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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채록 · 회고

회고 - 거룩한 평신도 장 요한 (노기남)


노기남(盧基南, 천주교 대주교)



거성은 지다


 
1966년 6월 4일, 이날은 다만 해마다 맞고 보내는 평범한 날이다.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던 이날은 바야흐로 저물어 가면서 역사상 슬픈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오후 4시 50분, 한 인간의 고귀한 생애가 막을 내렸다. 아니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드디어 생명은 육체에서 떠나고 영혼은 하느님의 곁으로 안주하러 갔다.

 
요한 장면 박사가 서거한 것이다. 이날 저물어 가는 해를 따라, 한국 가톨릭계에 공헌한 거성이 떨어지고 한국 정계의 굵은 기둥이 꺾이었다. 이래서 평범한 이날은 영원한 슬픈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그와 사귀어 왔던 정치인들은 그의 죽음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평소에 그를 따르던 많은 교인들과 국민들이 그의 부음을 전해 듣고 애통해했다. 더구나 가족과 친척들의 슬픔을 어찌 이루 헤아릴 수 있었으랴!

 
내 애통함도 타인들은 헤아리기 어려우리라. 장 박사와 나와의 사이를 아는 이면 잘 알겠지만, 아마 모르는 이가 더 많으리라. 그와 나는 50여 년 간이나 가까이 사귀어 온 터였다. 그는 평신도였고 나는 지금 대주교란 직위에 있지만, 그는 두고두고 나를 가르치던 나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는 다만 나의 스승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도들의 스승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정치가이기에 앞서 가톨릭을 이 땅에 전교한 하느님의 사도였다.

 
장 요한, 그는 이 땅에서 갔다. 그러나 하느님 곁으로 돌아간 장 요한.

 
새삼 그의 신앙심을 들추어 말할 필요도 없다. 신앙이란 하느님과의 교통을 의미한다. 그 신앙의 길을 통하여 하느님을 뵙고 또 가르침을 받는다. 그의 신앙의 깊음을 우리보다도 가장 잘 아시는 이는 곧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느님이시다.

 
그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그의 신앙은 깊고 철저했다. 모든 언동은 신앙심에서 비롯되었다. 사생활에서부터 정치에 이르기까지 오직 하느님의 가르치심대로 실천한 성인이었다. 우리 성직자도 따르기 힘들 만큼 모범적이었다. 그가 지닌 넓고 깊은 학식, 매사를 잘 처리해 나가는 역량, 그리고 숭고한 신앙심으로 인하여 만인의 우러름을 받게 된 것이다. 그를 사귀는 이마다 그를 존경하지 않고는 못 배겨 낼 만큼, 만인을 품에 안는 숭고하고 세찬 힘이 있었다. 오랫동안 그의 깊은 신앙과 높은 인격에 의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용산 신학교 시절


 
장 요한과 처음 만난 곳은 용산 신학교에서였다. 일제의 무력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지 어언 8년째가 되던 1917년이었다. 내가 다닌 용산 신학교는 프랑스 신부가 경영하는 신학교였다. 그는 국어, 수학 등 세속 과목을 담당하여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는 그때 수원 고등 농림 학교를 갓 졸업한 약관의 청년이었지만, 이미 신학교에 초빙 교수로 초대될 만큼 신앙이 깊고 인격이 높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개화기였던 당시라 새 학문을 배운 사람이 많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하여간 많지 않은 가운데서 덕망 있는 그를 초빙 교수로 모셨다는 것은 우리 신학생들에게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면 선생은 비록 젊지만 그분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되겠다.”

 
그는 연배가 우리보다 불과 3, 4년 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그는 훌륭한 교수일 뿐더러 덕망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 신학생들은 가끔 그런 말을 주고받으면서 장 선생의 강의를 열심히 경청하였던 것이다.

 
지금보다도 그때의 신학교 규율은 매우 엄격했다. 신부를 지망하고 수련을 쌓는 학습 생활이기 때문에 우리의 언동은 엄격한 규칙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는 비록 우리를 가르치는 분이지만, 그가 평신도라는 이유 때문에 수업 시간 외에는 서로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가끔 이야기할 기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 기회는 대개 내가 교실 청소 당번으로 쉬는 시간에 교실에 남아 있을 때 뿐이다. 우리를 가르치는 분들은 거의 다 신부님들이었다. 신부님들은 각기 자기 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는 모두 자기 방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는 평신도에 불과한 초빙 교수라 자기 방이 없어서 쉬는 시간에도 교실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에 대한 그의 배려는 다른 학생들에게 대한 것보다 더했다. 부모님들과 평안도가 한 고향이라는 이유에서 우린 더욱 친근해질 수 있었다.

