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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5. 민주주의의 황금시대와 경제제일주의의 시정방침을 천명 · 실천하다


 운석 선생은 8월 19일 민의원의 인준을 받은 직후 그를 에워싼 기자들에게 발한 첫 성명에서 구정권의 독소 제거를 통한 민주화 방안과 장기 경제개발 계획을 입안 추진할 것임을 공언하였으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앞으로는 우리가 모두 새 출발해야겠습니다. 새 헌법아래서 새 공화국의 첫 국무총리로 지명된 데 대하여 책임의 중대함을 통감하는 바입니다. 제 2공화국의 건설을 위하여 민주당이 내건 선거공약을 실천함으로써 경제를 부흥시키고 구정권의 독소를 제거하는 것이 첫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또한 장기 건설계획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의 창의력과 기업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전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제 2공화국의 첫째 과업이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국회의원과 국민은 새출발을 하여야 할 것이며, 건설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특권과 정실을 배격하고 탄압이나 차별대우를 지양하고 누구나가 다 안심할 수 있어야 하며 누구나가 다 경제기업에 전력을 다하도록 하여 부흥의 새출발을 하도록 하는 것이 제 2공화국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총리 인준 후 첫 기자회견 시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모습》

[운석 선생은 이 자리에서 그를 둘러싼 기자들에게 “제2공화국 건설을 위하여 구정권의 독소를 제거하고 장기경제개발에 노력하는 것이 새 정부의 임무”라는 요지의 첫 성명을 발하였다.]


 운석 선생은 인준 다음날인 20일 반도호텔에서 열린 중앙청 출입기자단과의 기자회견에서 경제제일주의 정책 성공에 관건이 되는 재원조달 방안과 국민들이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구체적 민주화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이를 거듭 확인하였다. 그 요체는 다음과 같다.

① 경찰중립화 문제 : “경찰은 반드시 중립화시켜야한다는 것이 나의 오랫동안의 신념이고 민주당이 내세운 공약이었다. 신국회에 경찰중립화 방안을 내겠다. 이것은 신정부의 임무 인 것이다.

② 직업공무원제도 : 즉각 실현될 수는 없으나 그 방향으로 나갈 생각이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공무원이 갈려서는 안된다.

③경제위기 극복책 : 미국의 경원(經援)이 감소된다는 것은 신생국이 저마다 미국 원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기성국가에 주는 원조를 조금씩 삭감하여 이러한 국가에 할당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최대의 노력으로 원조복구 를 요청할 것이며 과도정부에서도 많이 노력해 왔었다. 앞으로 새 정부가 수립되고 시일 이 가면 세금징수도 순조로와 질 것이다.

④ 일본․서독 등과의 경제 유대 : 미국의 원조가 무기한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 에 원조가 끊어질 때에 대비해야된다. 일본의 경제협조 제의는 아직 구체적 내용을 모르 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으나 구체적 제안이 있으면 검토하겠으며 서독과의 경제유대 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대통령 취임 경축식 때 일본 사절단이 온다면 오는 것을 굳 이 거절할 생각은 없다.

⑤ 유엔 가입과 통일문제 : 소련이 주장하듯이 북한과 한국이 같이 유엔에 가입할 수는 없 다. 대표단을 파견하여 가입토록 노력할 것이며 통일 방안은 민주당의 주장을 기초로 하 여 거국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한미원조협정 개요》




《미국과 제국 간의 경제원조 협정 대조표》




《시정연설》



 운석선생이 이끄는 제 2공화국 정부의 정책 방향이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제시된 것이 8월 27일 민의원에서 열린 총리 취임식에서 발표한 시정방침 연설이다. 여기서 제안된 바 정책중 주요 6개항의 정책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9월에 유엔 총회가 개최되겠으므로 정부는 유능한 대표단을 파견하여 한국 통일안과 한국의 유엔 가입에 관하여 국제 여론을 환기하겠으며, 통일안에 있어서는 구정권의 태도와는 달리 유엔 자유국가들의 노선과 일치하도록 유엔의 감시하에 남북을 통한 자유선거에 의하여 통일을 달성한다는 주장을 강조하는 바이다. 한․일 양국간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하여 양국간의 회담을 재개할 것과 재일 교포의 경제적 지원 및 교육에 관한 지도 등을 적극화 할 것과 교포의 자본을 국내에 도입하는 길을 열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둘째로, 제 4대 국회에서 심의 미료된 경찰 중립화를 위한 경찰법과 지방자치법 개정 법률안 등의 조속한 통과로 정치적 혁신의 일보 전진을 도모하여야 하겠으며, 인사 행정의 공정화와 관기의 확립 및 집무 능률의 향상 등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자 하며, 3부 공무원의 재산 등록 법안의 기초에 착수하였다.

