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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6. 부정적 장면상(像)의 수정을 바라며


1. 무엇이 문제인가 

 운석 장면(1899 ~1966)은 1960년 8월 19일부터 약 9개월 동안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국정을 운영하다 5․16군사쿠테타로 인해 실각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그가 1948년 정계 진출이후 보여준 많은 업적―한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과 한국전쟁시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 낸 외교적 성과 및 민주당 창당 이후 야당 지도자로서 보여준 반독재 투쟁등―에도 불구하고 그의 치적이나 사상을 논함에 있어 정치가로서 장면이 갖고 있던 어떠한 결함이 5․16 군사쿠테타를 촉발하게 하였는가라는 결과론적 인식틀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종래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정치가로서의 장면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여겨진다. 5․16군사쿠테타의 주도세력은 『한국군사혁명사(韓國軍事革命史)』(1963)에서 장면을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가로 왜곡함으로서 자신들의 쿠테타를 정당화한 바 있으며, 심지어 그의 주변인물들에게서조차 4․19 이후 혼란기의 난국을 수습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정치적 역량이 결여된―인물이었다는 평가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일례로 장면의 정계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노기남(盧基南) 대주교는 “내가 보기에는 장박사는 종교인이며 교육가지 정치가의 소양은 없는 편이었다”고 회고하였으며, 그의 지기(知己)였던 민의원 의장 곽상훈도 “운석은 난세(亂世)의 정치가로서 좀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다”고 평한 바 있었다.

 제 2공화국 시대를 연구한 학자들의 장면관 역시 대체로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부정적 장면상을 공고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연구로는 제2공화국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 학술서인 한승주의 The Failure of Democracy in South Korea(1974)와, 차기벽의 「4․19, 과도정부, 장면정권의 의의」(1975), 그리고 김정원의 Divided Korea: The Politics of Development, 1945~1972(1975)를 꼽을 수 있다. 특히 한승주는 제2공화국은 군사쿠테타가 없었어도 붕괴하고 말았을 취약한 정권이라는 결과론적 인식틀로, “장면 정권"의 붕괴 요인을 究明하면서, 장면을 평해 “결단력이 결여된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인물로서 “수동성과 자기 행동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를 특징으로 하는 “형식적” 지도자 내지 “무능한” 정치가로 묘사한 바 있다. 이들 저작은 이후 제2공화국 연구자들에게 장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전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유영준은 「장면 정권의 정치적 리더십」(1988)에서 2공화국 당시 장면이 정치력 결여와 지도자로서의 편협성으로 인해 지극히 배타적이고 편파적인 리더십의 스타일을 드러냈다고 하였으며, 김호진은 「장면의 정치이념과 리더십」(1990)에서 장면이 자력으로 성장한 지도자가 아니라 파벌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수동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정치적 반대세력을 아우를 포용력이나 위기 상황을 관리할 결단력이 결여된 인물로서, 권위주의(authoritarian), 민주주의(democratic), 자유방임(laissez-faire)의 리더십 유형 중 어떠한 유형의 리더십도 갖지 못한 소심하고 무능한 지도자로 규정하였다. 이 밖에 장면의 리더십 결여에서 제2공화국 붕괴원인을 찾은 연구로는 이정희의 「제2공화국의 정치환경과 장면의 리더십」(1995), 이달순의 「장면정권의 딜레마」(1995), 백영철의 「제2공화국의 의회정치」(1996). 그리고 지병문의 「제 2공화국과 민주주의의 실패」(1997),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유병용은 「장면정권의 성립과 붕괴」(1998)에서 5․16군사 쿠테타를 정당화하는 시각에서 장면이 이끈 민주당정권의 정책수행 능력을 폄하(貶下)한 바 있다.

 종래의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처럼 장면은 아무런 정치 활동의 경험도 없이 피동적으로 정치인으로 징발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주체적으로 관철하려는 능동형의 정치가가 아니라 파벌의 이익을 수동적으로 대변하는 꼭두각시형의 “형식적” 지도자에 머물고 말았는가? 과연 그는 결단력이 결여된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인물로서 정치적 반대세력을 아우를 포용력이나 위기 상황을 관리할 결단력이 결여된 배타적이고 편협하며 소심하고 무능한 지도자였는가? 그러나 이러한 결과론적 유추에 의해 내려진 부정적인 장면상은 그의 면모를 적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정적 평가를 내린 평자조차 장면의 뛰어난 인품이나 그의 치세에 만개했던 민주주의의 성장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아 혼선을 주기 때문이다. 즉, 노기남은 그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신앙의 정치가이자 민주주의 정치가”로, 곽상훈은 “소신대로 자유민주주의 정치”를 펼친 信念의 정치가로 평하였으며, 『한국군사혁명사』조차 “방종이나 무질서에 가까웠던 것이기는 하나 국민의 자유가 거의 최대한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고 하여 장면이 이끈 제2공화국 시기 민주주의의 성장을 부정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혹평과 호평이 상호 교차하는 평가의 아노미 현상은 양호민과 김호진에게서 잘 나타난다. 먼저 양호민은 「민주주의와 지도세력」(1961)이란 논설에서 장면정권을 지칭해 “대중의 마음으로부터의 존경받을 만한 정신적 권위”를 가지지 못한데다가 “경륜도 식견도 이상주의도 없는 퇴폐한 집단”이자 “훈련과 기율과 정신적 통합력”이 결여된 “오합지중”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릴 에너지”가 없던 무능한 정권으로 치부하였지만, 「장면시대―그 의의와 평가」(1966)라는 글에서는 장면을 “깨끗하고 온유했던 민주주의적 지도자”로 규정하면서 그의 치세가 “국민에게는 민권과 자유의 황금시대로 길이 기억될 것”이라고 호평한 바 있다. 그리고 장면의 지도력을 문제 삼았던 김호진도 장면이 “청렴과 정직의 품성”을 갖춘 “누구보다 정직하고 깨끗한 지도자로서 권력의 공익성을 중시하고 족벌주의를 배격한 도덕교사와 같은 이미지를 남기고 간 지도자”였으며, “무엇보다도 ‘교과서적’인 , ‘원칙론적’인 민주주의를 이 땅에 실현시키려고 노력”한 정치가로서의 공적을 특기(特記)한 바 있다.

