다. 또 국민의 선봉에 서서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싸움에 나서려는 각오뿐이었기 때문에 그 때의 그 대회에 나갔던 것이다. 역시 입수된 여러 가지 정보 그대로 그리고 벌써부터 예측했던 그대로 독재정권의 테러단은 암살계획을 실천에 옮겨 드디어 시공관(市公館) 복도에서 저격을 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손에 부상을 입었을 뿐 생명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정도로 제 일차 저격을 당했던 거이다. 이는 오로지 천우신조와 당원동지들의 민첩한 보호에 의한 것이며 나아가서는 전국민의 전폭적인 정신적 지원의 은택이라고 생각한다." 




《저격 직후 왼쪽 손에 관통상을 입은 운석 선생》

[선생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비서관 이성모. 선생은 저격 직후에도 단상에 다시 올라 주변을 안심시키는 등 평정심을 잃지 않고 위급한 상황에 대처한 거인이었다. 다음은 당시 선생의 의연한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다는 박순천의 회고담. "우리 민주당 전당 대회는 해공 선생을 잃은 슬픔과 장 박사님의 부통령 당선이란 기쁨이 엇갈린 가운데 시공관에서 열렸다. 당시 장 부통령께서는 이미 이 박사와 자유당으로부터 같은 박해와 천대를 받아왔고 들어오는 정보마다 장 박사님을 해치려 한다는 험악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최고위원들이 모여 그분이 참석하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모았고, 그분 역시 나가서 자기를 위해 피나는 수고를 해준 동지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고 싶지만, 자유당 측에서 자기를 살해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다는 정보를 참작하여 부득이 나가지 않겠다고 우리에게 사전양해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런대 대회진행 중에 장 박사를 뵙고 싶다는 부산 대표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나오셨던, 장 박사님이 하단하여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에 저격을 받으셨다. 저격을 받고 다시 단상으로 올라오신 박사님을 보고, 나는 놀랐다. 저격을 받은 손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러나 선생은 안면근육을 조금도 찌푸리는 기색을 보이시지 않았다. 저격을 받기 전의 표정 그대로였다. 나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의 힘이 이렇게 위대한가? 종교의 수양이 장 박사님으로 하여금 이렇게 위대 하게 했는가! 하고 나는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때의 그 표정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저격 후 명륜동 자택에서 요양 중인 운석 선생과 문병객》

[운석 선생의 전당대회 참석을 종용했던 전당대회 사회자 곽상훈의 회고담. "운석은 몸이 불편해서 나오지 못한다는 절갈이 왔다. 나는 이를 곧 장내에 알렸다. 그러자 한 청년이 벌떡 일어나면서. '우리가 피흘려 뽑아드린 부통령이신데 과히 불편치 않으시면 잠시 나오셔서 얼굴만이라도 보여주십시오.' 나는 그 지방당원의 간절한 말에 너무나 감격했고, 또 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당선이 된 것이니 의당 그러는 것이 도리라 생각되어 즉시 부통령 관저에 기별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운석이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여보 왜 안 나오고 그러오? 안색도 괜찮은데.' '나야 왜 안 나오고 싶겠소만, 그동안 좋지 않은 소문도 있었고 해서, 마침 삼연이 기별을 하기에 이렇게 나왔지.'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총성과 함께 밖으로 나가던 운석이 저격을 당했으니 말이다. 총회를 마치고 집에 가서 보니 그는 두툼한 요 위에 누워 있었다. '이봐 운석 명당을 썼구려!' 나는 농담 비슷이 말을 했지만 속으로 어떻게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저격 사건 관련자 이덕신 등에 관한 논고 요지》

 당시 이 저격사건은 김종원 치안국장과 이익홍 내무장관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 공화국 당시에 속개된 재판에서도 이들을 심판하지는 않았다. 이미 선생은 이 대통령에 보낸 서한에서 "세 죄수가 나 개인과는 하등의 숙원이 없고 극형을 받으면 나로서는 심통(心痛)과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으니 관대한 처분이 있기를 충심으로 바란다"고 밝혔으며, 실제로 총리 시절 이 사건의 배후를 철저히 파헤치는 대신 이들을 감형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다음은 운석 선생의 회고. "범인은 곧 체포되고 연루자도 구속되어 처벌은 일단락지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는 정치테러였고 배후조종자가 엄연히 있다는 것은 과거의 예나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명백한 일이지만 모든 것이 정치적 흑막에 가리운 채 아직까지도 노정되지 않고 있다. 나는 새각했다. 저격범과 직접 관련자는 다만 무지하다는 죄가 있을 뿐, 오히려 가엾은 사람들이었다고. 가증스러운 것은 그렇게 하면서까지 독재정권을 키우려는 그자들이라고. 그리하여 나는 한 인간으로서 그 불쌍한 죄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선량한 시민으로 되돌다 갈 길을 주기 위해 그들 범인들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대통령에게 청했던 것이다."