 
독립 운동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은 장 선생이다. 장 선생으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주로 바깥 세상의 것이었다. 나는 궁금한 것을 물었고 그는 내 궁금증을 차근차근히 풀어 주었다. 그의 이야기는 주로 민족과 신앙에 대한 것이었다.

 
“큰일 났어. 왜놈들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거든…. 뜻있는 사람들은 모두 해외로 나가 독립 운동을 하지만, 그게 수월한 일이 아니거든. 백성들에게 필요한 건 지도자야. 그러나 우린 지도자를 갖고 있지 못해. 찾지를 못하는 거지. 상해 임시 정부나 미국에 건너간 독립 투사들의 진정한 지도자는 오직 한 분이 계셔. 하느님이야. 그러나 몽매한 백성들은 그걸 몰라. 일깨워 줘야 돼. 우리에겐 오직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줘야 해. 맨주먹으로는 왜놈들의 총칼을 당해 내지 못하지만, 신앙심과 하느님 앞에서는 무기란 무력한 것이지. 모든 동포에게 하느님을 믿도록 우리가 노력해야겠는데….”

 
그는 항상 이런 이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농담도 곧잘 했다. 그중 어느 땐가 그는 나를 보고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바오로는 코가 좀 이상하게 생겼군 그래. 허허….”

 
그래서 우리는 한때 웃지 않았던가. 당시 장 선생은 아주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청년으로 매우 소탈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하루에 4, 5시간씩 강의를 했는데 점심을 시켜 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 추우나 더우나 적선동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자전거에는 항상 도시락이 실려 있었다. 그가 우리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지 3년이 되던 해에 3·1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 우리는 신부 지망생이지만, 어찌 이 나라의 아들들이 아니랴! 우리도 밖에 나가서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학교 규율과 외국 신부들의 제지로 우리는 밖에 나가지 못했다. 그날은 물론 수업을 잘하지 못했다. 나는 몹시 흥분한 그분을 보았다. 그는 수업을 하지 않고 3·1 운동에 관한 이야기만 해주었다.

 
“…이건 하느님의 뜻이오. 이 거족적 봉기를 일으키게 한 분들은 대개가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분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독립을 찾아야 해요. 민족의 얼을 찾아야지요. 하느님께서는 그런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침착하면서도 격양된 구석이 있는 목소리였다.

 
우리는 며칠 동안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 그 대신에 그를 통해 전국 방방 곡곡에서 불붙듯 일어나는 만세 사건에 관하여 자세히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왜놈들의 탄압이 심해져 우리의 독립 운동은 실패로 돌아갈지 몰라도 세계의 인류는 우리를 기억할 것이며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오. 우리의 신앙심이 약해지지 않는 한….”

 
항상 우리에게 모범이 될 만한 신자시구나 하는 것을 나는 새삼스럽게 절실히 느꼈다.


신앙적 교육가


 
장 요한, 그에게 도미의 길이 열렸다. 한국에 최초로 온 미국인 선교사 방(方) 주교의 추천을 받아, 메리놀 전교회의 장학금을 얻어서 뉴욕의 맨해튼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는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것은 우리 신학교에 와 교편을 3년 간 잡은 이듬해인 1920년이었다. 교인으로서 교육가로에의 디딤돌에 올라서게 된 것이었다.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던 당시의 그의 모습을 지금도 선하게 눈앞에 그릴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멋쟁이 청년이었다.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신앙심에 충만한 청년, 항상 하느님 품에서 사는 청년, 그 청년이 입은 하얀 모시 두루마기 자락이 지금도 내 눈앞에 선하기만 하다.

 
그는 도미 유학 생활 6년 만인 1926년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장 박사는 잠시도 쉬지 않고 평양에 가서 5년 간 열심히 교구 일을 보았다.

 
그런데 귀국하는 길에 1925년 그에게 이탈리아 ‘로마’로 해서 돌아올 기회가 생겼다. 그의 형제(장 요한·장발)의 이름은 로마에까지 알려졌다. 그만큼 가톨릭에 열심히 봉사한 청년들이었다.

 
그래서 두 청년 형제는 한국 천주교 신자 대표로 로마 교황의 한국 순교자 시복식에 참석한 것이다. 로마에서 돌아와 교구 일을 평양에서 맡아 보다가 교육계에 투신했다.