 필자는 이러한 장면상에 보이는 호오(好惡) 내지 긍부(肯不)의 착종현상은 결과론적 인식에서부터 초래된 오류라고 본다. 따라서 필자는 올바른 장면상의 정립을 위해서는 그에 대한 평가의 척도가 군부쿠테타를 초래한 “무능한 정치가”라는 결과론적 인식틀에서 벗어나 그의 정치적 이상이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라는 정신사(精神史)적 척도에서 평가되어야만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김세중의 지적처럼 장면이 이끈 민주당이 “수호하고 실천에 옮기려 했던 자유민주주의 이념은 오늘날에도 한국정치의 살아있는 목표가 되고 있으며 또한 민주당을 기반으로 해서 성장했던 정치인들은 이 시점에도 한국정치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동시에 제2공화국 붕괴 즉, 민주주의의 좌절의 일원인으로 지적되는 “파벌정당으로 표현되는 민주당의 조직과 행태에서 표출되던 문제점은 아직도 한국정당이 극복해야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래의 연구를 일별(一瞥)할 때, 장면의 정치 활동과 사상을 그가 남긴 1차자료를 통해 본격적으로 구명(究明)한 성과는 전무하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장면이 남긴 각종 회고나 기고문 및 연설문 등을 활용해 장면의 정치사상 형성 배경과 치적 및 정치사상을 분석하되 기존 연구에서 왜곡․오도된 그의 개인적 특성이나 이미지를 바로잡고 간과된 정치사상의 제 특징을 구명하는데 중점을 둠으로써 올바른 장면상의 정립과 그의 정치사상에 대한 이해에 일조(一助)해 보려 한다.


2. 장면의 정치사상 형성 배경에 대한 오해를 지적한다.


 기존의 장면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연구들에 의하면 정치가로 등장하기 이전 장면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장면은 1899년 인천의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1917년 수원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YMCA 영어과를 거쳐, 3․1운동 직후 미국에 유학해 베나드 대학 예과와 맨해튼 대학에서 교육과 종교를 5년간 수학했으며, 1925년 귀국 이후에는 가톨릭 평양교구에서 몇 년간 일하다가 1931년부터 정계진출 전까지 가톨릭계 동성 상업학교 교장으로 근무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가로 등장하기 전까지 그는 교육자나 종교인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렸기 때문에 “건국직후 정치지도자들이 식민지시대에 적극적 혹은 소극적으로 항일운동을 한 전력에 비해 그의 일제시대 생활은 너무나 순탄”했다고 보거나, 이러한 전력으로 인해 그의 전생애는 “일반적 수동성과 절제와 조심성”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고 평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평은 그 실증적 오류는 논외로 하더라도, 5․16군사쿠테타를 허용한 원인을 그의 인간적 약점에서 찾으려고 한데서 비롯된 왜곡임이 분명하다. 즉, 기존연구들은 장면의 사상 형성이나 행동의 이해에 관건이 되는 가족․교육․종교적 배경에 대한 분석을 등한히 함으로써 그들의 선입견을 충족시키는 단편적인 이력 나열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먼저 장면의 가족․교육․종교적 배경을 심층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점을 새롭게 밝혀냈다. 먼저 장면은 선각한 부친의 지도하에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는 신지식을 습득했을 뿐만 아니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안정된 내면세계를 영위할 수 있는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장면은 이러한 자산을 바탕으로 자기 수양과 자녀 양육 및 부부생활 즉, 수신과 제가에 성공한 삶을 살았으며, 이러한 가정적 안정을 바탕으로 선생은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국가와 사회에 되돌리는 구도자적 헌신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를 부정적으로 평하는 평자들도 인정하는 청렴성과 정직성 등은 정치만이 아닌 어떤 분야의 지도자도 갖추어야 할 기본적 품성으로 프란치스꼬 제 3회에 입회 서약한 장면의 경우 그가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는 한 바뀔 수 없는, 즉 그의 전 생애를 일관하는 그의 인간적 특성이었다.

 다음으로 그는 농림학교 졸업자로서 일제 식민지 관료로 출세의 길이 보장되었지만, 이에 안주하지 않고 교육과 복음화를 통해 민족의 독립에 기여하겠다는 이상을 세우고 이를 위해 미국 유학을 단행하였으며, 귀국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시행되던 상황 속에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활발한 저술활동과, 청렴성과 감화력, 대담성 등을 갖춘 종교인과 교육자로서의 활약을 통해 이를 실천해나간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끝으로 그는 민족을 우선시한 신앙인으로서 용산 성심신학교 교사시절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자신의 독립정신을 신학생들에게 전파하였으며, 동성사업학교 교장시절 자신의 교육이상에 반하는 일인 교무주임을 퇴직시키는 등 복음화와 교육을 통한 민족 독립을 위한 미래투자에 헌신하였다. 물론 그는 그를 부정적으로 평하는 평자들의 지적처럼 일제하에 뚜렷한 항일경력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하 국내에서 활동한 모든 인사들이 갖고 있는 공통의 한계이며, 그가 일제의 전면적 탄압이 가해지지 않는 범위내에서 자신의 이상을 일관되게 관철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교육자로서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일제에 전면적으로 대항하는 교육활동은 할 수 없었을 것이고, 한국 천주교단의 대표격이었던 그로서는 교단에 대한 일제의 박해를 초래할 저항적 종교활동을 전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래 연구들에 의해 고정화된 장면의 이미지 “일반적 수동성과 절제와 조심성”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그는 안정된 가정과 종교적 수양을 통해 얻은 정신적 안정을 바탕으로 자신이 세운 목표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게 실천한 진취적, 능동적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신념을 억압적 수단이 아닌 마음으로부터의 감화를 통한 방법으로 주변인들에게 전파함으로써 주변인물들의 삶에 지속적, 장기적 영향을 준 신념의 인간이었다고 평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3. 장면은 과연 지도력이 결여된 무능한 정치가였나?
 

