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천(朴順天, 민중당 대표 최고 위원)
역경을 이겨 낸 위대성
내가 운석 선생님을 처음으로 뵙기는 1948년 5·10 선거, 즉 제헌 국회 총선거 무렵이었다. 그때 시공관에선가 무슨 모임이 있었는데 산회 후 밖에 나오느라니까 “박순천 여사! 저 장면입니다” 하고 자기 소개의 인사를 한다.
사진으로 보아서도 그분이 무척 미남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 대하고 보니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갖춘 분이었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만은 결코 아니다. 그분은 누구나가 공인하는 미남이요 신사였다.
“이번에 중앙 중학교에서 선거구민들 앞에서 강연을 하게 됐는데 박 여사께서 보조 강연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분은 내게 그런 부탁을 했다. 나는 벌써 장 박사님을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아끼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기에, 가서 기꺼이 보조 강연을 해드렸다. 그분과 나와의 인간적인 교류와 사상적 교류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막이었고 본격적으로 접촉을 하게 된 것은 역시 민주당 창당 후였다. 처음에 나는 당의 고문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해공, 유석, 운석, 삼연 선생 등, 이 나라 야당의 거물급 지도자인 남자들 틈에 끼인 홍일점의 나약한 여자였다.
민주당은 애초에는 순풍에 돛을 단 배 격이었으나 아깝게도 해공 선생을 잃자 차츰 난항을 하기 시작했다. 첫 시련은 해공 선생께서 서거하신 지 2개월 후였다.
해공 선생이 돌아가시자 김도연, 김준연 두 분이 최고 위원으로 추가 선임되었다. 그러니까 1956년 5월에 해공 선생을 잃은 우리는 7월에 동성 고등 학교에서 민주당 중앙 위원회를 개최했다.
나는 외람되게도 대회의 부의장이 되어 사회를 맡아 보았는데, 그때 나는 정치적 소양이 없는 탓으로 최고 위원급 간부들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가 세칭 신파며, 누가 구파인지를 알지 못해 아무에게나 발언권을 내주었다. 그러는 동안 대회는 무려 10시간이나 끌었다.
그런데 이 대회가 끝난 후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야기되었으니, 최고 위원으로 택함을 받은 분들 전원이 이유도 모르게 사표를 낸 사건이었다.
나는 그들이 다시 뭉쳐 줄 것을 호소하느라고 무려 1주일간이나 동분 서주했다. 그리고 장 박사님께는 미리 허락도 받지 않고, 아무 날 아무 시에 박사님 댁에 모이자고 일주일 동안이나 막후 교섭을 벌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명륜동 자택에 있는 바로 그 응접실에 유석 선생, 삼연 선생, 운석 선생, 김도연 선생, 김준연 선생, 그리고 고희동(高羲東) 선생 등 민주당 고문 및 간부들이 모였다.
운석 선생과 삼연 선생께서 유석 선생께 사표를 낸 이유에 대해 굉장히 따지고 들어갔다. 사전에 무슨 약속이 있었기에 이럴 수가 있느냐고 대들다시피 했다.
그러자 유석 선생께서 김도연 씨의 말을 인용하여 “신파는 앞으로 수효가 늘어갈 것이고 구파는 앞으로 수효가 줄어들 것인즉, 이때에 우리가 최고 위원을 하지 못하면 영 가망이 없지 않소?”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삼연 선생께서 화를 내시며 따지고 들어가니까 유석 선생 말씀이 “내 버르장머리를 고치려고 하는 모양인데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으니 지나간 일을 더 이상 논의할 것 없이 잘들 해나가 봅시다” 하고 사과의 말을 하게 되어 그 사건은 그전대로 격동을 겪지 않고 넘겼다.
그때 장 박사의 태도는 여간 꼬장꼬장하시지 않았다.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들을 대하던 냉엄한 모습 같은 것을 나는 그 후로 뵌 기억이 없다.
나는 그 후 장 박사님의 또 하나의 다른 표정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1959년 9월 28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세상을 한동안 떠들썩하게 했던 장 부통령 저격 사건 때였다.
투표일 10일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이신 해공 선생을 잃으시고, 짝 잃은 외기러기처럼 자유당 정권하의 부통령이 되신 지 불과 4개월 후의 일이었다.