 
동성 학교의 박준호(朴準鎬) 교장이 별세하자 동성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계성 학교 교장도 겸임하는 무거운 중책들을 맡고 있으면서도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 회장으로 피임되어 외부의 평신도 일을 언제나 그가 솔선해서 도맡아 해주었다. 그는 동성 학교에서 17년이란 긴 세월 동안 교육자로서 일관했다.

 
그 무렵인 1930년, 나는 내 소망인 신부가 되어 명동 성당의 보좌 신부로 12년 간을 마치고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되기 전, 나는 교장인 그를 도와 동성 학교와 계성 학교에서 교리 시간을 맡았다.

 
그때 나는 그의 인간 됨됨을 알게 될 때이다.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그는 수천 명의 학생을 교육하는 교직자로 봉급이나 어떤 물욕에는 초연하고 언제나 궁극의 목적은 ‘종교’ 거기에 두었다.

 
별로 말이 없이 묵묵히 실천만 하는 그는 모든 일을 은연중에 신앙의 정신으로 이끌었다. 교장직에 있으면서도 모든 행동과 교육 방법을 그리스도 정신으로, 전교의 목적 의식에 투철하여 자연히 학생들도 그의 신앙적 교육에 감화되었으며 많은 학생들이 이를 본받아 입교하기도 하였다.

 
일제 말엽에 동성 학교에서 하루 한 시간씩 교리 시간을 맡았던 나는 이런 요지의 강의를 학생들에게 한 적이 있었다.

 
“…일본 천황은 절대의 신이 아니다. 절대의 신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일인 교사가 학무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여 크게 문제가 되었다. 나는 반일 사상의 혐의를 받고 경찰에 붙들려 갔다. 장 요한의 힘이 아니었던들 큰 고초를 겪었을 게다.

 
장 박사로 말하면 영어는 물론 일어도 유창하게 구사하여 일인들도 그의 인격과 학식을 받들지 않을 수 없었던 터이지만, 그들에게 욕을 먹어 가며 나의 구제 운동에 적극 힘을 기울였었다. 덕분에 나는 별고생 없이 무사히 출감할 수 있었다.

 
1942년 주교가 된 나로서 일어를 전혀 배우지 않아 순 우리 나라 말을 사용했다. 그래서 총독부 당국자도 주교인 나를 항상 사상 불순자로 주목해 왔다. 그러자 장 박사는 내게 일어를 열심히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주교가 되어 총독부 출입이 잦아지자 내 신변을 염려하여 스스로 나의 비서 노릇까지 해주는 형편이니 모든 일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장 박사는 일찍이 내 스승이었으면서도 나의 일이라면 자신의 일 이상으로 철저하게 협조해 주었다.

 
학교 일에 분망하면서도 총독부와의 접촉을 꾀하여, 우리 천주교가 박해를 받지 않도록 늘 손을 썼다. 우리는 가끔 밤늦도록 여러 가지 문제를 의논하기도 했다. 일제하에 4년 간 주교 노릇을 하면서 나는 장 박사가 없으면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다. 한국 가톨릭 육성을 위해 그는 성의를 다했다. 어떤 이는 그를 일컬어 장 주교라고까지 말했다. 결코 과분한 호칭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상으로 불려도 조금도 어색한 사람이 아니니 말이다. 장 박사는 우리 나라 천주교 전교에 큰 공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정치가


 
광복 후, 미 군정하에서 나는 또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했다. 그는 미국에 가서 유학을 했었던 관계로 영어에 능통했고 외국인과의 접촉이 퍽 능란했다. 하루는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이 나를 전 미스비시 회사 자리에서 극비리에 초청했다. 외국어에 자신이 없어 나는 자연 장 박사를 통역 겸 참모로 대동했다. 하지 중장은 해방된 한국의 실정에 어두웠다. 하지 중장이 우리를 부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교계의 대표급이었기에 우리를 신임하여 국내 지도층 인물을 알아보자는 저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 실정에 어둡소. 누가 이 난국을 수습해 나갈 수 있는지 유력한 사람을 천거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숙의 끝에 이승만 박사와 김구(金九) 선생 등 여러 독립 투사들을 차례로 적어 준 일이 있다.

아울러 장 박사에 대한 하지 중장의 신임은 두터웠다. 미국 교육을 착실히 받았던 터이고 미국인들과의 사교가 원활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종교적 인간성에 대해서 하지 중장에게 새로운 면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장 박사! 이제는 교육계에서 손을 떼고 나라 일에 힘써 줘야 되겠소. 혼란상을 수습하면서 한국은 당신 같은 양심적인 위대한 인물을 원하고 있소.”