[ 운석 선생의 인간됨의 넓이와 깊이는 이 테러 사건 관련자들에게 보인 선생의 관용과 사랑의 실천에서 그 빛을 발한다. 1957년 7월 5일 저격 사건 관련자 김ㅁ상붕, 최훈, 이덕신(성동 경찰서 사찰계 형사주임)은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해 11월 1일 형이 확정되자 선생은 다음날인 11월 2일 이 대통령 앞으로 서한을 보내 이들에 대한 감형을 요청하였으며, 자신이 집권한 2공화국 때 이들에 대해 감형 조치를 내린다. 사형수 최훈은 선생이 5 ·16 군사 구테타 이후 칩거하던 1965년 7월 27일 속죄와 보은의 감사편지를 띄운다. 이 편지에는 운석 선생이 보여준 사랑과 관용의 정신이 "부모에게조차 효도한 기억이 없던"저격범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우변한다. "박사님께서 이 글을 받으시는 순간 박사님은 9년전 9월 28일과 또 수배부(手背部)의 총상을 살피실 것입니다. 그러나 박사님의 은혜를 못 잊어 조석으로 박사님을 위해 기원하는 한 생명이 이 땅 지붕 아래 살아 있다는 점만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귀하다는 생명마저 빼앗겼던 저희들에게는 의외의 4.19가 일어나자 그해 10월 1일 박사님의 관대하신 은총으로 생명이 부활되었고 국민들의 저주하는 싸늘한 바람으로 떨고 있던 저희들에게 또 그해 12월 박사님께서 친히 오셔 건네주신 따뜻한 털내의로 몸을 녹여가며 살아온 불초(不肖) 소인은 하루라도 박사님의 그 은총을 잊을 수가 없었읍니다. 부모에게조차 효도한 기억이 없는 제가 왜 조석으로 박사님의 온정을 못 잊어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박사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사상을 친히 시범하신 사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탓입니다." 1966년 1월 6일자 최훈의 편지는 "이 달에 아뢰올 말씀은 그간의 종교관념을 새해와 더불어 꺠끗이 청산했습니다. 이는 박사님의 편지를 받은 후 반년 이상이나 신중히 연구한 소산입니다. 이제 이 근방의 주임신부님을 곧 만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여 운석 선생이 최훈과의 편지 교환을 통해 그의 영혼을 구제하는 신앙을 갖게끔 종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최훈의 거듭남은 거인(巨人) 운석 선생이 살아온 삶의 향기를 느끼게 하는 하나의 작지만 진실된 증언이 아닐까?]





《저격범 최훈이 보낸 참회의 봉함엽서》

[당시 총을 쏘았던 김상붕은 사건이 일어난 지 30년이 지난 1987년 목사가 되어 있었다. 한 잡지사의 주선으로 운석 선생의 3남 장익 주교를 만나 운석 선생의 인품을 회고한 김상붕 목사는 당시의 배후세력과 그들이 저격을 사주한 이유를 이렇게 증언한다. "저에게 저격을 사주했던 사람들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권세당당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내무부장관과 치안국장을 비롯 일선 경찰서의 사찰과장도 끼어 있었죠. 그들은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위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55년의 3대 정·부통령 선거 때 대통령으로는 여당의 이승만 박사가 당선되고 부통령으로는 야당 출신의 장면 박사가 당선되었기 때문이죠. 이 박사는 그 때 80이 넘었는데, 주치의들 말이 3년을 넘기기가 힘들다는 거였어요.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의 유고시 부통령이 그 권한을 승계한다고 명시되ㅓ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만의 하나 대권이 야당으로 넘어갈까 두려워 한 거죠"라고. 운석 선생도 알고 있었다. 이 암살 계획의 정점에는 선생의 제거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이기붕이 있었다는 것을. "사건은 미리부터 조작된 거야. 자유당 그네들이 마지못해 야당 인사를 부통령으로 인정하는 체 하면서 틈만 있으면 제거해버릴 계획을 짜고 있었던 모양이야. 모모 인사들이 모이기만 하면, '시간 문젭니다. 장 부통령만 제거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미리부터 모의가 있었다는 거야. '눈의 가시'인 나를 제거하고 이기붕 씨를 등장 시키려는 음모였지. 시공관 저격사건은 만송과 직접 관련이 있었어. 그것이 사실로써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지."]