 셋째로, 부정선거의 원흉들과 발포 책임자들에 대해서는 공소가 제기되어 있으므로 사법부에서 법과 혁명 정신에 의거하여 엄정한 판결이 내릴 것으로 믿고 있거니와 발포자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색출과 처단에 노력할 것이다. 구정권하에서 부정․불법 축재한 자를 처단할 것은 물론이나, 사업과 경제를 마비시키지 아니하는 적절한 한도는 있어애 할 것으로 생가하여, 그 부정․불법 축재를 국고에 회수하고 국민의 혁명욕구를 충족시키며 민족 정기를 바로잡도록 하겠다. 과도 정부는 조세범 처벌법에 의하여 처벌될 46개사 23명을 적발 수사하다가 신정부에 넘겼으므로, 이 수사를 계속하여 단시일 내에 완료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더 추가해서 적발할 것과 또는 다른 법률에 저촉되는 자에 대한 적발도 할 생각이다. 다만 그 증거를 포착하기 곤란한 만큼 국민 제위의 협조가 있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새로눈 부패와 부정을 봉쇄하기 위하여 특혜 금융을 지양하고, 탈세를 봉쇄하여 관세 행정을 쇄신하는 동시에 외환율의 현실화 조치를 실시하고자 한다.



《제2공화국 수립을 축하하는 경축 친선 사절로 내한한 일본의 고사카(小坂) 외상과 악수하는 운석 선생》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제2공화국 정부의 노력은 9월 6일 고사카 외상의 방한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하고 그후 가속화한다. 운석 선생은 9월 30일에 민의원에서 행한 시정연설에서도, "한일관계의 정상화, 또한 긴급한 문제이므로 과거 이(李) 정권의 대일 감정외교를 지양하고, 평등과 상호존중의 원칙 아래 회담을 통하여 현안해결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고 하여 부통령 시절 이래의 지론이었던 대일외교 정상화를 다시 한 번 천명한다.]







《반민주 행위자 공민권 제한법 제 4조 해당자 명단》

 넷째로, 경제 건설을 촉진하기 위하여 경제 안정의 테두리 안에서 장기 개발 계획의 실현을 위한 투융자의 확대, 세제의 개혁, 특히 토지 소득세의 금납제와 농민들의 빈곤의 경감 등을 실천에 옮겨야 하겠다. 다가오는 추수기에 대비해서 미곡 담보 융자를 확대하고 융자 기준을 인상할 것이며, 중소기업의 보호 육성을 위한 금융 조치, 전원 개발 계획의 추진과 이미 현년도 예산에 책정되어 있는 공공사업 중 보류되어 있는 금액을 적시 방출함으로써 노임의 산표를 도모코자 한다.

다섯째로, 원조 자금에 의하여 계획되어 있는 제 사업 중 아직 현안으로 되어 있는 충주 비료 공장 문제, 대한 조선 공사, 송전과 배전의 개선 사업 및 2백여 건의 주기업체 건설 계획 등은 한․미 쌍방의 협조로써 신속히 해결하고자 하며, 미국 회계 연도 1961년, 즉 금년 7월 1일에 개시되어 명년 6월 말일에 종료되는 회계연도에서 지출될 경제 원조에 관하여 목하 예비 교섭 중에 있는 바,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의 원조를 획득하기 위하여 특히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충주 비료공장을 시찰》