우리 민주당 전당 대회는 해공 선생을 잃은 슬픔과 장 박사님의 부통령 당선이란 기쁨이 엇갈린 가운데 시공관에서 열렸다. 당시 장 부통령께서는 이미 이 박사와 자유당으로부터 갖은 박해와 천대를 받아 왔고, 들어오는 정보마다 장 박사님을 해치려 한다는 험악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최고 위원들이 모여 그분이 참석하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모았고, 그분 역시 나가서 자기를 위해 피나는 수고를 해준 동지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고 싶지만, 자유당측에서 자기를 살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정보를 참작하여 부득이 나가지 않겠다고 우리에게 사전 양해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대회 진행 중에 장 박사를 뵙고 싶다는 부산 대표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나오셨던 장 박사님이 하단하여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에 저격을 받으셨다. 저격을 받고 다시 단상으로 올라오신 박사님을 보고 나는 놀랐다. 저격을 받은 손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러나 선생은 안면 근육을 조금도 찌푸리는 기색을 보이시지 않았다. 저격을 받기 전의 표정 그대로였다.
나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의 힘이 이렇게 위대한가? 종교의 수양이 장 박사님으로 하여금 이렇게 위대하게 했는가!’ 하고 나는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때의 그 표정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내 이름은 “자장면”
민주당이 창당된 후 우리가 지방 유세를 처음 한 곳은 평택이었다.
그때 민주당 최고 위원들이 모두 유세를 갔는데, 일행 중에서 장 박사님의 짐이 제일 많았다. 장 박사님은 담요와 베개에 그리고 가방을 휴대했다. 하여간 유세를 떠난 민주당 간부 일행 중에 짐이 제일 많고 컸었다. 그런데 그 다음번 유세 때에는 짐이 조금 줄었다. 그 다음에는 더 줄었고 그리고 몇 번째에 가서는 우리와 같이 그저 작은 가방 하나만 챙겨 가지고 다니셨다.
처음에는 본의는 아니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귀족다운 풍모를 보이셨는데, 같은 생활과 같은 보조를 맞추시려고 노력하신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전국을 안 가 본 곳이 없을 만큼 항상 같이 다니셨다.
한번은 전남 광주의 유세를 앞두고 순천에서 강연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일정이 잘못 짜여서 이틀이나 순천에서 쉬게 된 일이 있다.
우리 일행은 순천에서 한 70리 떨어진 바닷가로 나갔다. 그 바닷가에는 이순신 장군의 전적 사당도 있고 하여 구경도 할 겸, 그동안 쌓였던 피로도 풀 겸 바닷가에 나갔던 것이다. 사당을 돌아보고 난 우리는 바닷가를 거닐며 피로를 풀었다. 나는 소라나 고동 같은 것을 줍기도 했다.
마침 우리가 거닐던 근처에 조그만 천막을 친 곳이 있었는데, 그것이 이 근처의 아동들을 위해 세운 학교였다. 다른 분들은 모두 그곳에 가셨다.
나 혼자서 모처럼 소녀가 된 기분으로 육지에서는 진귀한 바닷가의 것들을 줍고 있는데 어서 오라고 해서 가 보니, 한 천막 안에 아이들이 한 50명 있는데 1학년부터 5학년까지 마구 섞여 있는 것이었다.
나는 웬일이냐 하고 물으니, 거기의 선생들이 우리를 붙들고 학생들에게 무슨 좋은 말씀을 좀 해달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곳에서 강연이 시작됐다.
내가 여지껏 알고 있는 중에 그때의 강연이 가장 명강연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제일 먼저 해공 선생이 교단에 올라가 그 코흘리개들 50명 앞에서 강연을 한다고 말을 하려는데, 철부지 국민 학교 학생들에게 막상 할말이 없으니까 “애들아, 내 이름이 익희(翼熙)다. 너희들 깜짝 놀라면 ‘익키!’ ‘익키!’ 그러지? 그래, 내 이름이 신익희다” 하고 웃었다.
그 다음 장 박사님이 교단에 올라가셨다.
“애들아, 지금 신익희 선생님이 ‘익키!’ ‘익키’라고, 그랬지?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아이들이 나를 보고 ‘자장면, 자장면’ 하고 놀렸다. 그래서 내 이름이 ‘장면’인데 너희들은 자장면이 뭔지 알겠니? 자장면은 국수다, 국수야!”