《2공화국 총리 시절 (1960년 12월 12일) 저격범 김상붕을 교도소로 찾아간 운석 선생》
 이런 까닭에 저격사건 이후에도 운석 선생은 계속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이어지는 선생의 증언을 들어보자. "시공관에서의 저격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자 음모자들은 나의 집 모퉁이에 트럭을 대기시켜 놓았다가 내가 탄 차를 밀어버려 자동차 사고를 가장한 암살을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이러한 암살 위협에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이상임을 몸소 보여주는 희망의 상징으로 존재하고자 노력했다. 선생은 말한다. "이러한 악질적이고 소연해지는 음모가 계속적으로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여러 가지를 신중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명감이나 진실된 신념을 떠나서 다만 인간적인 욕망만으로써 정계에 투신하였다고 하면 모르되 민주주의 전진을 위한 하나의 병사로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바에는, 그리고 국민들이 모든 탄압과 싸우며 나를 선출해 준 것을 생각해서, 그런 암살음모 따위에는 개의치 않고 항상 민중의 대열의 앞장에 서서 독재정권과 싸워야 할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앞섰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공개집회장에 나타남으로써 민중을 고무하고 민중과 더불어 행동해려고 하였다. 한편, 또 생각할 때 국민이 나를 부통령으로 선출하고 민주당을 지지해 준 것은 정부 내에 민주거점을 확보해 놓아야 한다는 신념에서인 것이 틀리없으며 불초한 이 사람이나마 하나의 상징으로 해서 조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상실치 않으려는 간절한 염원의 표시임도 잘 알고 있었다"고.
 운석 선생은 1956년 11월 13일 암살을 모면한 지 두달 뒤에 명륜동 자택에서 순화동 부통령 관저로 이사한다. 이후 선생은 "근 4년간 순화동 공관을 민주 투쟁의 본거지로 하여 꾸준히 민주당의 성장과 민권의 수호를 위한 일에만 전념"하였다.



《명륜동 자택》
[1937년 8월에 신축 · 입주한 이 주택은 주미대사, 부산 피난, 그리고 부통령 재직시를 제외하고는 선생과 함께 한 삶의 터전이었다.]



《민주 투쟁의 보루 순화동 공관》

[1959년 11월 28일 민주당 5차 전당대회 및 정 · 부통령 지명대회 참석 경상북도 대의원들의 순화동 공관 방문 기념 사진, 당시 "창살없는 감옥"에 비유되곤 했던 순화동 공관은 민주주의 수호의 보루이자 성지로서 방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물론 순화동 공관은 자유당 정권의 감시와 견제 때문에 선생은 "요시찰 제 1호에 해당되는 취급을 당해야 했기 때문에... 함부로 나를 찾아보러 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정부 청사인 부통령 공관을 민주당의 공식적인 중요 회담 장소로 정하여서 반독재 투쟁의 본거지로 하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또한 순화동 공관은 민주주의 사수의 보루만은 아니었다. 그곳은 운석 선생이 민의를 직접 전해 듣고 만나는 국민들에게 언제나 열려 있던 열린 공간이었다. 그의 민중관 즉 국민관을 들어보자. "올바른 정치의식의 원천은 민중들 속에 뿌리 박고 있다. 민중이 걸어가는 길은 확실히 밝은 세대의 행진인 것이다. 민중의 각기 행복한 터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들이 갖는 각각의 의사를 모은 총체는 가장 행복한 표적이 되는 것이다. 정치가는 이러한 민중의 의사를 통합하고 총체로서 결론 짓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방안을 꾸미고 실천단계로 옮기는 일꾼인 것이라고 본다. 민중의 소리를 잘 알아듣는 정치가는 위대할 것이요, 그 나라는 부강해질 것이다. 이 천리는 누구나가 잘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나는 모든 내 문호를 개방하였다. 비록 대상이 한낮 초부(樵夫)일지라도 나는 그들의 육성(肉聲)을 들어서 그들의 말을 확인하여야 할 무거운 책임이 있다. 민주주의 밑에서는 장막(帳幕)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한 개인이 자기의 의사를 발표함에 구애됨이 없어야 할 일이고, 그 말을 듣는 데 주저라든가 장애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나 자신이 아무리 그러한 장막을 걷어 제친 양 국민의 여론을 듣고 국민생활의 실정을 알아본다고 하여도 직접적인 면접과 실제적인 목격이 없어서는 도저히 실정을 파악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때문에 우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장막을 제거하고 국민의 목소리와 표정을 직접 보아야만 할 것이라는 데서 부통령 공관의 문호를 국민들 앞에 개방하는 것이다."
 나아가 선생은 운석 선생은 저격사건 후 자신의 심경을 밝힌 글에서 블길이 번지는 초원에서 병아리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깃털 속에 병아리를 보호한 어미 닭의 이야기를 예화로 들며 국민의 권리를 대변하기 위해 자신의 신명을 바칠 것을 다짐한 바 있다.