 
하지 중장의 권유는 간곡했다. 내가 보기에는 장 박사는 종교인이며 교육가이지 정치가의 소양은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드디어 하지 중장의 간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라가 서는 중요한 시기인데 장 박사가 교계를 대표하여서도 일해 주시오.”

 
아무도 그가 정계에 투신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인격을 높이 숭앙하고 있던 친지들이나 신자들은 그가 정계에 나아가 나라 일을 잘 볼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귀국한 후 나와 상당히 가까워졌다. 사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이지만,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한 관계로 가톨릭에 관하여도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사실상 상당한 호감까지 보였다. 그래서 이 박사는 복잡한 일이나 중대한 일이 있으면 나와 의논하기를 좋아했다.

 
장 요한도 내가 이 박사에게 소개했다. 이 박사는 차츰 장 박사의 인격과 역량을 믿었다. 대통령이 된 후에 하루는 나를 초청하기에 가 보니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가 장면 박사 그 사람을 미국 대사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안 가려고 하더라도 꼭 좀 가게 해주십시오.”

 
나는 곧 그를 만났다.

 
“사실 나는 대사가 될 만한 자신은 아직 없소.”

 
그는 생각했던 대로 역시 겸손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나는 설득시켜 보았다.

 
“대통령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바라고 있소. 이왕 정계에 몸을 던졌으니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게 하느님의 뜻을 좇는 일일 것 같소.”

 
“어려운 직책 아니오. 주권국으로서 외국에 파견되는 첫번째 대사, 더구나 상대국이 중요한 미국인데.”

 
“그럴수록 더욱 장 요한이 적격자라는 얘기들 아니오. 수락하시오.”

 
우리는 오랫동안 흉금을 털어놓고 의논한 끝에 합의를 보아 그가 곧 주미 대사직을 수락하기로 단안을 내리게 했다.

 
초년병 외교관이지만 장 박사의 역량은 십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6·25가 발발하자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 한국 실정을 호소하여, 드디어 유엔군을 파병케 하여 위기에 놓였던 이 나라를 구한 그의 빛나는 공적, 그리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국민들에게 ‘미국의 소리’를 통해서 이 사실을 우리 국민들에게 알려 주던 그의 음성!

 
그는 절망 속의 국민들에게 희망의 서광을 비춰 준 명외교관이었다.

 
“…하느님께서 내 간곡한 기도를 받아 주셨던 거요….” 후일에 그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

 
국내의 정세가 호전될 무렵에 국회에서 그를 국무 총리로 인준했다. 그러나 정권욕이 없는 그인지라 선뜻 수락할 뜻을 표하지 않았다. 나는 또 이 박사의 권유로 워싱턴에 있는 그에게 직접 국제 전화를 걸었다. 장 박사 대답은 예상하던 대로였다.

 
“국무 총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지금의 주미 대사직도 내게는 벅찰 뿐이오.”

 
“하지만 정치적 역량이 국내외에서 인정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어디 개인의 힘으로 된 것이겠습니까?”

 
“잘 아오. 하느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국회에서의 인준은 국회 의원들만의 뜻이 아니오. 그들의 생각은 곧 국민 전체의 의견을 대표한 것이 아니겠소.”

 
“하지만 너무 벅찬 임무라고 생각되오.”

 
“어려운 임무이기에 대통령이 그 자리를 장 요한께 맡기는 것이겠죠. 하여간 수락하시오. 하느님도 이 중책을 맡아 난국을 타개해 줄 것을 원하실 거요.”

 
우리의 대화는 자그마치 20분 간이나 끌었다. 결국에 그는 수락을 하고 곧 귀국하여 제2대 국무 총리가 되었다.

 
그의 정치적인 길은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마련된 것이겠지만, 그가 그만큼 등장할 수 있었다는 데에 천주교계의 도움도 적지 않았다.


“우리를 위해 빌어 주소서”


 
야당이 된 이후로 그는 정치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점점 고독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4·19 이후 7·29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당의 내각 책임제하에서 그는 국무 총리로 인준되어 사실상 국가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정치가로서 최고봉에 오른 것이다.

 
그의 출세에는 곧 한국 가톨릭의 뒷받침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되니 자유당 시절에 가톨릭에 대한 탄압 또한 없지 않았다.

 
그 당시 어느 국무 위원은 로마 교황 앞으로 탄원서를 냈다. 노 주교가 정치에 상관한다고 견책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니 내 입장은 곤란했다.

 
한편 로마에서는 한국 가톨릭이 정치성이 농후하다는 통첩을 보내 왔다. 그러나 장 박사는 세계적으로 값진 평을 받고 있었으므로 문제가 더 이상 악화되진 않았다. 프랑스 교회나 전세계 언론계에서 그처럼 신앙이 철저한 정치가는 ‘세계적’이라고까지 칭송했던 터이다.