장 박사님까지 그런 말씀을 하시고 나니 나는 할말이 없었다. 하여간 나도 뭔가 그분들처럼 이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기에 “애들아, 여기에서 가까운 순천이라는 데 있지? 내 이름이 바로 ‘순천’이다. 내 이름은 본래 순천이가 아닌데, 내가 독립 운동을 하다 쫓겨다닐 때 감춰 준 사람이 거짓말하기를, 자기 동생이 순천으로 시집을 갔다가 소박을 맞고 쫓겨왔다고 해서 내 이름이 고만 ‘순천’이가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웃음거리였다. 다른 분들은 무슨 말을 더 해주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없지만, 여하간 우리가 고달픈 중에도 유세 강연이 아닌 재미난 명강연을 한 것은 지금도 쓰라린 과거의 기억 속에서 말없는 웃음을 머금게 한다.
명강연을 마치고 난 우리 일행은 바닷가의 주막집 같은 곳으로 갔다. 물론 그런 곳에는 담벽이라는 게 있을 리 없다. 대청 같은 마루 아래가 곧 길이다.
항상 막걸리를 즐겨 드신 해공 선생이신지라 막걸리를 내다 달라고 했다. 안에서 큰 자배기에 뜨물 같은 막걸리를 그득히 담아 가지고 나왔다. 그때 마침 지난밤에 제사를 모신 집에서 변변찮으나마 안주를 하라고 콩나물을 가져왔는데, 말이 콩나물이지 온통 대가리뿐이었다.
“막걸리는 잔으로 마시는 것보다 바가지로 퍼먹는 게 좋아. 여보 주인, 거 바가지 하나만 내주구려.”
해공 선생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안에서 바가지를 들고 왔다. 그러니까 농을 하고 싶은 해공 선생은 때가 껴 시커먼 바가지에 막걸리를 듬뿍 떠서 일부러 장 박사에게 권하면서 “이 술 좀 먹어 봐” 하니까, 장 박사는 손을 내저으며 치우라고 했다. 그러니까 해공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직 사람이 덜 됐어. 이런 술을 먹을 줄 알아야 정치를 할 줄 알지.”
그래서 모두들 또 한바탕 웃었다.
설움도 많이 받고 고생도 많이 한 그 시절이지만, 우리에게 그만한 유머도 있었다. 이제 조용히 생각해 보니 그때 그 시절을 되찾고 싶은 욕망이 굴뚝처럼 솟구친다.
애틋한 동지애
장 박사님을 일컬어 외유 내강하신 분이라고 한다.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박사님은 술도 못하시고 또한 남들처럼 유흥에 빠지시지도 않으셨다. 좋은 일을 당하시든 나쁜 일을 당하시든, 항상 마음속으로 품고 계시지 결코 밖으로 나타내시지를 않으셨다. 그것이 더욱 애달픔을 금할 수 없게 했다.
간혹 강연을 한다든지 간부들이 모여 토의할 때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고함도 치고 삿대질도 하고 욕도 하지만, 박사님은 화가 나면 화가 날수록 못마땅하면 못마땅할수록 말 한마디 않고 가만히 앉아서 다 참고 넘기시던 것을 보면, 남들은 흔히 성자적인 일면이라고 했지만 내가 볼 때에는 참 마음이 안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런 것이 병마를 더욱 채찍질하지 않았는가 하는 데에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5·16 5주년 기념일을 맞아 장 박사님은 정정법(政淨法)에서 해제되셨다. 나는 마침 그전에 남편을 타계에 보냈다. 박사님께서 성모 병원에서 퇴원하여 자택에 가 계시어, 남편을 잃은 후 처음으로 박사님을 뵈었더니 누워 계시며 내게 문상을 하시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그 사람들이 나를 정정법에서 해제를 했다고 해. 그 정정법에서 나를 해제했다는 말을 듣고 내가 일주일을 잠을 못 잤어.”
보통 말씀을 잘 안하시는 편이고 당신에 대한 불평이나 하는 것을 두 번 되풀이하지 않는데, 똑같은 말씀으로 두 번, 세 번 되풀이하셨다.
“내가 일 주일을 잠을 못 잤어.”
얼마나 기가 막혔기에 그토록 강하게 강조하셨던가.