 장면은 1946년 2월 천주교 대표로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 의원에, 그리고 동년 12월 입법의원의 의원으로 지명된 이후 1948년 서울 종로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제헌국회 의원이 됨으로써,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동년 9월 그는 제 3차 UN총회 파견 한국 대표단의 수석대표로 파견되어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어냈고, 12월에는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어 다음해인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에 미군과 UN군의 참전을 이끌어내어 북한군의 침략을 막는데 발군의 외교역량을 발휘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로 지명된 그는 1951년 2월 3일부터 제 2대 국무총리에 취임했으며, 재임 중이던 1951년 10월 제 6차 유엔총회에 수석대표로 참석하였다가 간염으로 입원․치료를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되어 1952년 4월 20일 사임할 때까지 1년 2개월간 재임하였다. 이후 그는 독재화되어 가는 이승만 정부에 저항하는 반독재운동을 동참하였으며, 1955년 민주당을 창당하여 최고의원이 되었다. 1956년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부통령에 당선된 그는 1956년 8월 15일부터 1960년 4월 23일 사임하기까지 3년 8개월간 명목뿐인 부통령직무를 수행하였다. 4․19혁명 이후인 1960년 7월 29일 그는 제 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8월 19일 내각 책임제 제 2공화국의 국무총리로 인준되어 다음해 5월 16일 군사 쿠테타로 실각하기까지 약 9개월간 재임하였다.

 기존의 부정적 장면상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한승주의 연구에 의하면 장면은 해방이전 장면이 종교인이나 교육자로서 활동한 것 이외에 어떠한 “정치 활동의 경험도 접촉도 없이” “가톨릭적 배경과 영어실력” 덕택에 피동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그리고 “강한 결단력과 즉각적 행동이 필요한 상황에서 상당한 정도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행동을 취한 “형식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이승만 체제에 의해 숙청되지 않고 있다가 민중의 힘에 의해 일어난 4․19혁명에 편승해 내각 수반에 오른 이후에도 “항상 수동적이고 자기 패배적인 행동 경로”를 취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인식은 후속연구들에 연면히 계승되어 정치가로서 장면의 진면목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는 몇 가지 중대한 결함이 있다.

 첫째, 과연 장면은 “가톨릭적 배경과 영어실력”만으로 타의에 의해 피동적으로 정계에 “징발”된 수동적 지도자였는가? 일제에 의해 한국인의 정치참여 기회가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던 식민통치기간 중 양식 있는 한국인이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민족의 미래에 투자하는 교육운동과 이민족의 지배하에 상처 입은 민족의 영혼을 달래는 종교운동에 투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귀국 후 일제 치하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그는 민족의 장래를 위해 교육사업과 천주교 전파를 위한 교회활동에 몰두함으로써, 나라 잃은 민족의 정신적 독립 기반을 다지는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일제하에서 장면은 교육과 종교활동을 통해 그는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했으며, 해방된 조국은 그의 능력과 식견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일제의 정치참여권 박탈로 인해 해방 이후 국정을 운영할 정치적 경험을 가진 인재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소수의 인사이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최고수준의 교육을 받고 종교․교육활동의 경험을 갖고 있던 장면의 정계진출은 불가피했다. 따라서 장면의 정계진출에 있어 “가톨릭적 배경과 영어실력”은 이를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임에 틀림없지만, 보다 중요한 결정 변수는 그의 선택 내지 결정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조국의 복음화를 통해 국가의 민주화를 도모해야한다는 뚜렷한 소명의식을 갖고 정계에 투신한 인물이자, 이 소신을 평생 관철한 신념의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리스도교 정치가에게는 “양도할 수 없는 하늘이 준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그 노력을 집중하고, 종교 및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민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생활의 민주적 발달”을 도와야 할, 그리고 “정당의 정책에 그리스도교 원리를 침투시키고, 정부에 그 실시를 촉구함으로써 나라에 영향”을 주어야할 소명이 부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소명의식이 단순한 구두선이 아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례로 제헌국회 의원 시절 그는 헌법 제 1장 31조에 “혼인의 순결과 보호”라는 가정의 순수성에 관한 법조문의 삽입을 제안․채택시켰으며, 이를 높이 평가한 모교 맨해탄 대학과 포담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학위를 수여한 바 있다. 이 법조문은 그가 평생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몸소 실천하고 지켜온 결혼과 가정생활의 반영이었다. 따라서 장면은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언행일치의, 그리고 수신․제가에 성공한 자신의 삶을 치국에 반영하려한 표리일체의 정치가였다. 따라서 그가 피동적으로 정계에 징발되었다는 인식은 그가 주체적 실천의지가 결여된 ―파벌의 이익을 대변하는―꼭두각시형의 “형식적” 지도자라는 추론을 정당화하려 한데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둘째, 과연 그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시세를 잘타 4․19혁명에 무임승차해 내각 수반에까지 올라선 파벌의 이익만을 대변한 꼭두각시형의 “형식적” 정치인에 불과하였는가? 국가의 수립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지만, 국가로서의 인정여부는 다른 국가들에 의해 국제적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은 단독 정부수립을 선포했지만 고립을 면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승인이 필요했다. 또한 그가 주미대사로 재직중 발발한 한국전쟁도 남북한군의 전력상 격차로 인해 국제적 지원이 없었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한 것이었다. 즉,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과 한국전쟁시의 UN군 파병은 국가의 존립 그 자체를 좌우하는 중차대한 문제였으며, 이 과업의 성공적 완수는 장면 개인의 역량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정치가로만이 아니라 외교관의 세계에서도 초심자였지만,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훌륭히 해결함으로써 차후 한국을 이끌어갈 지도자로 부상한 것이다. 이러한 성가를 배경으로 그는 이승만 정부하의 제 2대국무총리,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2년 이후에는 미국 측에게서도 이승만을 대체할 한국의 차기 지도자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따라서 장면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에 입각한 연구들이 정치가로서의 장면의 성장 요인을 그를 필요로 하는 정치세력에게 충분한 이용가치가 있는 경력의 소유자이면서도 그들이 마음대로 이용하기 쉬운 꼭두각시형의 “형식적” 지도자이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재고를 요한다고 본다. 일례로 한승주는 이승만의 제2대국무총리 지명과 원내 자유당인사들이 그를 지도자로 선발한 이유를 이러한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1956년 그의 부통령 당선 이유도 “그 자신의 득표 능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신익희의 급서와 자유당 및 동당 부통령 후보의 심한 비인기에 1차적으로 기인”된 것으로 오도하고 있다. 그러나 장면은 그 당시 그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정치가보다도 뛰어난―국제 외교무대에서 검증된―능력과 신망을 얻고 있었던 지도자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셋째, 장면은 과연 한승주의 연구에서 지적된 것처럼 “항상 수동적이고 자기패배적 경로”를 취한 무능한 정치인이었나?. 그의 연구에 의하면, 장면은 주체적 판단능력과 책임감이 결여된 “형식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부산정치파동에 즈음한 1952년의 “반이승만 정치인 집회”나 군사쿠테타 당시와 같이 “강한 결단력과 즉각적 행동이 필요한 상황”에 대해 “항상 수동적이고 자기패배적 경로”를 취했던 것으로 아래와 같이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장면은 강한 결단력과 즉각적 행동이 필요한 상황에서 상당한 정도 소심하였고 우유 부단하였다. 김도연에 따르면 1952년 열린 반 이승만 정치인들의 집회에서 장면은 주된 연설자이자, 이 승만의 헌법 개정 계획을 반대하는 중요 선언문을 낭독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친 이승만 테러리스트들이 이 회합을 방해하리라는 것을 알게되자 여하간에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결석은 선언 낭독과 회합 자체를 지연시켰는데, 결국 이 회합은 정체 불명의 난입자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회합이 마칠 무렵, 수십 명의 깡패들이 참석자들을 공격하여 조병옥, 서상일, 김창숙 등 반 이승만 정치인들이 중상을 입었다. 이 시기 동안 장면의 완전한 정치무대로부터의 은퇴는 1961년 5월 군사 쿠테타 이후 닷새[sic] 동안의 그의 잠적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9년전의 상황에서처럼 그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았고 그는 존재하는 위기 상황에 관하여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  

