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毛允淑, 여류 시인)
신앙인을 접촉하는 “독립당”
이미 고인이 된 장 박사의 인간상을 되새겨 보자면 해방 후 외교 무대에서 활약하던 시절로 돌아가야 될 것 같다.
1948년 9월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 총회에 장면 박사를 수석으로 하여 정일형(鄭一亨), 전규홍(全奎弘), 장기영(張基永), 김우평(金佑坪), 김활란(金活蘭) 씨 등이 우리 나라 대표로 나갔다. 나는 마침 뉴욕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 대통령으로부터 유엔 총회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파리로 달려가 그분들과 합세했다.
내가 도착해 보니 우리 나라가 유엔에서 독립 국가로 정식 승인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중대 문제로 미국과 소련은 벌써부터 심각한 기색을 보여 냉전 아닌 설전의 도가니에서 파리는 떠들썩했다.
소련의 외무 장관 비신스키는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 대표인 덜레스 씨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갖은 만행을 자행했다. 한국이 유엔 승인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단순한 문제라기보다도 자유 진영 대 공산 진영의 심각한 각축전이었다. 자유 진영의 회원국이 소련 블록의 3분의 1 세력에 비해 월등히 많았으나, 그때만 해도 ‘코리아’라는 존재가 국제적으로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아서 외국 대표들을 일일이 설득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대표들은 파리 시가에서도 좀 한적한 분위기가 감도는 팔레 데 돌세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우리는 장 박사의 지시에 따라 각기 외국 대표들을 만나 한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누누이 호소하기에 바쁘고 힘든 일과를 보냈다.
더구나 장 박사는 자주 덜레스 씨 등을 만나는 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를 쓰느라고 식사도 제대로 못할 형편이었다. 식사라면 극히 간단한 우동이나 자장면으로 했다. 잠자리는 늦게 드시면서 새벽이면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성당에 가서 새벽 기도를 드렸다. 장 박사는 우리 옆방에 계셨지만 우리와 생활 보조를 맞추기에는 너무나 생활을 초월한 분이어서 우리는 장 박사를 ‘독립당’이라고 불렀다.
밤낮으로 외교 활동에 여념이 없는 ‘독립당’에게 이따금 찾아오는 방문객이 있다면 유럽 각국의 신부나 수녀들이었다.
“글쎄 정치하는 분이 이상해라. 웬 신부, 수녀들만 끌어들일까…?”
나는 김활란 여사와 푸념 아닌 넋두리를 털어놓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평소에 너털웃음 한번 웃어 보는 일이 없는 빈틈없는 성격이어서 남다른 인격자로 알려진 장 박사이고 보면, 독실한 신앙인으로 많은 외국인 신도들과 접촉하며 큰 활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힘이 컸던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무릎이 아팠던 새벽 미사
우리 대표단은 12월 12일에 상정될 한국 문제를 앞두고 득표 공작을 벌이는데 장 박사를 중심으로 총력을 기울였다. 우리는 특히 유럽 계통과 남미 각국을 납득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는데, 그들은 대개 흥정에 가까운 모종의 바터제를 조건부로 제기하기가 일쑤였다. 가령 쿠바 부통령이 당시 유엔 대표로 참석했는데, 장 박사에게 설탕을 자기네 것으로 사 달라는 부탁을 내세워, 우리는 무조건 그러겠다 하고 대신 승인을 부탁했다.
이런 방법을 써 가면서까지 득표 공작을 하고 있는 사이에 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12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11일 밤 파리의 날씨는 몹시 사나웠다. 비가 마구 퍼붓는 파리의 하늘 밑에서 국운을 걱정하며 밤을 지새야 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리는 장 박사 주위에 모였다.
“그동안 수고들 많았소. 오늘은 편히 쉬고 내일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총회에 참석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내일 아침 새벽 3시에 하느님께 기도드리러 성당에 가는데 누구 동반할 사람 없겠소?”
장 박사는 우리를 향해 물었다. 그러나 지쳐 버린 우리는 누구 한 사람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 내가 3시에 전화를 걸 테니 같이 갈 사람은 따라 나오도록 하시오.”