 "이 글을 쓰고 앉았음에 불현듯 아득한 태고의 신화한 토막이 머리에 떠오른다. 참으로 이 신화의 의미가 얼마나 큰 의의를 가졌는가 하는 것을 새삼스러이 느껴진다. 그 때에는 아무런 구속도 제압도 없는 시대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가금으로 사양되는 닭이 그 때에는 넓은 광야, 또는 산으로 살던 시대니까…어느 풀숲 속에 닭이 알을 품고 있었다. 며칠인가 시일이 지난 다음 병아리가 제대로 깨어 나왔다. 도대체 닭이 병아리를 품고 앉은 그 모습이란 퍽이나 평화롭고 자비로운 모습일 것이다. 그지없는 사랑의 모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병아리로 치면 그것 역시 귀엽고 조용한 자태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평화로운 풀숲이 그 닭과 병아리로 하여 이루어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선가 뜻하지 않았던 불이 광야의 풀숲에 일어났따. 이른바 요원(遼原)의 불길이었을 것이다. 어미 닭과 병아리의 갈 길이 없었던 것은 두 말 할 나위도 없었다. 어미 닭과 병아리는 그 세찬 불의 홍수가 지나 간 다음 광야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은 타버렸다. 그 타버린 잿더미 속에는 어미 닭의 사체도 있었다. 이렇게 황량해진 광야에 어떤 행인이 지나가다가 언뜻 눈에 띠인 어미 닭의 사체를 보고 그 타버린 사체를 들어보았다. 거기에는 하나의 놀라운 이적이 발견되었다. 까맣게 타 버린 어미 닭 나래죽지 속에서 병아리들이 살아서 튀어나온 까닭이었다. 어미 닭은 그 무서운 불길 속에서 병아리들을 자기의 몸으로 보호하였던 것이다. 실로 인간의 정신을 초월하고도 남음이 있는 갸륵한 어미 닭의 소행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나는 이 신화를 말하는 의의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 이 세대에 처한 정치가나 일반 국민이나 모든 사람들이 이 어미 닭과 같은 정신을 스스로 배워야할 것이라고 믿는다. 때는 이미 이러한 신화가 신통해 지고 신화의 교훈을 체득해야 할 세대가 되었음을 나는 한스럽게 생각한다. 일부 정치가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부패하였고, 말할 수 없는 도탄 에 국민 생활은 위기에 처하여 있는데 일부의 인사들은 사리(私利)에 혈안이 되었음을 알고 있는 바, 더욱 이 신화가 그들에게 주는 의의 크다고 본다."

 선생은 말한다. 정치가란 “민중의 의사를 통합하고 총체로서 결론 짖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방안을 꾸미고 실천단계로 옮기는 일꾼”으로서 타오르는 불 속에서 병아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어미 닭과 같은 정신을 갖아야만 한다고 말이다.


《1958년 5월 2일 치러진 4대 민의원 선거 직후 한 자리에 모인 신 · 구파 인사들》

[신 · 구파 사이에는 민주당 창당시부터 갈등의 소지가 자라나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갈등은 1959년 민주당 구파가 신파를 배제한 채 자유당과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한 일이 알려지면서 증폭되었다. 즉, 구파의 조병옥과 유진산이 중심이 되어 자유당 온건파와 각각 5명의 협상단을 뽑아 20여 차례의 모임을 통해 동년 4월초에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권력을 나누는 절충형의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비밀계획은 언론에 포착 보도되면서 흐지부지 되어버렸지만, 이 개헌안이 부통령직의 폐지를 규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파는 구파에 대한 정치적 동반자 관계에 대해 희의하기 시작했다. 즉. 신파는 "구파는 신파를 깨기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자유당과 손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당혹함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고, 이는 양파간의 균열이 커지는 데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러면 3․15 부정선거에서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기까지 선생이 걸어 간 길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제 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한 구파와의 균열의 원인에 관한 선생의 분석은 이러하다.


