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선(金永善, 전 재무부 장관)
운석은 강인(强人)이었다
운석 선생에 대하여 할말은 많으나, 여러 인사들이 많은 말씀을 했을 것으로 알기 때문에 그 중복을 피하는 의미에서 간단히 장 박사의 성격의 일면을 밝혀 볼까 한다.
맨 처음으로 장 박사를 뵙게 된 것은 한국 동란의 전운이 감도는 1951년이었다. 대전에서의 일로 기억된다. 출세한 사람을 찾아 다닌다는 것이 어떤 점에선 영광일 수도 있겠지만, 그때나 이제나 “세도한 사람 찾아 다니지 않는다”는 한국식 사고 방식이라 할까, 선비도라 할까, 그런 교양을 몸에 지니기에 애를 써 왔던 나로서 그것은 좀 의외의 일이었다.
제2대 국회 의원으로 당선되고 6·25를 만나 정부가 부산에 있던 시절의 일인데, 향리 가까이 대전에 들렀다가 선우종원(鮮于宗源) 씨 소개로 운석 선생을 뵙게 된 것이다. 뵙고 보니 그분은 세상에 알려진 바 그대로 조용한 신사로서의 기품이 넘쳐흘렀다. 밖으로 조용해 보이면서도 안으로 간직한 뜨겁고도 강한 인간미를 느꼈다. 그 후 두고두고 접촉하면서 장 박사로부터 배운 것은 비단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항도 부산에서 문제의 정치 파동을 겪으면서 자주 접촉할 수 있었고, 그 후 정치를 같이하면서 그분의 진가를 체득하기에 이른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우씨는 유석을 통하여 운석을 알게 되었노라 했고, 다시 선우씨를 통하여 내가 운석과 가까워졌던 바, 모두가 야당 생활을 통하여 수난과 시련도 겪었고 이 나라 민주 정치의 짧은 과정이나마 기여하느라고 했다. 내가 알기로 장 박사 그분은 가장 어려운 시대를 살다 간 정치가이다. 그러면서도 남을 비난하거나 불평하는 일 없이 꾸준한 투쟁에 전념했다.
도대체 어느 악한을 지적해서 말할 때에도 ‘놈’자 쓰는 걸 나는 보지 못했다. 그것은 결코 위선적인 면이 아니라 그분의 신앙과 수양의 깊이가 몸에 밴 증거였으리라고 본다.
장 박사의 인간상은 한마디로 진실 그것이다. 그분에게서 진실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을 정도다. 수난의 시대를 살면서 흡사 순교자처럼 진실된 면을 보였다. 보이려고 해서 보인 것이 아니라 매우 자발적으로 우러난 인간성의 반영이었으리라.
진실된 사람인 만치 누구보다 강한 분이다. 세상에선 무능하다고 했지만, 장 박사는 추호라도 악하거나 무능한 분이 아니다. 나는 장 박사 이상의 강인을 잘 알지 못한다.
강인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법하다. 첫째, 사람의 본성으로서 강한 것 둘째, 인간의 천성을 수양으로써 넘어선 인격적 강(强)이 있다. 그리고 셋째로, 강의 3차원을 생각할 수가 있다. 이것은 인격적 강 그 이상의 것이다. 인간의 천품이 그대로 힘이 되어 주는 하나의 초월적 경지라고나 할까. 운석은 제3차원의 강인이다. 제1차원의 세계나, 제2차원의 세계에 살던 평범한 사람들에겐 그분이 약한 것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사회 생활이나 인간 생활의 깊이를 가지지 않은 범인들에겐 도시 제3차원의 세계가 인식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3차원의 인간을 몰라줘
공자가 자로에게 이런 뜻의 말을 한 일이 있었다. 어느 것이 가장 강한가. 힘이 센 자가 제일 강한가, 아니면 끝까지 견디면서 자기의 신념을 지키는 자가 강한가. 공자는 강인을 구별하여 자로에게 말했다.