평소에 말씀이 없으셨던 그분은 이 한마디로 말 못할 모든 것을 말씀하신 것이리라.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가? 우리로서는 감히 짐작도 못한다. 그것이 선생님의 병세에 마지막 충격을 준 것 같아 나는 가슴이 메임을 어쩔 길 없다. 저들이 선생님의 병세가 위독한 것을 알고 그랬는지 모르나, 민주당 각료들을 제외해 두고 전 국무 총리만의 정정법 해제, 그것이 그토록 울분을 샀던 모양이다.
5·16이 나고 얼마 있다가 이주당(二主黨)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 나왔을 때의 일이었다. 내가 장 박사님을 찾아가 뵈었더니 “다른 동지들이 다 그렇게 당하는데 나만 편할 수 있었겠소. 몇 달 동안 들어갔다 나온 게 참으로 후련하오”라고 말씀하시며 “참 잘됐어. 나도 다른 동지들과 얼마든지 고생하고 싶었던 참이었는데…” 하고 애닯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장 박사님이 동지들을 사랑하심이 어떠했는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을 잠 못 잤어” 하는 그 비통한 말씀 가운데는, 남이 몇 마디 몇 백 마디 하는 것보다 많은 말씀이 있고 사무치는 분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천당에서도 외로울 듯
장 박사님은 많은 동지들을 입교시켜 구령을 받게 했다. 나는 본래 6·25 이후에 신교에 관계하고 있었지만 어찌해서 차츰 명동 성당에 나갔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가 앉아 있는 것만으로 마음의 편안함을 느꼈던 것이다.
민주당 동지들을 비롯해서 제2 공화국 당시의 각료들은 대개가 장 박사님의 전교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 지금은 모두가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다.
박사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 나는 신교니 뭐니 하며 핑계를 대다가 돌아가신 요즈음 박사님께서 권하시던 그 말씀이 가슴에 남아 몹시 찔리는 모양인지, 지금은 교리 강좌도 받으며 선생 생전에 세례도 받고 하여 주일마다 미사에 나가게 되었으니 박사님께서 살아 생전에 그렇게 전교에 열심이셨던 덕분이었다. 돌아가신 오늘날도 그분은 천당에서 구령 사업을 하시고 계실 것만 같다. 누군가가 “장 박사님은 천당에 가셔서도 외로우실 것입니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천당에 가실 분은 오직 장 박사님 한 분뿐이시라는 뜻이다. 일리가 있는 말임에 틀림이 없다. 장 박사님은 그만큼 이 세상에서 참된 생애를 보냈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분은 정치가로서 부적당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그분은 정치가라기보다 종교가나 교육가로서 평가하는 것이 적당치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성품과 그분의 지도력이 우리 후진국의 혼란과 정치 풍토에는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장 박사님 같은 분은 질서가 잡힌 사회나 국가, 평화롭고 안정된 나라에서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양심적인 정치가라고 생각한다.
해공 선생이 가시자, 유석 선생도 가시더니 이제 운석 선생마저 가시고 말았다. 민주당이 창당된 후 약 15년 간을 통해서, 특히 선생님은 피나는 험악한 격전장에서 민주 정치를 위해 격투를 하시다가 희생되신 분이다. 생각할수록 아까운 분들이 모두 타계하셨다. 나도 어서 가야겠는데 아직 속죄를 하지 못했는지, 나 혼자 정계 제일선에 남아서 고생을 하고 있다.
장 박사께서 곁에 계셔 주시다가 그분마저 가시고 나니 나의 허전한 마음 메울 길이 없다.
하관식에서 성호를 긋고 성수를 뿌릴 때, 장 박사님 유해 곁의 빈 자리를 보고 나는 불현듯 이런 생각을 했었다.
‘일후에 이 자리에 부인께서 가실 곳이지만, 염치 불문코 나도 저 자리에 들어가 누워 버렸으면….’
새삼 장 박사님에 대하여 회고를 하고자 하니, 너무나 가슴이 벅차도록 사무쳐 문맥이 제대로 이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수록 하고 싶은 말은 개울이 강을 이루고 거기서도 넘쳐흘러 바다가 되어 쌓인 기억을 다 펼쳐 놓아야겠지만, 그것을 펼치기에는 너무 괴로워 이만 이 글을 줄일까 한다.
지금은 하느님의 곁에서 안주하시는 운석 선생님께서 여기 순천이 속죄를 하고 세상을 뜨는 날, 생전의 그 따스하고 부드럽던 손길로 구령해 주시옵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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