"이제 제 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59년 10월 26일, 민주당으로서는 입후보자 지명 대회를 열게 되었다.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 박사와 함께 러닝 메이트로 선출되기까지에는 약간의 잡음이 당내에서 떠돌았다. 소위 신․구파의 세력 다툼이 조금씩 고개를 들게 된 슬픈 사실이다. 실제적으로 민주당 내의 신․구파 문제는 창당 시에 이미 그 씨가 배태(胚胎)되었던 것이다. 민주당이 결성될 무렵에 한국 민주당의 후신인 민주 국민당은 국회에서 15석밖에 차지하지 못하여, 당시 그대로는 도저히 야당의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이 민주 국민당이 발전하여, 대(大) 야당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신진들과 합세하여 신당을 결성해야 할 운명이었다. 또한 민주 국민당 이외의 분산되었던 야당 의원들도 자유당에 맞서기 위한 새로운 정당의 결속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때였기 때문에 자연 민주 국민당과의 단합이 쉽게 되었다. 모두가 대여 투쟁에 합심한다는 대의(大義)밑에 결속한다면 별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양자의 주장은 충분한 융합을 보지 못했고, 상호 주장의 일치점을 찾지 못한 채 양세력이 민주당이라는 신당에 우선 집결되었던 것이다. 한민당 계열의 민주 국민당에서는 자기들이 새로 창설되는 민주당의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민당은 해방 직후부터 결성되어 거의 10년 간 성장해 온 것이고, 정치적 경륜이 뛰어난 데가 있다고 자처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한민당 계열의 주장은 골수에 박혀 요지부동이었다. 한편 새로운 세력으로 민주당에 가담하게 된 소위 신파측에서는 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신파측에게는 지방적인 지주 세력에 기반을 둔 한민당 계열의 주장과 노선이 일치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좀더 개방적이고 혁신적인 기운을 원했던 것이다. 한민당 계열의 보수세력은 국민의 신망을 차츰 잃어가고 있었다. 국회 의석이 줄어들지 않았던가? 좀더 근대화한 정계풍조를 조성하여 신진을 규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세력이 민주당의 일선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독재에 투쟁한다는 대의 밑에 이 양세력이 단합은 되었으나, 쌍방간의 어긋난 견해는 끝내 일치를 보지 못했다. 이것이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민주당 내에 자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운석 선생은 구파와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균열이 민주당의 해체로까지 이어지지 않게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양보와 타협의 미덕은 1959년 10월 26일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석상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민주정치의 본령을 보여주었다. 이 때 대통령 후보지명 투표의 결과 484대 481의 3표차로 박빙의 리드를 보인 구파의 조병옥이 후보 지명을 수락하지 않으려 하자, 선생은 “한표가 더 많아도 조 박사가 다수결로 지명받았으니 수락해야 됩니다. 나는 그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니 협력해서 일합시다. 나는 부통령 입후보 지명을 기꺼이 받겠습니다”라고 하여 타협과 양보라는 민주주의의 진수를 보임으로써 당을 분열의 위기에서 구해냈으며, 선생 자신은 대표최고 의원 투표에서 조병옥을 70표차로 제치고 당선되는 명예를 일구어내는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959년 10월 26일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 후 대통령 후보 지명자 조병옥을 축하하는 운석선생》

[당시 양보의 미덕을 통해 민주당을 분열 위기에서 구한 운석 선생의 회고를 들어보자. “전당 대회 겸 정․부통령 후보 지명 전국대회를 치르고 난 뒤, 우리 두 사람, 즉, 유석과 나는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심정으로 당의 결정에 복종하여 당원의 감정 수습과 당론의 통일에 힘써 차기 선거의 필승을 기해 더욱 굳게 결속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또 다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신병 치료차 도미하는 조병옥 대통령 후보를 배웅하는 운석 선생》

[다음운 운석 선생의 회고담. "선거전이 한창 치열할 무렵인 1월 19일 유석은 기자 회견에서 "앞으로 입원할 생각은 없으며,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선거 유세에서 한 시간 반 정도는 연설할 자신이 있다. 장(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입원할 생각은 없으며, 수술 진단 운운은 모르는 일이고, 의사로부터 통고받은 바도 없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1월 22일 조 박사의 주치의는 기자들과 회견하고 "조 박사의 그 위장에 관한 X선 시현(示現)으로 인하여 개복 수술을 즉시 실시할 것을 요한다"는 요지의 진단서가 발표되어, 1월 29일 "잘 다녀오겠오"라는 말을 남기고 도미했다. 1월 30일 월터 리드 육군 병원에서 처음엔 수술 성과가 좋아 2월 22일경에는 퇴원할 수 있고, 월말경에는 귀국할 수 있다는 희보를 전해 왔으나, 2월 15일 돌연 급서의 소식이 전해왔다.]




 그러나 선거를 통한 국민의 심판을 받아 정권을 교체함으로써 정당정치의 확립을 도모했던 운석 선생과 민주당의 노력은 대통령 후보 조병옥의 급서라는 불상사로 인해 4년전에 이어 다시 한번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선생은 당시의 참담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1960년 2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일을 한달 앞두고 나는 또 기구한 운명을 맞이했다. 복부 수술차 도미했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가 서거(逝去)했다는 비보였다…나는 선거에서 두 번씩이나 러닝 메이트를 잃는 정말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1956년 제 3대 정․부통령 선거 때에는 선거일 열흘 전에 해공 선생이 돌아가는 비운을 당했고, 이번 또한 조 박사가 이국에서 불귀(不歸)의 몸이 되니, 가위 얄궂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민주당은 4년전 선거와 마찬가지로 대통령 후보없는 반쪽 짜리 선거를 치루어야만 했다. 더구나 대통령 후보를 잃은 구파가 선거를 포기하는 바람에 운석 선생은 조병옥 후보의 국민장을 치룬 2월 25일 이후에야 신파의 지원만으로 어려운 선거를 치러야했으며, 이에 더해 선생의 부통령 당선을 막으려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 책동은 형용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무차별적인 것이었다.




