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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채록 · 회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그 후 4] 나의 스승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그 후 4] 나의 스승들 "저 같은 사람은 신부될 자격이 없습니다"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신학교에 들어간 나를 거둬 사제로 키워준 고마운 스승들. 왼쪽부터 공베르 신부, 게페르트 신부, 장면 박사. 누군가 내게 한 평생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을 묻는다면 '신부가 된 것'을 꼽겠다. 소신학교 은사인 공베르(Gombert Antoine, 1875~1950) 신부님 말씀마따나 신부는 되고 싶다고 되고,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게 아니지만 여러 모로 부족한 내가 사제품을 받은 것은 일생 일대의 축복임에 틀림없다.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고 했다. 나도 인생 여정에서 많은 스승을 만났다. 특히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신학교에 들어간 나를 거둬 신부로.. 더보기
회고 - 민주주의의 씨앗 (현석호) 현석호(玄錫虎, 전 국방 장관) 국제 신사의 면모 장 박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어느 미국인이 인물평을 한 것을 먼저 적으려 한다. 그것은 장 박사가 서거한 후 외국인이 베푼 어느 파티에서였다. “닥터 장의 정치적 역량은 외국인인 나로서는 어떻다 평하기 어려우나,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한국에도 그런 젠틀맨이 있는가 하고 놀랐습니다. 우리 미국에서도 그런 젠틀맨은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 미국인은 짧은 말로써 정확히 표현했다. 사실 장 박사는 국제적인 젠틀맨이었다. 그분이 서거한 후 많은 인사들이 “점잖은 분”, “인격자”라고 평했다. 나도 더없이 훌륭한 분이라고 한마디하고 싶다. 내가 장 박사를 안 것은 민주당을 창당할 무렵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알기는 했었지만 직접 교분은 없었고, 다만 외교관으로서.. 더보기
회고 - 언행 일치의 인물 (한근조) 한근조(韓根祖, 전 민의원) 머리말 장면 박사의 별세는 우리의 예상보다 빨라 많은 사람들이 더욱 슬퍼했다. 한번 더 봉공(奉公)시켜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나, 또는 왜 장면 박사와 같은 양심적인 인물이 우리 사회에서, 더욱이 우리 정치 사회에서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떠돌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학우의 한 사람으로서, 또 정치적 동지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장 박사의 언행을 될수록이면 많이 뽑아 기록하여, 그 전기의 말미에 붙이고자 한다. 학창 시대 수원 농림 학교 학생 시절의 장 박사는 홍안의 미소년이라기보다, 도리어 백안 무구(白顔無垢)의 순수한 소년이었다. 마음도 순수하고 외양도 순수하였다. 그래서 학우들은 물론 선생들까지도 한일인(韓日人) 할 것 없이 모두가 좋아했다. 그러나 장 박사.. 더보기
회고 - 성실을 지킨 정치인, 장 박사와 나 (주요한) 주요한(전 부흥부 장관) 부통령 개인 성명서 도맡아 장면 박사와 처음 인사를 나눈 것이 1951년 겨울인가, 부산 임시 수도에서였다. 국무 총리로 임명되어 미국서 귀임한 장 박사를 상공 회의소 주최로 환영하는 석상에서였고, 첫인상이 세련된 신사형이요, 성실한 인격자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마는 비서를 시켜서 전해 오기를 영문으로 한국 정부의 정책 노선과 대미 외교에 관한 각서 형식의 글을 써 보라는 부탁이 있었고, 무어라고 썼는지 지금 기억이 잘 안되나, 하여간 몇 조목 써서 보냈는데 잘되었다고 만족하게 생각한다는 소식을 간접적으로 들었다. 그러나 그 후 부산서는 장 박사와는 다시 접할 기회가 없었고, 1952년 여름 서울 환도 후 나는 경향 신문 논설 위원으로 일보고.. 더보기
회고 - 외유 내강한 신념의 인간 (조재천) 조재천(曺在千, 전 법무부 장관) 존경과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분 그것은 1950년의 일이다. 6·25 동란으로 전세가 한참 불리하여 정부가 대구에 와 있다가 다시 부산으로 피난해 간 뒤의 일이었다. 당시 대한 민국의 사실상 영토는 경상 남북도의 각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경상 북도 지사로 있었는데 장 박사는 국무 총리로서 초도 순시차 대구에 왔으므로 비로소 뵈옵게 되었다. 장 박사에 대한 첫인상은 말이 적고, 근엄하면서도 인자한 분이라는 것이었다. 첫눈에 신사이면서도 성실한 인간됨을 알 수 있었다. 눈부신 외교 활동을 해 온 분이란 것을 나도 알고 있었고, 신앙에 철저한 분이라는 것도 들어서 짐작은 했으나, 막상 그분을 직접 만나 뵈었을 때 존경심과 친근감을 느꼈던 것이다. 몇 해 후, 내가.. 더보기