너그럽고 부드럽게 가르치면서 군자가 지키는 강을 남방인의 강이라 하거니와 폭력을 행사하는 무뢰한들과 어찌 비교가 되겠는가. 남방인의 강을 말한 공자의 모럴은 신념의 인간이 가진 무기라 하겠다.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끝까지 자기의 영토를 확고하게 지키는 군자의 모토라 하겠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로서 이승만 박사 같은 분도 강인측에 들것이다. 비단 이 박사뿐이랴, 막강의 군대를 명령할 수 있는 사람들이나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 아니 비밀 정보 조직까지 가진 사람들도 분명히 강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강은 너무나도 세속적인 것이거나 강제성을 지닌 특수 대행 기관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이 박사식의 독재성을 띤 강이란 결국 허무한 파산을 가져오고 말 뿐이다. 이들은 자연인으로서의 강(强)도 아니며, 인격적인 강도 아닌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나라 정치 지도자 중에는 강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잘되면 군자요 못되면 폭군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장 박사로 말하자면, 남방 군자보다도 더 강한 신앙적 강자였다. 그분의 인격 자체가 위엄이 있고 기품이 넘쳤다. 야당 시절의 눈물겨운 수난 속에서 또 자유당 치하의 죄수 아닌 죄수 생활에 다름없는 부통령 시절을 통하여, 그 악착 같은 탄압에도 참고 견딤에 강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아마도 상상키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도대체 “이놈, 저놈” 하는 말씀이 없었다. 상대방에서 ‘눈엣가시’로 알고 그토록 지독한 곤욕을 겪게 했지만, 한사코 참고 견디는 데 철저했다.
그것이 신앙인으로서의 극기요, 자기 본분의 자세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장 박사의 초월적인 인생관에서 우러난 강한 인격을 높이 평가한다. 사람의 본성이나 천품을 초월했으며, 수양인으로서의 평범한 인격을 넘어선 강(强)의 3차원에서 그분은 생애를 마쳤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들에겐 약자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나는 이해한다.
못다한 과업
그분은 성스럽게 살다가 성스럽게 눈을 감으셨다. 벌써 오래 전부터의 지병이라 그분의 서거가 나에게는 갑자기 당하는 쇼크는 아니었다. 정치인 나름의 입장도 있겠지만 장 박사의 비중이 역사상 크게 문제 되리라고 나는 믿고 싶다. 이미 고인이 된 분을 두고 이제 와서 새삼 충실히 보필하지 못한 책임을 나는 절감하면서, 누가 정치를 하든 내 개인의 소견으로는 구체적인 방안 없이 큰 소리 치기만 능사로 하는 식의 무모한 소행은 국민들이 절대로 용납치 않을 것으로 안다.
나는 경제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 방면에 큰 문제 의식을 가지면서도 유물론적인 경제관을 배격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날 8년의 국회 의원 생활을 통하여 여러 분과에 관계하면서 다각도로 정치의 도를 모색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재정 경제면에서 국정을 전반적으로 보자는 기본적인 평가 기준에 입각한다면, 지난날 민주당의 경제 시책에 견주어 오늘날 정부가 하고 있는 경제 시책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가해져야 옳을 줄로 안다.
그러나 내 자신 때로는 자학에 빠져 본의 아닌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도 모르니, 구체적인 언급은 한 10년 뒤로 미룬다. 가령 민주당 정부가 과거에 환율을 개정했던 근본 취지는 무엇이었나? 또 민주당 정권이 5·16을 맞이해야 했던 근본 원인이 어디 있었는가? 5·16 그날의 쿠데타를 합리화한 윤 대통령의 처사가 일찍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국헌을 준수하고…” 운운하며 국민 앞에 선서한 근본 정신과 일치하는가?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하여 나는 많은 질문을 받고 있으나, 아직 확답을 할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늘 해답을 회피해 왔다. 지금의 심정도 역시 그러하다.
회고하건대, 장 박사와 같은 부드러운 강인은 우리 정치 풍토에 일찍이 존재한 일이 없었다. 사사 건건 차근차근 정책을 세워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던 중에 그만 5·16을 만났다. 경제 제일주의 정책을 세워 우리가 최선을 다하던 중에 일을 당했다. 정권을 쉽사리 물려준 것이 장 박사가 약하기 때문일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훌륭한 우리의 지도자 장 박사의 영생을 추모하면서, 이 나라의 정치가 잘되어 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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