《1960년 2월 1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 급서 보도》




《"조병옥박사 급서"를 알리는 『한국일보』호외》





《1960년 2월 29일 부산 중앙국민학교에서 열린 정견 발표회에 모여든 청중》

[당시의 부정선거를 획책한 자유당 정권의 동향을 말하는 운석 선생. “민주당에서 대통령 입후보를 다시 지명하여 선거에 임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이 대통령의 4선은 거의 확정된 셈이었다. 대통령 선거전에서 일단 한숨 돌린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 씨를 당선시키기 위해 철저한 부정 선거를 준비했다. 제3대와 같은 패배의 전철을 다시 밟을 수 없다는 듯이 의기 양양했다. 3월에 접어들면서 자유당 측에서는 본격적인 부정 선거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사전에 입수되었다…여당과 정부에서 부정 선거에 대한 세밀한 계획 아래, 이 부정 선거 지령을 실시하는 데 있어서 방해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유혈을 사양하지 말라”는 엄한 명령을 내려놓은 것도 우리는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 무엇을 말하랴.“]



《1960년 3월 5일 서울 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정견 발표회에 몰린 20만 청중》



《1960년 3월 10일 장호원 읍사무소 앞 유세 장면》

[선거 지원차량에 붙은 홍보 포스터에 대통령 후보 조병옥의 사진이 지워진 모습이 눈에 띤다.]



 《1960년 3․15 선거를 앞둔 어느 날 전국의 거리에 뒤덮혔던 “구국항일동지회”라는 유령 단체 명의의 포스터

[군국주의 일본의 강압통치가 맹위를 떨치던 1940년대 동성 상업학교의 교장이자 천주교를 대표하던 위치에 있던 운석 선생은 일제가 동원한 조선지원병제도 실시 축하회에 참석하고,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위원회에 이름이 오른 일이 있다. 그러나 이는 민족의 미래를 담보할 교육 현장의 보호와 가톨릭 교단에 가해질 박해를 막기 위해 개인적 굴욕을 인내하며 행한 ―친일파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한 연구자도 “굳이 ‘죄질’을 구분한다면 소극적인 부일”이었다고 평할 정도로―불가피한 일이었다. 자신의 명예를 지킬 것인가? 자신을 희생해 민족을 위한 미래 투자인 교육 현장과 교단을 보호할 것인가? 어찌 보면 일신의 명예를 지키는 길은 더욱 쉬운 길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운석 선생은 말한다. “선거일에 임박해서 어느 날 아침 길에 나가 보니 전주와 벽에 무수한 사진 포스터가 나붙었다. 자세히 보니 내가 어느 일본 군인과 함께 박은 것인 양, 어느 사진사를 시켜서 내 얼굴을 딴 사람의 몸에다 접붙여서 마치 내가 친일파라는 인상을 주려고 꾸민 모양인데 이것이 통행 금지 시간에 전국에 일제히 나붙은 것으로 보아 철저한 계획 하에 기관원을 동원하여 붙인 것만은 틀림없다. 수법치고는 가장 치졸하고 야비한 것이어서 자기들이 의도한 효과를 거두기는 고사하고, 국민의 조소를 자초한 역효과밖에 안 났다”고.]


 3․15 선거에서 자행된 자유당 정권의 부정행위는 선거 당일 민주당이 선거 포기와 원천 무효를 선언할 정도로 극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세기간 운석 선생에게 보여준 국민적 지지는 자유당 정권을 불안하게 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즉 2월 28일에 열린 대구 유세에서 수성천변에 운집한 인파가 20만이었고, 이어 부산(2월 29일) 6만, 전주(3월 2일) 3만, 목포(3월 3일) 1만, 광주(3월 4일) 4만, 서울(3월 5일) 20만, 천안(3월 8일) 5만, 그리고 공주․조치원(3월 9일) 2만의 청중을 동원했다. 그러나 개표 결과는 이승만 대통령 후보가 9,633, 376표를, 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8,337,059표를, 그리고 운석 선생이 1,843,758표를 얻어 이승만과 이기붕이 당선되었으며, 선거 당일 3월 15일 밤 부정선거에 분격한 시민들의 분노는 마산에서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산궐기와 부정선거를 비난하는 신문을 보는 운석선생》


3․15 마산 궐기를 보도한 16일자 『 한국일보』
[“선거사상 초유의 불상사”, “투석하는 수천 군중에 경관 발포” 라는 제목이 눈에 띤다. 당시 공시적으로 사망 7명, 부상 72명의 인명 피해와 21명의 구속자가 집계되었다.]