 
그가 프랑스에서 그만큼 대우를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1949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 때에 수석 대표로 참석했던 그는 한국 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받게 하기 위하여 세계 열강의 외교관들을 정치적 수완으로 납득시키는 한편, 한국 문제의 해결을 하느님께 위탁했다. 그는 가르멜 수녀원에 찾아가 원장 수녀께 한국을 위해 특별 기도를 부탁하고 또 매일 미사도 드렸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기에 그는 ‘숨은 정치가’요, ‘민주주의 정치가’로 널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우리 가톨릭계에서는 ‘신앙의 정치가’로 숭배하고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는 무력으로 정치를 하지 않았다. 오직 종교인답게 신앙으로 정치를 했다. 사리 사욕을 조금도 염두에 둘 줄을 몰랐다. 오직 국민을 위한다는 그 한 가지 마음뿐이었다. 진정한 민주 국가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맞는 나라를 이룩하려고 부단히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곧 정치가로서의 세속적인 박력이다. 힘이 있다면 오직 그 종교적 신앙의 힘 한 가지뿐이다. 그러기에 그는 독재를 하지 못했다. 물론 신앙에 의한 정치를 하려 했고 참된 민주주의를 실천하자니 자연 독재를 할 수 없었지만, 그가 정치가로서의 박력을 보였던들 비극을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뿐이랴, 우리 역사는 왜 그런 훌륭한 정치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가?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마음은 이루 헤아릴 길이 없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이 땅의 민주주의도 숱한 시련과 오랜 시간을 요할 것이다. 짧았던 민주 한국의 역사적, 현실적 그리고 체질적인 특징으로 인하여 그런 훌륭한 지도자를 용납하지 못한 처지가 너무나 불행스럽게 여겨진다.

 
그가 갑자기 성모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가 보았다. 그는 입으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나는 코로 고무 호스를 통해 입식(入食)시키는 것을 옆에서 지켜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마저 소화시키지 못하고 토해 버린다는 것이다.

 
입원 전에 자택에서 와병 중일 때도 한 주일에 한번씩은 꼭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지만, 그 자신도 그처럼 병세가 위독한 줄은 미처 몰랐었던 것 같았다. 희망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었으니까….

 
장 박사가 입원한 후에 나는 일주일에 몇 차례씩 찾아가 한담을 나누곤 했었다.

 
그는 병상에서 내게 비밀 없이 가정 사정이나 교회 일 같은 것을 털어놓았다. 그는 참으로 청렴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겉보기와는 달리 가난한 정치가였다. 하루에 3천 원이란 입원 비용은 그에게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그는 땅까지 팔았으나 끝내는 퇴원하고 말았다.

 
병상에 누워서도 늘 하는 말이 전교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구정치인들도 그를 따라 많이 입교했다. 그리고 입회가 가능한 사람에게는 손수 편지를 써서 감화시켰다.

 
“유진오(兪鎭午) 박사에게도 다시 편지를 써야겠는데….”

 
그는 중병임에도 자신의 병세보다 그런 걱정을 더 했다.

 
그는 벨기에에 가 있는 신부인 3남의 미사에 꼭 한번 참석했으면 하는 소망을 지니고 있었다.

 
“분다 수녀가 온다는 말이 있었는데….” 딸 분다 수녀도 보고 싶어했다.

 
“분다 수녀 왔어?” 임종하기 전에 그는 그렇게 힘없이 물었다.

 
그를 잃은 지 벌써 몇 달이 넘는다. 하느님은 이상하게도 너무나 빨리 그를 부르셨다. 10년쯤 더 가톨릭을 위해 일할 기회를 베푸셨던들 큰 성과를 올렸을 텐데, 생각할수록 아깝다. 수십년 간의 공적인 관계나 사적인 면에서 장 박사는 나와 떨어져 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의 고결한 신앙 정신으로 보아서 무척 아깝다.

 
장 박사의 임종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일 뿐더러 교회로 보아서도 크나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3회원이지만, 로마 교황청의 특전으로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정회원으로 임명받은 바도 있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그를 위해 수의를 보내 왔다. 그의 운명 시, 임종경을 외우고 기도를 드릴 때 모든 교우들이 “망자를 위해 빌어 주소서!”라는 기도문이 나오지 않고 “우리를 위해 빌어 주소서!”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천당에 가 하느님 곁에 계신다. 우리 신도들은 다 같이 장 요한의 복된 영생을 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