회고 - 초인적인 외교 역량 (장기영) 장기영(張基永, 전 대한 중석 사장) 유엔의 한국 승인 1948년은 우리 나라가 유사 이래 처음 국회를 연 해이지만, 밖으로는 한국이 유엔에서 독립 정부로 승인받은 중요한 해이기도 하다. 당시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 총회 한국 대표로 수석에 장면 박사, 차석에 나, 그리고 위원에는 조병옥, 정일형, 김활란, 모윤숙, 김우평, 전규홍, 김준구 등 제씨로 구성되어 참석하였다. 12월 12일, 소련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유엔 한위(韓委)를 1년 간 존속할 것이 결의되고, 한국의 승인안이 제출되기는 이보다 앞선 12월의 일이었다. 그동안 한국 승인안이 상정되기까지 장면 박사의 활약은 눈부신 것인 동시에 눈물겨웠다. 유엔 정치 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여 많은 대표로부터 박수 갈채와 지지를 받았다... 더보기
회고 - 박애의 정치가, 내가 모신 10여 년 (이홍열) 이홍열(李泓烈, 전 장 박사 비서) 조용한 귀공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철저한 민주주의의 신봉자 여기에 가다.” 허탈감에 빠진 나에게 감회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평소에 무척 존경하고 믿었던 어른이 갑자기 가시니 눈앞이 캄캄하고 허무한 감뿐이다. 중태에서 신음하시던 박사님을 뵈옵고도 현대 의학의 권위와 기적이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던 나의 유일한 소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박사께서 가시는 마지막 길에 영광이 깃들이기를 기원하며 비통에 잠길 틈도 없이 철야하다시피 장례 준비에 전념하고 있는 이때, 원고 청탁을 받고 옛 일을 잠시 돌이켜보니 새삼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장 박사를 모신 지 10여 년, 너무 크고 깊고 넓어서 그 어느 한 모퉁이도 부여잡을 수 없다. 장 박사의 치적은 널리 세상에 알려.. 더보기
회고 - 불멸의 의지 (이귀영) 이귀영(李貴永, 전 장 박사 경호 책임자) 5·10 총선이 맺어 준 인연 오랜 경찰 생활을 통해서 가장 뚜렷이 기억에 남고 또 감격과 울분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직한 것은, 장면 박사를 모셨던 3년 남짓한 기간의 일들이었다. 해방 이듬해에 내가 동대문 경찰서 경무계장으로 근무할 때 그분은 우리 관할인 동성 중학교에 교장으로 계셨다. 그 뒤 종로 경찰서에 전직 중에 5·10 총선거를 맞았다. 당시의 선거 분위기는 살벌했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온갖 폭행과 치상이 횡행하였고 좌익 계열의 책동도 엄청났다. 나는 이런 갖가지 정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하여 동분 서주했다. 장면 박사는 마침내 관할 지역인 종로구에서 출마하였다. 평소부터 그분을 존경해 오던 나는 그분의 신변 보호에 유달리 신경을 썼다. 내가 바랐던.. 더보기
회고 - 대채로운 업적 (윤형중) 윤형중(尹亨重, 신부) 고난의 길 앞장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장면 박사는 모범적인 신앙인이었다. 양친이 다 독실한 신자였고, 그러한 가정에서 자란 장 박사 역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일반의 사표가 되었다. 약관에 벌써 확고한 신앙인으로서의 품격을 갖추었던 모양이다. 기미 3·1 운동을 전후하여, 그는 서울 용산 신학교의 선생이었다. 그때의 신학교라면 마치 교도소와도 같은 분위기였다. 장 박사는 일본 말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그러나 일본 말만 가르치는 선생은 아니었다. 외부 사회와 격리된 신학생들에게 3·1 운동의 진상을 들려주었고 암암리에 민족혼을 고취했다. 장 박사 나이 20여 세였다. 그가 신학교에서 가톨릭 신자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게 된 것은, 일찍이 일본인 소학교를 다녀 매우 .. 더보기
회고 - 장 박사 선종기 (유수철) 유수철(柳秀徹, 혜화동 본당 신부) 굳은 신앙인 장면 박사를 처음 안 것은 1932년 내가 동성 학교에 입학했을 때 이지만, 그분을 좀더 잘 알기 시작한 것은 내가 철이 좀 들기 시작할 3학년 때 박사님께 영어 회화를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처음에는 여태까지 다른 선생님들께 배워 온 것과는 전혀 다른 발음에 어리둥절했지만, 이것이 진짜 영어 발음인가 보다 생각하였다. 다른 선생님들보다 특이한 인상을 주었으며, 싫증 안 나고 재미있게 가르치시고, 점잖고 어딘가 침범할 수 없는 위엄을 느끼게 하고, 열심한 교우 선생님으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우리가 5학년 졸업반이 되던 해, 박준호 교장께서 별세하시어 장 박사께서 후임 교장이 되시고 신임 교장으로서 우리에게 첫번째 졸업장을 수여하신 일은 지금도 잊혀.. 더보기