 

 




《1959년 11월 25일 순화동 공관을 찾은 김대중 민주당 인제 지구당 위원장, 사진의 맨 왼쪽》

[운석 선생의 순화동 공관은 향후 한국의 민주주의 성장에 기여한 인문들의 산실이기도 하였다. 김대중 현 대통령은 운석 선생의 3대 부통령 입후보 때부터 인연ㅇㄹ 맺었고, 선생의 대자로 가톨릭에 입교하여 당시 민주당 중앙 상무위원으로 있었다. 김대중 현 대통령이 199년 『대한매일』에 기고한 서면 증언에서 위와 같은 선생의 회상에서 제기된 두 가지 중요한 문제 - 구파와 신파의 정치적 입장의 차이점과 4 · 19 혁명 발발에 끼친 민주당의 역할- 에 대해 일치하는 증언을 하고 있다. 먼저 전자에 대해 그는 "당시 신파는 구파에 비해 개혁적이었고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더 철저한 면이 있었습니다. 실제 이승만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해서 신파는 매우 강하게 투쟁했고, 이 점에 있어서 구파 하고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4 · 19가 일어날 무렵 구파는 대거 자유당에 입당했고 신파는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더욱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라고 회고했으며, 후자에 대해 "4월 6일 민주당이 중심이 된 시위가 있었습니다. 시청 앞에 모여 을지로 4가와 종로, 그리고 파고다 공원과 광화문을 거쳐 다시 시청으로 돌아오는 시위였습니다. 이것이 4 · 19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운석 선생의 회고록 초안에는 취임에서 4 · 19 혁명에 이르는 부통령 시절을 이렇게 묘사한다. "부통령이라기보다 야당 영수(嶺袖)로 이대통령의 독재와 부패에 대항하여 4년ㄴ간 활동. 구파에서는 은밀히 자유당과 내통하여 막후타협을 하고 있었으므로 자유당과 싸운 것은 민주당 내 신파었다. 2 · 4 파동 - 국회의원 감금 만행 등 - 의사당으로 농성의원 위문격려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경고안이 나오는 등 사건 연발, 포악무도한 이 정권과 줄기차게 투쟁해 온 단체는 민주당 하나뿐이었음. 3 · 15선거, 조[병옥] 박사 급서. 단독 선거유세 강행. 자유당의 부정선거 계획을 사전 폭로. 과연 예정대로 부정선거 시행. 민주당 의원들 국회에서 선거 뮤효를 선언하고 대 시위. 마산 사건 당시 순화동 공관에서 긴급회의 열고 민주당 이ㅡ원 및 의사 급파. 수난 중의 시민을 위한 격력. 서울에서 민주당 의원 및 당원 대 시위. 4 · 19 학생 시위로 형세 급전. 이 박사의 하야를 촉구하기 위하여 부통령 사임. 이 박사 사임. 4 · 19 혁명은 대학생이 성취한 것이나 그때까지의 혁명 기초를 마련해 준 것은 민주당의 다년간 투쟁의 성과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투쟁의 참모본부는 순화동 공관이었다."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전개한 "선거 무효선언"과 침묵시위를 보도한 1960년 3월 18일자 『동아일보』(上)》

《민주당 민권수호 공명선거 추진위가 주동이 되어 서울 거리에서 전개한 데모를 보도한 4월 6일자 『동아일보』(下)》


《김주열 군 사체 발견과 마산 시위의 재연을 보도한 4월 11일자 『동아일보』호외》
 

 1960년 3월 18일자 『동아일보』는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전개한 "선거 무효선언"과 침묵시위에 대해 "국회 민주당 소속의원 50여 명은 18일 상오 국회에서 3 · 15 정 · 부통령 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총퇴장하여 10시 18분부터 10시 28분까지 약 10분간 의사당 앞에서 서린동에 있는 민주당 의원부 연락처에 이르는 4백미터 거리를 도보로 행진하면서 무언의 데모를 행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또한 4월 6일자 『동아일보』는 민주당 민권수호 공명선거 추진위가 주동이 되어 전개한 당일의 데모에 대해 "3 · 15 선거의 불법과 무효를 외치며 마산 사건 원흉의 처단 및 재선거를 호소하는 데모가 6일 상오 서울에서 감행되었다. 민주당 민권수호 공명선거 추진위 등이 주동을 이룬 이날 데모는 경찰당국이 적극적인 방해를 회피하였던 까닭에 연도에 늘어선 수십만 서울 시민의 소극적인 지지를 얻어 계획한 코스를 따라 큰 사고의 발생이 없이 강행진이 단행되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러한 민주당의 부정선거에 대한 조직적인 항의 데모는 4· 19 혁명 발발의 중요한 도화선으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 4월 11일자 『동아일보』호외는 3월 15일 시위 당시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벌어진 "11일 밤 6시부터 마산시엔 미증유의 중대사태가 발생 11시 현재 확대일로에 있다"는 급보를 전하고 있으며, 4울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데모에 이어 전국적인 4 · 19 혁명으로 폭발하였다.