 과연 위의 글에 묘사된 바와 같이 장면은 유약하고 결단력이 결여된 책임회피형의 무능한 정치가였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먼저 그의 우유부단함을 입증하는 논거로 제시된 1952년의 집회 불참 이유에 대해 위의 글에서는 테러 위협을 사전에 파악한 장면이 이를 두려워하여 회의에 불참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당시 그는 6차 UN총회 참석시 발병한 간염 치료차 미군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당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병원과 외부사이의 연락을 맡았던 한창우씨의 회고에 따르면 장면의 불참은 병원장의 제지에 따라 불가피하게 참가하지 못한 것이었다. 또한 그가 테러를 두려워해 이 회합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위 글의 지적은 1956년 저격 기도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음에도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여해 암살을 모면한 “부통령 저격사건” 당시 장면이 취한 행동―왼손 피격에도 불구하고 연설을 마친―과 상치한다. 이 사건후 장면은 자신의 심경을 밝힌 글에서 불길이 번지는 초원에서 병아리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깃털 속에 병아리를 보호한 어미 닭의 이야기를 예화로 들며 국민의 권리를 대변하기 위해 자신의 身命을 바칠 것을 다짐한 바 있다. 부정적인 평자도 인정하는 그의 인품으로 보아 이 글에서 천명한 장면의 의지의 신실성은 신뢰할 수 있다 하겠다. 



《1961년 5월 18일 내외기자에게 하야성명을 발표하는 운석 선생》



《사퇴 순간의 운석 선생》






《군사 혁명재판 관계 소송 기록》




《군사 혁명재판정에 서다》
「1962년 9월 2일 혁명재판소 법정에서 증언한는 모습」




《포승에 묵인 민주주의의 꿈》




《출감》



 다음으로 장면은 군사쿠테타 직후 잠적하여 위기상황에 관해 아무조치도 취하지 않았는가? 이 논란 많은 문제에 대해서 여태껏 주목되지 못한 장면 자신의 해명을 통해 적어도 군사쿠테타 저지의 실패가 그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반론에 대하고자 한다.


"사세 부득이 그 자리를 피했다. 반도 호텔에 군인이 들어오기 전 불과 10분 앞서였다. 가야 할 목적지를 정하고 나선 것은 아니다. 우선 길 건너 미 대사관으로 가보려 했으나 문이 절벽으로 잠겨 있었다. 무교동 골목으로 빠져 청진동으로 달려가 한국일보사 맞은편 미 대사관 사택의 문을 두드렸다. 어떤 엄명이 내렸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잠시 피신해 정세를 보기 위해서 아무도 짐작 못할 혜화동의 수도원으로 가 보았다.…혹자는 겁에 질려 꼭꼭 숨어만 있던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그런 것만은 아니다. 거기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므로 보류해 둔다…쿠테타가 지난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장도영이 양다리를 짚지 않고 처음부터 굳세게 나갔거나 매그루더를 만난 윤대통령이 진압할 뜻을 표시했다면 5․16정변은 결코 성공되지 못했을 것이다. 윤대통령은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기를 바랐던 바이고, 먼저 내통을 받았을 때에도 기대하고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올 것이 왔다”는 말을 하게 되지 않았던가. 윤대통령의 이러한 심사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5월 18일, 나는 정식으로 사임을 발표했다. 내가 사임을 결정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윤대통령의 태도를 알았기 때문이다. 쿠테타를 지지하는 태도를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17일경에는 알게 되었다. 미 대사관으로부터 윤씨의 태도에 대한 연락을 받았다. 윤씨가 그렇게 나오는 한 자기들은 별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군 쿠테타를 지지할 뿐 아니라 쿠테타 진압을 방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쓰고 있음을 알았다. 대통령이 김모 비서를 1군사령관 李翰林에게 보내어 쿠테타 진압을 저지하도록 했다. 국군 통수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의 태도가 이러한 것을 알고는 쿠테타가 진압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박정희 의장 대장 진급 기념사진》