아니나 다를까. 3시 정각에 전화 벨이 울렸다. 나와 함께 동숙했던 김 여사가 먼저 받더니 몸이 좋지 않아 못 가겠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장 박사의 성의에 감복하여 불편을 무릅쓰고 따라갔다.
12일 새벽 3시 비가 멎은 파리의 날씨는 좀 추웠다. 파리 시가는 적막에 잠겨 있고, 지나가는 자동차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네온 사인이 명멸하는 거리를 걸었다. 우리의 머리 위에 다시 보슬비가 내리는가 싶다.
“미스 모, 이렇게 동반해 주니 참 고맙소. 새벽에 기도드리는 습관을 가지게 되니 마음도 시원해지고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되오.”
장 박사는 세인트 조셉 성당에 가는 길에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분을 새삼 우러러보게 되었다. 조셉 성당에 들어서자 촛불이 켜진 성모상 앞에 경건히 무릎을 꿇고 기도의 세계에 몰입되었다. 30분이 지나도 장 박사는 기도를 계속했다. 다리가 아프기 시작한 나로선 고통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깊은 세계에서 몰아의 경지를 맛보고 있는 듯한 엄숙하고 또 성스러운 표정으로 기도를 드리는 장 박사는 거의 1시간 만에야 일어섰다. 그 1시간이 장 박사에게는 오히려 짧은 시간이었는지 몰라도 생전 처음 성당에 와 본 내겐 적잖은 부담을 안겨 준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세인트 조셉 성당을 나왔을 때도 날은 아직 채 밝지 않았다. 나는 그냥 호텔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요 근처 아베 마리아 성당이 있는데 우리 거기 가서 한 차례 더 미사에 참례합시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나는 그만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장 박사님, 전 무릎이 아파서 도저히 따라가기 힘들겠어요.”
“미스 모, 그래 큰일을 눈앞에 두고 그것도 못 참아 어떻게 하오?”
나는 그분의 인격에 다시 눌려 한 5백 미터쯤 떨어져 있는 아베 마리아 성당으로 따라갔다. 이젠 나도 감복되어 무릎의 고통이 없이 반 시간 이상이나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12월 12일의 먼동이 터 온다. 9시에 개최되는 총회를 앞두고 다시 장 박사가 명령을 내린다.
“각국 대표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다시 찾아가 확인합시다. 최후의 승리를 확보해야 합니다. 대한 민국의 운명은 우리의 쌍견(雙肩)에 얹혀 있습니다. 자, 어서!”
유일 합법 정부 47표
마침 3시에 총회장으로 들어가 보니 전날 밤만 해도 새벽 3시까지 덜레스와 비신스키가 격렬하게 싸웠다는 소식으로 뒤숭숭했다. 그들은 피로했다. 우리도 피로하다. 그런 피로 가운데 한국 문제가 의제로 채택되어 토론에 들어가자, 장 박사는 잠을 못 자 푸석하게 부은 얼굴로 덜레스 씨와 자꾸만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매우 실감 있는 외교적 활약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에 있은 한 가지 에피소드를 공개해야겠다. 비신스키는 단상에 올라갈 때마다 덜레스 씨를 야비한 언사로 욕을 하다가 드디어는 ‘독재자의 큰 개’라고 하면서 한국 정부를 마구 비난하는 한편, 입에 담지 못할 험구를 터뜨렸다. 덜레스 여사로 말하면 신사 숙녀의 풍토에서 온 연약한 여인에 불과했다. 그때 그녀는 참다 못해 나를 붙들고 울먹이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대체 한국이 어떤 나라기에 우리 집 사람이 저토록 욕을 먹으면서까지 일해야 한단 말이오. 잘하고 못하고는 둘째 셋째로 치고, 전세계 대표들 앞에서 저토록 욕을 먹어야 하다니 한국도 너무하오.”
“덜레스 부인, 덜레스 씨가 단순히 한국 문제만 갖고 싸우고 계시다고 생각하시면 오해일 겁니다. 지금 저희 나라 문제는 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의 문제가 아니고 전 자유 진영의 중대한 문젭니다. 덜레스 씨는 위대합니다. 그 점을 유념해 주셔야 합니다. 덜레스 씨는 지금 자유 진영을 대표해서 싸우고 계신 거랍니다.” 나는 울고 있는 그녀를 위로하기에 애썼다.
