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석 선생이 유학을 꿈꾼 이유는 세속적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을 좀 더 연구하고 자신의 수련을 쌓는 한편 일제의 피압박민족인 된 이 나라 국민들에게 참된 교육을 시켜 후일에 천주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톨릭을 전교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침내 운석 선생은 1920년 3월 21일 기독교 청년회관 영어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같은 해 미국 유학 길 오른다. 일제는 식민통치 전기간에 걸쳐 한국인이 서구에 유학하여 수준 높은 고등교육을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국인이 일본 이외의 다른 선진국으로 유학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특히 선생이 회고하는 바와 같이 그가 유학을 결행한 1920년은 삼일운동 직후였던 관계로 더더욱 미국행이 어려웠다. “평소에 바라고 기다리든 도미는 드디어 1920년에 실현되었다. 그 전해는 기미년 3·1운동이 있던 터이라 한인 학생의 도미 유학이란 좀처럼 여권관계로 바라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여러 날을 두고 각 방면으로 모책(謀策)한 결과 도미가 가능하게 되어 그해 11월에 시애틀에 상륙하였다.”
≪운석 선생이 용산 예수 성심신한교 진(陳) 베드로 신부에게 본낸 1920년 11월 28일자 서한≫
운석 선생의 유학은 어떤 배경에서 누구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을까? 선생이 말하는 “모책”의 경위는 이러하다. “마침내 그 때 미국 메리놀 외방 전교회 총장 월시 신부가 아주(亞洲) 전교 실정을 시찰하러 중국 기타 몇 나라를 역방하고 귀로에 한국에 들렀을 때 그 분이 중국 상해 부호 주씨(朱氏)의 아들 형제를 대동하고 미국 유학을 주선하다는 소식을 듣고 선망(羨望)을 금할 길 없어 가친께 나도 도미하게 하여 달라고 연일 강청을 계속하여 드디어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 때는 기미(己未)년 3·1운동 때라 일정하 한국 청년의 도미유학을 허할 리 만무하다. 그 익년인 1920년에 이르러 여권 신청을 내고 몇 달을 기다려도 종무소식이다가 천신만고 끝에 겨우 출급(出給)되어 그해 11월에 도미한 것이다.”
당시 조선의 가톨릭교회에서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만으로는 미국 장로교 계통의 개신교가 교세를 떨치고 있던 평안도 지역의 포교가 힘들다는 판단을 하고 이 지역의 선교를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일임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 전교회장 월시 신부가 1919년에 한국을 방문하는 등 평안도 지역 포교를 위한 준비에 들어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가톨릭 교회도 이를 지원할 인재의 양성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당시 서울 교구장 뮈텔 주교는 이를 위해 자신과 특별한 친분관계를 갖고 있던 장기빈 옹의 자제들을 활용하려 하였다. 뮈텔 주교는 윌쉬 신부에게 운석 선생과 동생 장발을 가톨릭계 대학에 입학을 주선해 주도록 요청했으며, 정혜(구네군다), 정온(마리아) 두 여동생과 운석 선생의 처조카 김교임(金敎任, 막달레나)도 메리놀 수녀회 입회를 추천했다. 이에 따라 운석 선생은 1920년에, 장발 씨는 1923년에, 그리고 정혜 등 3인은 1922년에 도미하였다.
요컨대, 운석 선생은 삼일운동으로 고양된 민족의식에 고무되고 여기에 천주교 교리 등 선진지식 습득욕구도 작용하여 유학을 결심하였지만, 이러한 계획은 선각했던 부친 장기빈 옹의 인도와 가톨릭 교회의 선교방침에 따른 지원이 있었기에 실현될 수 있었다.
운석 선생이 미국에 도착한 지 한 달이 못된 1920년 11월 27일자로 자신이 몸담고 있던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진(陳)베드로(Guinand, 기낭) 교장신부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서한에는 유학 길에 오른 선생의 일정의 소상하게 나와 있다.
이 편지와 선생의 『친필 연보』에 의하면, 선생은 1920년 10월 2일 출국하여 다음날 밤 파리 외방선교회의 지부가 있는 고베(神戶)에 도착해 열흘 동안 교회일일을 보았으며, 17일에는 요코하마(橫濱)에 내려 동경에 유학 중인 동생 발(拔)을 만났다. 19일 요코하마를 출항해 태평양을 횡담해 요즘 같으면 비행기로 10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시애틀(Seattle)에 거의 한 달이 걸려 11월 3일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메리놀(Maryknoll) 유치원의 젬마 수녀를 만나 며칠간 체류한 후 동월 8일 시애틀을 떠나 시카고(Chicago)를 거쳐 같은 달 17일 뉴욕 오씨닝(Ossining) 소재 메리놀 본부에 도착하여 메리놀 외방전교회 총장인 월시(James Anthony Walsh)신부를 찾아갔다. 의지할 데 없는 낯선 이방에 홀로 서 있던 선생의 심경을 들어보자. “여하튼 기차를 타고 미대륙을 횡단하여 5일만에 뉴욕에 도착했다. 그 얼마 전에 한국을 다녀간 일이 있는 미국 가톨릭 외방전교회장 월시 신부를 찾아갔다. 그는 아무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온 촌뜨기 한국청년을 어떻게 지도하느냐가 한동안 두통거리였겠으나 항시 친절히 대해주고 위로와 격려를 던져줌으로 안심을 주었다.
≪메리놀 외방 전교회 총장 월시 신부≫
[미국에는 1911년 미국 외방 선교회(American Foreign Mission Society)가 창립되어 성장하고 있었으며, 그 본부가 있는 메리놀(Maryknoll) 언덕의 이름을 따라 "메리놀 회"라고 불렀다. 이 회는 아시아 지역 포교에 역점을 두고 있었으며, 1916년에는 초대 총장 월시 신부가 내한하여 국내 사정을 시찰한 바 있었다.]
운석 선생은 윌쉬 신부의 도움으로 1921년 1월 4일 메리놀 전교회가 운영하는 예비 신학교인 베나드 스쿨(Venard School, Clarks Summit, PA)에 입학하여 교장 번(Patrick J. Byrne, 方) 신부의 지도하에 6개월간 영어와 기타 과목을 학습했다. 운석 선생의 표현을 빌면, “우선 언어가 부족하니 영어공부를 해야 하겠다고 자기가 운영하는 대학 예과에서 반 년간 전공을 시켜주었다. 그때야말로 3년 동안 공부했다는 내 영어실력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빈약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결사적으로 본격적 공부를 개시했다. 그 때의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꾸준히 참아가며 대학 입학 준비를 부지런히 해 나갔다”한다.
≪베나드 스쿨의 교장 번(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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