  내각 수반이었던 장면이 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은 군에 대한 예산 통제권이 주된 수단이었으며, 실질적 군 통수권은 대통령에게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쿠테타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행태와 제 2공화국 출범 한 달도 안된 상태에서 준비된 쿠테타의 배후는 향후 究明되어야할 미해결의 과제이다. 장면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군사쿠테타 저지하지 못한 것이 그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적어도 그는 군사쿠테타 발발 3개월 뒤인 8월 16일 “나의 心境을 말한다”라는 글을 신문에 기고해 헌정 중단의 전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국민 앞에 진솔히 사과하는 책임정치를 구현한 정치가였다. 아마도 그는 한국의 헌정사상 자신의 정치행위에 대해 책임을 진 유일한 정치가일 것이다.


"어느덧 5․16으로부터 만 삼개월이 되어갑니다. 내가 총리직을 사퇴하면서 응당 국민에게 내 심경을 전하여야 될 줄은 알았으나 기회도 만만치 않고 또 물러나는 처지에 말할 염치도 없는 것 같아서 침묵을 지켜왔던 것입니다. 이제 8․15를 맞이하게 되니 가슴속에 회포를 금할 수 없으며 생각 가는 대로 존경하는 동포 여러 문께 보내는 글을 몇 자 적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동포 여러분! 청년학도들이 흘린 고귀한 피의 값으로 이루어진 사월혁명이후 국민의 절대한 신임과 기대 밑에서 민주당이 집권하게되었을 때 국민전체로서나 민주당 자신으로서나 새시대의 앞길에 대하여 한없는 꿈과 희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집권 구 개월 미만에 모든 것이 뜻한 바대로 속히 이루어지지 못하여 가혹한 현실은 환멸과 초조를 불러내고 마침내 의회정치의 중단이라는 중대한 사태를 가져왔으니 이에 재한 모든 책임은 응당 민주당이 짊어져야 할 것이오 특히 영도의 책임을 가졌던 본인의 두 어깨에 전적으로 있음은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민주당정권은 일을 잘 해보겠다는 의욕에서 불타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착잡다단(錯雜多端)한 환경 밑에서 과거에 누적된 잔재를 쓸어냄과 함께 새로운 건설을 급속 추진해야할 이중의 지난한 과업을 수행해보려고 본인과 본인의 동료들은 그야말로 침식을 잊을 정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심노작(苦心勞作)한 것은 숨김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 내에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국민의 커다란 기대에 부응되지 못하였으니 이제 와서 해방 십육년간을 온갖 고난을 극복하면서 장래만을 믿어온 삼천만동포에게 무슨 말로써 사과해야할지 알지 못하며 아울러 사월혁명의 꽃인 학도제군에게나 지금은 해산되어버린 구민․참 양원의 선배동지 여러분이며 십유여년을 독재에 항거하여 피눈물의 싸움으로 집과 몸을 희생하여온 전민주당당원 여러분 앞에 충심으로 사과하는 바입니다."

《1961년 11월 4일 박정희 의장의 대장 진급식》

 이상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장면은 피동적으로 정계에 “징발”된 수동적 지도자가 아니라 뚜렷한 소명의식을 갖고 정계에 투신한 능동형의 신념의 정치인이자, 자신의 정치철학을 공사간에 일관되게 관철한 稀有의 실천적 정치가였다. 또한 그는 파벌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꼭두각시형의 “형식적” 지도자로서 4․19혁명에 편승해 내각 수반에 오른 것이 아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이나 한국전쟁 시의 유엔군 파병 등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상황 타개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음으로서, 그리고 반독재 투쟁을 통해 성망(聲望)을 높임으로서 성장한 인물로 미래의 한국을 이끌 차기 지도자로 주목받던 그의 경쟁상대들에 비해 출중한 자질을 갖춘 대표적 정치가로서 합헌적 절차를 거쳐 집권한 정치가였다. 사실 장면의 정치가로서의 자질 시비의 주된 요인인 5․16군사쿠테타 진압 실패는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 자체의 후진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한 사람의 정치가에게 그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정치행위에 책임을 진 책임정치의 구현자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총리시절 집무실에서 도시락으로 식사하는 운석 선생》



4. 장면의 정치사상은 무엇을 지향했나.

 장면은 정계 진출 이후 자신의 정치사상을 피력하는 각종 연설문과 기고문을 남겼다. 여기서는 이들 글 중에서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1967)에 수록되어 있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비그리스도교국에 있어서 사회와 정치생활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공헌」(195?), 「아시아를 위한 한국의 고투」(1954), 「부통령당선에 감격하여 나의 소신을 피력한다」(1956), 「부통령 광복절기념 연설」(1957), 「민주당 부통령후보 지방유세, 대구에서」(1960), 「민주당부통령후보 지방유세, 부산―나의 정치이념 “자유”―」(1960), 「국무총리 국회에서의 시정방침연설Ⅰ․Ⅱ」(1960), 「제2공화국 경축사」(1960), 「국무총리 민의원에서의 시정연설 Ⅲ」(1961),「제5회 신문주간기념연설」(1961)를 비롯해, 「민족갱생의 길―청년과 더불어」(『신세계』7, 1956), 「나의 심경. 나의 신변 주위(『신태양』3, 1957), 「언론자유와 그 책임―관훈클럽 제4주년기념식에서의 장총리연설」(1961), 「나의 심경을 말한다」(『동아일보』1961, 8. 15) 등과 같은 자료에 보이는 장면의 정치사상을 살펴보려 한다. 이러한 글들에 표출되는 장면의 정치사상은 크게 그리스도교적, 자유민주주의적, 국제주의적 요소로 구분된다.  