드디어 한국 문제의 찬반을 가리는 투표에 들어갔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장 박사는 덜레스 씨와 더욱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각국 대표들의 의석으로 찾아가 그들과 악수를 나누는 등, 최후의 일각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장 박사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되었다. 47표! 우리의 첫 외교 활동은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우리 대한 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서 유엔의 정식 승인을 얻은 것이다.
장 박사의 부지런하고 피나는 노력과 종교인으로서의 확고한 신념에 힘입은 바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때 장 박사는 멋진 신사로, 독실한 신앙인으로 그리고 탁월한 수완을 가진 국제 외교관으로 손꼽히고 있었으니 한국의 뛰어난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완전한 신념의 사람
그 뒤 약 1년 만에 장 박사를 미국에서 다시 뵙게 되었다. 1949년 11월의 일이다. 그때는 조병옥 박사를 수석 대표로 하여, 정일형 박사 같은 분들과 함께 참석하게 되었는데, 주미 한국 대사 장면 박사는 자주 외교계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뉴욕 유엔 총회에서도 미·소 양대 진영의 싸움이 격화되고 있었으며, 자유 진영과 결탁하여 일해 나가는 데 있어서 장 박사의 위치는 퍽 확고한 데가 있었다. 주미 대사직에 있는 장 박사는 주말이면 꼭 뉴욕에 와서 우리 대표단을 뒷받침해 줬다. 여러 가지로 마음 든든한 일이었다.
그 무렵 한번은 내가 워싱턴에 간 일이 있다. 마침 장 박사가 쓰는 주미 한국 대사의 전용차에 타게 되었는데 나중에 운전수 얘길 들으니까 “워싱턴에서 장 박사 차에 여자가 타 보기는 처음입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 박사는 워싱턴에서 독신 생활을 하고 계신 중이었다. 본국에 가족을 두고 혼자서 생활을 하는 중인데, 워싱턴 외교계에서 독신주의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고 있는 터였다. 물론 외교관으로서 조금도 허술한 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생활인으로도 늘 모범적으로 성실했기 때문이다. 역대 외교관 중에서 한국인으로 가장 높이 평가를 받은 분의 한 사람인 줄 믿게 되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장 박사는 뚜렷한 믿음에 입각하여 모든 일을 해 나갔다.
그때 외교관 생활이 어떠했느냐 하면, 이 대통령이 달러 정책에 다시없이 인색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긴축 재정 제1인자였으므로 해외에 가 있는 외교관들은 실제로 적지 아니 곤궁했다. 외교관들의 가족 동반까지도 억제했던 시절이니까 장 박사로서도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씀드리기를 “박사님, 부인이 안 계셔서 어떻게 여러 가지로 불편하시겠습니다” 했더니, “뭐, 그럭저럭 지내기가 괜찮소”라면서, 좀처럼 내색하려 들지 않는다.
“이번에 귀국하는 즉시로 제가 이 박사께 말씀드려서 사모님이 와 계시도록 할까 하는데요….” “그럼 돌아가거든 한번 말해 주시오.”
유엔 총회의 일을 다 끝낸 후 우리 대표단은 모두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후 이 대통령에게 여러 가지 외교 활동에 대하여 보고한 끝에 장면 주미 대사에 대한 외교적 활동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그리고 내조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나는 이 박사를 설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 뒤로 장 박사가 잠깐 귀국할 틈이 있어 부인을 동반하고 다시 외교 무대로 나설 수 있었으니 다행스런 일이었다.
장 박사는 신앙심이 충만하고 원만한 인간성을 가진 한편, 내심에 예술성이 매우 강해 외유 내강한 분이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무슨 계획한 일을 하려면 모질게 해치우는 강인한 점에서도 그렇다. 누구나 본받을 점이라고 본다. 특히 인간 면에 있어서 자기가 자기를 매섭게 컨트롤하면서 일상 생활에서 남다른 행복감을 느꼈던 분이고, 그것을 정치에 반영시키고자 무진 애를 쓴 분이다.
이제 그 아까운 인걸은 저 세상으로 갔다. 나로선 다만 장 박사와 같이 완전한 신념의 소유자라야 완전한 정치를 하고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마지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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