《4월 6일 민주당 민권수호 공명선거 추진위가 주도한 시위대 행렬 (上) 》

[ 상위 사진은 시청 광장에서 을지로 쪽으로 출발하려는 시위대의 전열, 가운데 확성기 앞에 작은 플랭카드를 들고 있는 사람이 당시 민주당 선전부 차장 김대중, 오른쪽은 시민들의 합세로 불어난 광화문 통과시의 시위대 행령, 김대중 현 대통령은 당시 " 그 시위에서 저는 앞장 서 휴대용 마이크로 구호를 선창하는 입장이었고, 정부는 내무장관 포고령으로 발포도 불사한다는 위협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던 비장한 심정이었습니다. 시위가 시작되자 정부는 방침을 바뀌어 진압보다는 시위대가 군중과 합세하지 않도록 격리하는 데만 주력하였고 파고다 공원 앞에 오자 학생들이 시위대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오자 학생들은 경무대 쪼긍로 가려고 해 시위를 주도하는 우리와 약간의 실랑이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전개된 그날의 시위가 4 · 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4월 18일에 일어난 고대생들의 국회의사당 앞 시위 모습 (下) 》

[ 운석 선생은 4 · 18 고대생 시위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마산에서 비롯한 민중의 외침이, 서울서는 4월 18일 고대생의 데모로 점화되었는데, 이 며칠 전 야당 의원들의 농성 투쟁과 대규모 데모가 있었다.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가 여기서 처음 나왔다. 이것은 서울에서의 고대생 의거에의 선도라고도 할 수 있다. 도화선에 불을 지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4월 18일 데모를 끝내고 귀교하는 학생들을 깡패들이 습격한 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고, 연일 데모가 발생하게 된 것은 자연적인 울분의 폭발이었던 만큼 아무도 이를 막을 자가 없었다"고. ]



《 "전 대학생 총궐기"라는 제하에 4 · 19 혁명의 발발을 대서특필한 1960년 4월 19일자 『조선일보』》
[ 경무대 앞의 대치를 보도한 사진이 당시의 격력함을 잘 보여준다.]



《아! 4 · 19 혁명》

 첫번째 사진은 " 민주주의를 사수하자"라는 플랭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온 동성 중고등학교 학생들, 두 번째 사진은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를 최루탄과 소방 호스로 제지하는 경찰, 세 번째 사진은 태극기를 들고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네 번째 사진은 시위대에 발포하는 경찰.]





《 부상 학생을 위문하는 운석 선생》

 제 2공화국은 4 · 19 혁명에 편승해 정권을 얻은 취약한 정권이었나? 운석 선생은 항변한다. 마산 궐기에서 4 · 19  혁명에 이르는 과정에서 민주당은 무임승차한 것이 나이었다고. "역사적으로 그 전례가 없는 주권 박탈의 부정 선거가 실시 된 그날 저녁, 마산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민의 데모가 발생하여 경찰서를 습격하는 사태까지 빚어냈다. 이는 자연적인 폭발이요, 민심이라는 급류가 굽이친 한 표현이다. 그러나 민주당이라는 야당 세력이 줄기차게 부정과 톡재에 싸웠기 때문에 민심이 이에 호응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 19 학생 혁명도 민주당의 대여 투쟁이 길을 닦아 놓은 기반 위에서 이룩된 위대한 의거였던 것이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당 억압하에서 몇 해를 두고 줄기차게 대항했던 민주당원들은 가산을 탕진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매맞아 병신이 되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  한 예는 전남 여수 민주당 재정부장 김용호(金容鎬)씨는 선거 운동 중 괴한에게 피습되어 1960년 1월 9일 밤 드디어 절명했다. 국민은 민주당의 이러한 투쟁사를 옳게 인식해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민주당이 정권욕에만 급급했고 4 · 19 혁명을 맞아 노고 없이 정권을 쥐제 되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본다. 4 · 19 학생 의거가 직접적으로 독재를 무너뜨린 것은 사실이다.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피를 뿌리며 헌신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4 · 19 학생 혁명이었다. 그러나 학생들로 하여금 부정과 싸우는 의거의 바탕을 마련해준 여러 해에 걸친 민주당의 공로도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한마디로 운석 선생은 부통령 재임 시절 부통령이기 이전에 야당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공관을 "참모본부"로 하여 독재와의 투쟁을 선두에서 지휘했으며, 이러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선생이 전개한 투쟁의 성과가 4 · 19 혁명에 이르는 민주주의 회복의 도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환언하면 제2공화국은 4 · 19 혁명에 "무임승차'해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다. 운석 선생이 이끈 민주당 정권,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파 정권은 3 · 15 부정선거로 정당정치에 의한 정권 교체의 가능성을 막아버린 자유당 정권의 불의에 항거해 4 · 19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최전선에서 독재의 부당함을 온 몸으로 항거함으로써 민주주의 실현에의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유일한 정치세력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민주당 정권은 4 · 19 혁명의 이상을 현실에 실현할 책무를 자임할 의무와 권리가 있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