(1) 그리스도교적 요소 


 장면의 사상과 생애를 관통하는 기본 정신은 그리스도교 정신의 구현과 실천이었다. 그의 정치사상의 기저에는 “자연법과 그리스도교의 도덕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비그리스도교 국가인 한국에서 “유물론과 공산주의의 그릇된 가치” 즉, “현대의 힘있는 오류”가 침투하는 것을 막는 “힘” 내지 “해독제” 역할을 할 그리스도교 정신의 보급을 도모함으로써 국가의 번영을 담보할 수 있다는 복음주의적 정신이 관통하고 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교 정신의 보급은 "국제적인 입장과 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저향"에서부터 “커다란 人望”을 얻고 있으며, “세계에 두루 퍼져 있는 영적, 또는 종교적인 큰 조직체로서의 가톨릭 교회”와 그 신도가 담당해야 한다고 보고 이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가톨릭 교도는 그 국민의 번영을 위하여 저마다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교 원리에 완전히 일치된 그의 개인적, 사회적, 정치 생활로써 공생활의 온 분위기를 안정시키고 높일 수 있으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가톨릭 신도로서 모범 생활을 보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사도적 활동의 기초이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그의 가족 또는 그가 접하는 집단과 단체를 그리스도교화함으로써 비그리스도교적인 그 환경에 감화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감화는 더 넓게 그 나라의 온 사회적 및 정치 생활에까지 미칠 것이다. 그리스도적 이상, 그리스도의 정신은 그 생활에, 그의 말에 ,그의 모든 접촉, 혹은 감화의 기회에 구현되어야 한다. 그 사명은 사람과 사귀어 ‘땅을 가는 것이며, 씨앗을 뿌리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영속적인 수확을 바라고 싹트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디에 있든 간에 모든 그리스도 신도가 해야 할 개인의 사명이다. 한 나라의 공생활에 대한 이 씨앗의 그리스도적 감화는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미한 것이지만 철저하고도 결정적인 것이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교 정신의 구현을 위해 가톨릭 정치가에게 부여된 소명이 “천부의 인권을 옹호하고 종교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임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생활의 민주적 발달”을 돕는데 있음을 천명하면서 이의 실현을 위한 도정에서 마주치는 장애를 “그리스도교 원리를 따라 깊은 지혜와 굽힐 줄 모르는 결심”으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즉, 그는 그리스도교 정신의 참된 구현의 관건은 한 국가와 사회에 진정한 자유주의와 민주민주의의 실현에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2) 자유민주주의적 요소  


 장면에게 있어 자유민주의야말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배우고 맛본” 미국 유학시절부터 운명의 순간까지 그 실현을 꿈꾸어 온 화두였다. 장면에게 있어 이의 실현의 계기된 4․19혁명 이전 제 1공화국 시대는 “우리가 4.19전까지의 12년 동안을 역사에서 도려내는 재간이 없는 한 우리민족과 더불어 영원히 남게 될 민족의 오점”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정치란 “主權在民의 原則下에 國民全體 또는 各個國民의 政治的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여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현실이 이에 반한 원인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自然發生的인 밑으로부터의 것이 아니라 外來的이요 접붙이 가지와 같은 上部組織에 불과하기 때문에 강력한 민의가 아직 성장하지 못하고 따라서 執權者 만능을 制裁할 힘의 존재를 찾기 어려운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이 지체된 근본적 원인은 “제도의 缺陷”이나 “國政을 담당한 인물의 결함”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選擧民 자신들의 力量問題에 귀착되는 것이며 민주주의의 후진성”에, 실질적으로는 “국회의원(代議政治家)들의 민주정신의 불철저 내지는 실천력의 결핍”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장면은 한국이 그 후진성을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거민과 代議士”들의 의식 개혁과 “개별적 ․分化的인 시민의 의사와 이익을 공공의 일반의사 내지 이익으로 통합해 대표”하는 政黨과 “노동조합 협동조합 혹은 諸種 단체 연합” 등 “사회대중운동”의 건전한 발전과 같은 제도적 장치의 기능 발휘 및 민주주의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생산력을 증강하여 근로하는 국민대중에게 공정하게 분배됨으로써 국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는 경제적 안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참말로 민주정치―대의정치의 제도를 확립하며 그 운영을 위해서는 궁국적으로 선거민과 대의사들의 개혁을 행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민주주의 경제는 경제활동이 유력한 동기로서 또는 경제발전의 유력한 추진력으로서 개인의 창의, 재능, 식견, 경험 등을 존중하는 것이지 결코 경제계를 무정부상태로 방치하여 부익부 빈익빈의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민주주의의 이념이 자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등과 우애에 있다는 것을 상기함에 있어서랴.… 어쨌든 민주정치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배고파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백성을 그대로 두고는 가능성이 없다. 생산력을 증강하여 근로하는 국민대중에게 공정하게 분배됨으로써 국민의 생활이 안정되며 그 수준이 향상되는 것이 “데모크라시”의 전제조건이다.…정당은 민주적인 사회를 구성하는 데에 필연적인 산물이다. … 개별적 분화적인 시민의 의사를 통합하여 나가는 과제를 담당하고 나선 것이 정당인 것이다. … 정당의 건전한 발전이 민주정치 구현의 불가결한 조건일진데 국민자신의 자연발생적인 밑으로부터의 자유와 창조의 업으로서 정당이 육성되어 나가기를 소원하는 바이다. 갱생(更生)하는 민족의 새로운 질서와 공평한 복지사회의 건설은 결코 개개인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여기에는 정당을 비롯하여 노동조합, 협동조합 혹은 제종단체 연합 등 팽배하게 일어나는 사회대중운동에 의하여 이룩하는 것이다. 실로 새로운 민주조국의 건설은 아닌 조국의 흥망은 사회집단운동의 건전한 발전과 진행에 달려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즉, 그는 정당 및 각종 이익단체가 제 기능을 발휘하는 다원적 시민사회의 형성과 그 안정을 뒷받침하는 경제적 성장이 병행될 때 한국의 후진성은 극복되고 그가 꿈꾸는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은 정계 진출 이후 이승만 독재에 저항하며 꿈꾸었던 그의 정치적 이상은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재임시 “민주정치제도의 재확립”이 정치면에 있어서의 민주당 정부의 최대목표인 것과 같이 경제면에 있어서의 우리의 최대 목표는 자립경제의 실현입니다“라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정치제도의 재확립”과 “ 자립경제의 수립을 지향하는 ”경제제일주의“의 정책 목표로 구현되었다. 당시 그가 확립하려한 민주정치란 “국가권력이 시민의 자유를 부정하게 침해하지도 않고 시민의 자유가 정당한 국가권력의 행사를 무턱대고 적대시”하지도 않는 국가권력과 다원화된 시민사회의 이익추구가 서로 균형을 이루는―“국민전체가 협력하여 나가는 ‘지민(之民), 의민(依民), 위민(爲民)’의 정치”였다. 또한 장면은 민주정치의 가치는 “지도자의 질이나 정책의 내용에 대한 가치보다도 오히려 만인이 협력하여 그러한 가치를 찾는
그 과정(過程)에 있다”는 그의 신념을 충분히 실험해보려 하였으며, 이는 방종에 가까운 시민들의 자유구가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상황을 맞아서도 시민들에게 자율적 각성의 시간을 주려했던 다음과 같은 그의 회고에 잘 나타난다.  