회고 - 장 박사의 건강과 나 (유병서) 유병서(兪炳瑞, 의학 박사) 내가 부족하나마 장 박사님을 모시고 그분의 건강 문제를 돌보아 드리기 시작한 것이 어언 10년이 되었다. 그전에도 내가 현재 살고 있는 혜화동에 근 30년 간을 살았고, 그분도 이웃에서 수십 년 전부터 사셨기 때문에 그때부터 뵈었고, 늘 존경하고 지내면서도 그분의 건강이 나쁘지 않아서 별로 찾아뵙지 못했다. 4·19 직후의 공백기에 그분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보아드리기 시작한 것이 줄곧 작고하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성실한 교육자였고, 양심적인 정치가였으며, 또한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장 박사께서는 매사에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건강에 대해서도 굉장히 꼼꼼하셔서 의학에 대한 상식도 웬만한 의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자세하게 알고 계셨다. 그래서 자신의 건강 상태도 당.. 더보기
회고 - 교육가로서의 운석 (유동진) 유동진(柳東璡, 전 경전 사장) 일인(日人) 교무 주임을 내쫓은 배짱 내가 동성 학교로 교사직을 얻어 가기는 1931년 9월로 기억된다. 당시 장 박사는 서무 주임이었는데, 내가 들어간 해 4월엔가 평양 교구에서 일을 보다가 왔다고 한다. 동성 학교는 애초에 염천교 건너 만리동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어물 객주업(魚物客酒業)을 하던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교명을 소의(昭儀) 학교라 했다. 방규환(方奎煥) 씨가 초대 교장으로 들어서면서 ‘소의 상업’이라 고치고, 다시 갑종 상업으로 승격하면서 남대문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남대문 상업이라 했다. 운영 관계로 박준호(朴準鎬) 씨와 의논하여 학교 운영권을 가톨릭 재단으로 넘겼고, 그 후에 동성(東星)으로 개명하여 지금의 혜화동에 옮긴 .. 더보기
회고 - 민주 투사 운석 (오위영) 오위영(吳緯泳, 전 무임소 장관) 7천 불로 운영한 주미 대사관 나는 공적인 정치성을 떠나 개인적으로 장 박사와 깊은 친교는 없었지만, 6·25를 전후하여 한때 비교적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내가 장 박사와 가까이에서 자주 만나게 된 것은 1949년 전후의 장 박사의 국회 의원 시절이었다. 그때 한두 번 말날 때마다 우리는 서로 가볍게 인사만 할 정도지 그 이상의 깊은 관계를 가지지는 않았다. 당시의 장 박사는 언제나 말끔한 양복을 입어 외모가 단정할 뿐더러 수려한 용모는 지성미와 함께 외국인 못지 않은 신사의 멋을 느끼게 했다. 당시의 대통령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던 장 박사는 초대 주미 대사로 부임하여 외교관으로서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1949년 내가 신탁 은행장으로 있을 때 친선 .. 더보기
회고 - 민주주의의 속죄양 (송원영) 송원영(宋元英, 전 장 총리 공보 비서관) 비 내리는 명륜동 초입, 30여 평의 범상한 기와집에서 운석 장면 박사는 조용히 숨지셨다. 1935년 장 박사가 손수 지은 이 집은 주위에 우뚝우뚝 솟은 큼직한 새 집들에 의하여 한결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집권자로서 또는 부통령으로서 나라에 공로도 많고 위세도 부릴 만한 처지에 있던 분이건만 사생활은 30년이 여일(如一)하였다. 그분이 정치에 징발당하지 않았더라면,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편하고 유복하게 지내셨을 것이 틀림없다. 해방 이듬해 민주 의원에 피선되신 것은 천주교 신자의 대표 격으로 징발된 때문이었으며, 제헌 국회에 나가신 것도 그 측근자들의 강권에 의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라를 위하는 길은 반드시 정치만이 아니고 교육이나 종교 등, 사회 덕화.. 더보기
회고 - 신앙의 정치가 (선우종원) 선우종원(鮮于宗源, 전 장 총리 비서실장) 몸에 밴 민주주의 한 사람이 생애를 마치기까지 그가 겪어 온 발자취 가운데서 우리는 무한한 외경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한 가닥의 연민의 정을 갖기도 한다. 이미 유명을 달리하여 타계에 있는 장면 박사에 대한 회고도 어떤 의미에서는 고인에 대한 왜곡을 가져올까 해서 두려움이 앞선다. 그가 가장 신임했던 사람이나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몰지각한 분들이 그분을 몹시 괴롭히면, 겨우 “에이 고약한 사람!” 하는 것이 감정의 최고 표현이었던 분이다. 정치인이라기보다 겸허한 신앙인으로서 그를 기억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내가 처음 장 박사를 뵌 것은 1951년 6월 1일, 고 조병옥 박사의 소개로 장 박사(당시 국무 총리)의 비서실장으로 취임할 때였다. 이때까지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