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4월 운석 선생은 용산 예수 성심(聖心) 신학교에 강사로 취직함으로 인해 기독교 청년회관 영어과에는 야간부로 적을 옮겨 계속 수학하였다. 운석 선생은 이 신학교에서 1918년 4월부터 약 2년 이상 근무하면서 주로 예과(豫科)의 보통과목을 교수하였다. 선생은 약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연배가 불과 3~4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 신학생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선생이었다 한다. 다음은 당시 선생에게 배운 노기남 대주교의 회상. “그는 국어, 수학 등 세속 과목을 담당하여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는 그때 수원고등 농림학교를 갓 졸업한 약관의 청년이었지만, 이미 신학교에 초빙교수로 초대될 만큼 신앙이 깊고 인격이 높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개화기였던 당시라 새 학문을 배운 사람이 많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하여간 많지 않은 가운데서 덕망 있는 그를 초빙교수로 모셨다는 것은 우리 신학생들에게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면 선생은 비록 젊지만 그분에게서 배워야 되겠다’ 그는 연배가 우리들 보다 불과 3,4년 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우리들에게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그는 훌륭한 교수일뿐더러 덕망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 신학생들은 가금 그런 말을 주고받으면서 장 선생의 강의를 열심히 경청하였던 것이다.”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용산 예수 성심 신한교 진(陣) 베드로 교장 신부 사제 서품 25주년 기념 사진≫
기독교 청년회관 영어과에 재학하면서 신학교에 재직 중이던 운석 선생은 3·1운동이란 거족적 민족운동을 맞는다. 선생은 『친필연보』에 두 건의 3·1운동 관계 기록을 남겼다. 그 하나는 “삼일우동 총동원수 136만인, 희생자 6,600, 피검자(被檢者) 52,000, 제등실(齊藤實) 해군대장이 총독으로 부임, 서울역전에서 하차(下車) 즉후(卽後) 강우규(姜宇奎) 의사 폭탄세례를 받음. 오(吾) 세브란스병원 근처에서 목도(目睹)”라고 친필로 강우규 의사의 거사에 대한 목격담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와 같은 드높은 정신에 고무되어 이룩된 시위운동의 집회회수는 1,542회, 참가인원수 223만 명, 피살 7,509평, 피상 15,961명, 피검 46,948명, 피소(被燒)교회당수 47개 처, 학교수 2교, 민가 715호라는 숫자로 나타나고 있다”라는 삼일운동시의 피해상황을 보도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해 놓은 것이다. 또한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선생은 당시 재학중이던 기독교 청년회관 영어과 학생들과 함께 삼일운동에 참여했다. 다음은 선생의 회고. “전 민족이 일제의 학정에 항거하여 자주독립을 선언한 삼일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때 덕수궁 앞에 나가서 만세를 불렀다.” “우리들[영어과 학생들]도 덕수궁 앞으로 나가서 만세를 불렀지. 그래서 일본 경찰에게 혼도 나고….”
≪3·1 운동 서 덕수궁 앞에서의 시위 장면≫
그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천주교회 지도자들의 입장과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에 천주교측 인사는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외국인 주교들이 정교분리론을 견지하며 영적인 구원만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삼일운동을 맞아 선생은 민족을 의식한 천주교 신도가 되었다. 신학교 수업시간 선생은 “만세소리를 들으면서 평상시의 그와는 달리 격앙된 어조로 조국의 현실을 비판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노기남 대주교가 말하는 당시 운석 선생의 언행. “그가 우리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지 3년이 되던 해에 3·1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우리는 신부 지망생이지만, 어찌 이 나라의 아들들이 아니랴! 우리도 밖에 나가서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학교 규율과 외국 신부들의 제지로 우리는 밖에 나가지 못했다. 그날은 물론 수업을 잘하지 못했다. 나는 몹시 흥분한 그분을 보았다. 그는 수업을 하지 않고, 3·1운동에 관한 이야기만 해 주었다. ‘이건 천주님의 뜻이요. 이 거족적 봉기를 일으키게 한 분들은 대개가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입니다. 천주님께서 그분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천주님께서 그분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독립을 찾아야해요. 민족의 얼을 찾아야지요. 천주님께서 그런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침착하면서도 격앙된 구석이 있는 목소리였다.”
≪노기남 대주교≫
선생이 학생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던 다른 이유는 그가 민족과 신앙을 분리하려는 교단의 방침과는 달리 민족과 함께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제자들에게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학교 규율이 워낙에 엄하여 신부 아닌 평신도 선생들은 그들이 단지 ‘평신도’라는 이유만으로 수업 외의 시간에 신학생들과 대화하는 것조차 금지될 정도”로 외부와 단절된 채 학업을 하고 있었던 신학생들에게 민족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주는 선생의 강의시간은 충격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3·1운동을 맞아 운석 선생은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중요성을 신학생들에게 일깨웠다. 또한 그는 일제의 무력 탄압에 의해 독립의 가능성이 무산되어 가는 속에서 신학생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다시 노 대주교의 회고를 들어보자. “우리는 며칠 동안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 그 대신에 그를 통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불붙듯 일어나는 만세사건에 관하여 자세히 전해들을 수 있었다. ‘왜놈들의 탄압이 심해져 우리의 독립운동은 실패로 돌아갈지라도 세계의 인류는 우리를 기억할 것이며 천주님은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요. 우리의 신앙심이 약해지지 않는 한…”
뮈텔 주교의 기록에 의하면, 운석 선생이 근무하던 신학교에서도 교회의 입장에 반해 3·1운동에 참여한 신학생들이 존재했다. “올해 우리 용산 신학교에서는 독립운동 때문에 온갖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학생들이 거기에 가담한 것으로 인해 좀 어려웠습니다. 철학과 및 신학과 학생들은 이 때문에 성소를 잃은 것 같았고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징계 처분으로 올해에는 서품식을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운석 선생은 전교분리 원칙을 고수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한 신학생들을 퇴교 조치하는 암울한 상황을 맞아 민족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그들의 사명을 일깨움으로써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다시 이어지는 노 대주교의 회고담. “독립운동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려준 사람은 장 선생이다. 장 선생으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주로 바깥 세상의 것이었다. 나는 궁금한 것을 들었고 그는 내 궁금증을 차근차근히 풀어 주었다. 그의 이야기는 주로 민족과 신앙에 대한 것이었다. ‘큰일 났어. 왜놈들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거든…. 뜻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하지만, 그게 수월한 일은 아니거든. 백성들에게 필요한 건 지도자야. 그러나 우린 지도자를 갖고 있지 못해. 찾지를 못하는 거지. 상해임시정부나 미국에 건너간 독립투사들의 진정한 지도자는 오직 한 분이 계셔. 천주님이야. 그러나 몽매한 백성들은 그걸 몰라, 일깨워 줘야 돼. 우리에겐 오직 천주님이 계시고, 천주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줘야 해. 맨주먹으로는 왜놈들의 총칼을 당해내지 못하지만, 신앙심과 천주님 앞에서는 무기란 무력한 것이지. 모든 동포에게 천주님을 믿도록 우리가 노력해야겠는데…"
운석 선생은 제자들에게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는 것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길임을 일깨움으로서, 3·1운동을 맞아 민족과 신앙 사이에서 번민하는 그들의 상처 입은 가삼을 달래주고 앞길을 밝혀준 사표(師表)였다. 또한 선생 자신도 민족의 복음화가 독립에 기여하는 길일임 굳게 믿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아니 자임한 사명인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갖추어야 할 신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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