"연일 계속되는 데모로 인해 사회가 혼란에 빠졌지만, 민주당이 집권한 후 집권전의 공약을 위배할 수가 없었다. 내각 책임제를 실시하면서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독재적인 수법으로 정권을 유지한다면, 이는 국민을 배신하는 것밖에 다른 변명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혼란기라 해서 국민을 배신할 수 없었다. 정권을 잡은 우리로서 무슨 핑계로든지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총검에 의한 외형적 질서'보다도 '자유 바탕위의 질서'가 진정한 민주적 질서라고 믿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자유당 정권 하에 억눌렸던 국민들이 자유가 허락된 이때에 쌓이고 쌓였던 울분을 한 번은 마음껏 발산시키고 나서야 가라앉을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뻔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은인 자중한 것이다. '국민이 열망하던 자유를 한 번 주어보자'는 것이 민주당 정부의 이념이었다. 갈수록 혼란을 더해 가는 사회상황 속에서 우리는 철권으로 억압하는 대신 시간으로 다스리고자 했다. …귀와 입으로 배운 자유를 몸으로 배우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단단한 초석이 되는 것이다.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 혐오를 느낄 때 진실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의 자각에 기반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이라는 장면의 선각적 정치사상은 5․16 군사 쿠테타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한국의 민주주의 발달과정에서 항상 꺼지지 않고 빛을 발하며 좌표로서 기능한 등대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 마디로 장면은 시대를 앞서 태어난 선각적 정치인이었다. 그가 남긴 “우리의 성의는 미처 결실을 보기 전에 끝내 무참히 짓밟혔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총리나 각료들의 헌신적인 노력만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뼈에 새겼다. 아무래도 전국민이 합심해서 이끌어야 하는 하나의 수레와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협력할 때 수레바퀴는 잘 구른다” 라는 경구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아직도 유효한 처방이라고 본다.

 

(3) 국제주의적 요소 


 장면은 그의 시대, 즉 미․소 양 강대국의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한 동서 냉전의 시대를 “그리스도교적 견해에 입각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적 물질주의, 즉 공산주의와의 싸움”의 시대로 인식하였다. 46) 또한 그는 개개 국민국가간이 아닌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양대진영간의 대립 속에서 국가의 생존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유대가 필요하며, 이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2년 제 2대국무총리를 사임하면서 발표한 다음 글에 잘 나타난다.


"이 겨레의 직면한 전도는 험난하기 짝이 없고, 공산주의와의 혈투는 아직도 계속될 뿐 아니라 점점 더 치열하여 질 것이다. 이 투쟁에 단연코 이겨야만 이 겨레는 살 수 있으며 세계의 자유와 평화가 비로소 올 것이다. 이 세계적 투쟁은 국제현장에서만 종말이 날 것인 만치 우리는 우리의 존엄한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자유진영의 일원으로서, 여러 민주우방과 전폭적 협조가 있어야 할 것이고, 이 자유진영의 일원으로서 우방의 협조를 얻자면 , 먼저 우리 나라 자체가 진정한 민주국가라는 것을 그들에게 증시(證示)하여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는 민주정치는 “국민이 평등한 입장에서 자유로이 논쟁하며 비판하며 결국에는 투표와 다수결로 정치의 의사를 결정하는 제도이기는 하나 그 최종은 사해동포애(四海同胞愛)의 이상향(理想鄕)”으로 구현된다고 보아,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립의 궁극의 목적은 그리스도교 정신에 기반한 국가와 민족을 넘어선 “완전한 평등”이 구현되는 “사해동포주의”의 실현으로 보았다. 이는 “비그리스도교국에 있어서 사회와 정치 생활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공헌”을 설파한 다음 인용문에 잘 나타난다.


"우리 시대는 이들 많은 비그리스도교국이 자유와 독립 정신의 강력한 부흥에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부흥은 신흥 국민 사이에도 완전한 평등에 대한 동경이 숨어 있다. 세계는 나날이 좁아져 가고 모든 종족과 모든 국민 사이의 접촉은 더욱 친밀하게 되어 간다. 사람들 사이에서 커다란 일치, 더 큰 협동체를 원하는 마음이 뚜렷이 눈에 띈다. 더욱 밀접한 일치와 참된 평등을 구하는 소망은 당연한 것이며 정당한 것이다. 교회의 태도는 그 교육과 그 유력한 원조로 이 갈망을 채우기 위하여 온 힘을 기울인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형제라는 이 교회의 가르침은 피부의 색깔, 인종, 사회적 지위의 구별 없이 인격의 영원한 운명에 대하여 평등한 존엄을 각자에게 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닌 우리 형제, 특히 지식인에게 교회의 이 가르침을 열심히 또 절실하게 알려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입각해 국가를 초월한 인류의 평등을 지향하는 그의 국제주의적 정치사상은 현실 세계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비현실적 이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신념은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과 한국전쟁에의 UN군 참전을 이끌어 낸 그의 외교적 업적을 이끌어낸 “보이지 않는 손”이었으며, 서방세계의 외교관이나 위정자들의 의사결정에 효과적인 설득기제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또한 냉전 붕 괴후 지역간 갈등이 증폭되는 현재적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사해동포주의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정치사상은 시대를 넘어서는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천주(天主)께 기구하는 운석 선생》 「선생은 과연 무엇을 기구하였을까?」


5. 장면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이 장에서는 기존연구에 보이는 장면의 인간적 특성, 지도력, 치적 및 사상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5․16군사쿠테타의 필연성 내지는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결과론적 시각에서 기인한 사후(post-factum) 해석이라고 보아 이의 비판적 재검토를 통해 기존 연구의 부정적 장면상을 수정함으로서 올바른 장면 이해에 일조하려 하였다. 여기에서는 기존의 결과론적 장면 연구들이 범한 오류를 수정하기 위한 필자 나름의 장면 연구 방법론과 장면관을 피력함으로써 결론에 대하고자 한다.


 먼저 평가의 척도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재적 지향점이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에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다원적 민주사회의 확립과 효율적 관료제도의 정착을, 졍제적으로는 시장경제 체제에 입각한 민간 자율의 경제 발전을 통한 국민소득의 증대를, 사회적으로는 평등주의적 사회체제의 확립과 대화와 관용의 정신의 보급을, 문화적으로는 합리주의 실용주의와 같은 가치관의 보편화를 의미한다고 정의할 수 있다. 또한 근대 국민국가는 민족을 단위로 형성되는 것이 이상적이며, 나아가 그것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 속에서 다른 국민국가들과 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국제적 지위를 확보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정치가로서의 장면의 치적과 사상이 한국의 근대 국민국가 수립과정에, 나아가 그 지향점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가 평가의 핵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주지하다시피 그는 정치적으로 자유당 일당 독재에 맞서 국민참정권의 회복에 공헌한 민주투사요, 제 2공화국의 내각 수반으로서 다원적 민주사회의 확립을 도모하였으며, 최초로 관료의 공채제도를 시행함으로서 관료의 전문화와 효율화를 꾀한 바 있었다. 또한 그는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해 장기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입안 실천함으로서, 국민 소득의 증대와 국부의 증강을 도모하되, 이를 관 주도형이 아닌 민간 자율의 방식으로 실천하려하였다. 사회적으로도 그는 자유당 독재체제하에서 위축되어 있던 이익집단들과 사회단체들의 분출하는 이익 추구욕구에 접해 이를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억누르지 않고 대화와 협력을 통한 자율적 해결을 종용하는 사회정책을 구사한 바 있다. 이 밖에도 그는 이승만 체제하의 반공주의적 무력통일론의 차원을 넘어서는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을 통한 통일 기반 조성과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자유선거를 통한 통일을 제기하는 등 합리적인, 그리고 국제적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분단 해소 노력을 전개함으로써 진정한 국민국가 수립을 모색하였다. 나아가 그는 신생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유엔의 한국 승인을 얻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바 있었으며, 이승만 정권시에 왜곡되었던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시도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대화와 협력을 통한 관계 재정립을 시도함으로서 한국의 국제적 지위와 위상을 제고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장면은 다원(多元)화된 시민사회의 확립, 민간 주도형 경제건설, 관용과 대화의 정신, 합리적 통일방향의 제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제고 등을 보편적인 방향과 원칙 하에서 실천하려한 이상적․선각적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의 이상과 꿈은 군부쿠테타에 의해 좌절됨으로써, 이후 장면과 제2공화국에 대한 평가는 부패․무능한 정치가이자 정권으로 왜곡․선전된 바 있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바가 오랜 권위주의 정부의 통치의 유산을 탈피해 다원적 시민 사회, 민간 자율의 경제구조, 화해와 관용의 정신을 통한 국민 통합에 있다면, 장면과 민주당 정권에 대한 평가는 정신사적 차원에서 이러한 제도와 가치들을 한국사상 최초로 실천하려했던 정치가이자 정권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 입각한 다원화된 시민사회의 구현을 다시 한 번 시도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장면의 정치사상은 우리의 앞길을 이끌어주는 이정표이자 좌표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즉 그가 우리에게 맛보여준 자유민주주의와 자율에 기반을 둔 시민사회의 경험은 어둡고 긴 군사독재의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한국민주주의 운동이 그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한국민 모두가 공유한 희망의 기억이었다.

 따라서 장면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공과를 논함에 있어 그 공은 시대를 앞서 태어난 장면에게 돌리고 허물은 그를 에워쌌던 당시 우리 사회 전체의 후진성 내지 미숙성에서 찾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의 허물은 우리 모두 나누어 짊어져야 할 우리 모두의 멍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