《전주 제사공장을 둘러보다》




《1960년 10월 25일 부산 육군 군수품 기지 병기고를 둘러보는 운석 선생》




《군수품 기지 레이더 장비의 시찰》




《1960년 10월 10일 해병사단 보급창고를 시찰》

 여섯째로 경제 건설과 균형상 국방비의 과중한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점차적인 감군을 주장하여 온 민주당의 정책을 실현하고자 유엔군 사령부와 협의하여 신년도부터 약간의 감군에 대비하여 중장비를 도입하기 위한 계획도 이미 수립되어 있음을 양해하시기 바란다. 국군의 군기를 확립하며 일부에 있었던 부패를 숙청하는 동시에, 군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고 군내 파벌의 조성을 방지하기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방침이며 따라서 금후 인사 행정에 신중한 공정을 기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제 2공화국의 정책은 국민 참정권의 완벽한 보장과 관료제도의 합리화 및 경찰 중립화를 통한 민주주의의 구현을 통한 공포로부터의 해방. 외자 도입과 경원의 확대를 통한 경제개발 계획의 추진과 국민소득 증대를 통한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및 대 유엔 외교의 강화를 포함한 국제적 고립으로부터의 탈피, 군비 축소와 군의 정예화 추진을 통한 국방력 강화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제 정책 방향은 9월 30일 민의원에서 행한 두 번째 시정연설, 10월 1일에 연설한 제2공화국 경축사, 그리고 1961년 2월 9일에 민의원에서 행한 세 번째 시정연설 등에서 거듭 천명되면서 실천에 옮겨졌다.



 

   


《목차》




《경제기획원》




《국토건설청》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예산 : 세입 · 세출》

《5 · 16 군사 혁명이 제 2공화국으로부터 무엇을 흠쳤는지를 웅변해 주는,
경제기획원 중심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필 노트》

[경제개발을 위한 제 기구와 개발계획 및 예산까지 완벽하게 구사오디어 있다.]



 《1960년 5월 건설부 명의로 발간된 “제 1차 5개년 경제 개발계획(시안)”


[이 계획 수립에 실무 핵심을 맡았던 김입삼은 “그들은 장면정부의 계획을 그대로 가져갔다. 방법론은 물론이고 세부항목가지 거의 같은데 달라진 부분은 성장목표를 연 6․1%에서 7․1%로 높인 것뿐”이라고 증언했다.]



《1961년 1월 5일 경제 심의회 회원들과의 오찬》




《1961년 3월 29일 원주지방 국토개발사업 개발식에서》





        《국토건설 요원 제복을 입고 1961년 식수행사장에 나온 운석 선생과 정헌주 국무원 사무처장(오른쪽 끝)》

 
제 2공화국의 경제정책을 연구한 김기승은 말한다. “장면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 정권은 9개월 정도 존속한 단명의 정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혁명이라는 시대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진력을 다한 정권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9개월 동안 장면 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의 기조와 구체적 실행을 살펴 볼 때도 확인된다. 장면 정권에서 추진했던 국토개발사업, 경제개발 5 개년 계획 등은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계승되어 시행되었다. 국토종합개발계획, 경제계획원과 건설부 설치 계획 등 장면 정권기에 구상되었던 정책 등은 군사정권에 의해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점은 장면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장면정권이 내세운 ‘경제제일주의’의 시정 방침은 당시의 심각한 경제적 위기의식의 소산이었다. 그리고 ‘질서와 발전’을 내세워 경제적 질서의 확립을 기반으로 한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정책은 경제의 민주주의 원칙을 천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장면 정권은 경제정책의 수립에 있어서 다양한 경제 주체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하고 그것을 조정․통합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의 중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종합경제회의를 개최하고 중앙경제위원회나 경제계획원과 같은 경제정책 기구를 설치 또는 구상하였다. 그리고 경제개발 5 개년 계획의 구상은 각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산업개발위원회에 맡겼다. 그리하여 경제개발 계획에서도 정부와 민간 부문의 역할 조정에 유의했고, 국토건설사업의 시행은 민․관 협조 형식으로 추진하였다. 장면 정권은 경제 전문 관료 집단의 정책 결정 참여를 고무하고, 민간 부문의 경제 정책 건의를 폭넓게 수용하면서 경제정책을 구상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것은 ‘질서와 발전’을 경제정책의 기조로 채택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이승만 정권의 특권적 경제체제 하에서 잠복해 있던 각계의 경제정책 아이디어들이 자유롭게 개진되고, 이를 비교적 충실하게 수렴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시기에 구상되거나 실시되었던 경제정책이 이후 시대 경제정책의 토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경제적 질서’, 즉 절차와 과정의 민주주의적 원칙을 중시함에 따라 경제정책의 시행과 집행에 있어서 시간적 지체의 문제를 부득이한 한계로 감수하였다.”




 

                            《1960년 경무대 앞에서 윤 대통령과 장 총리와 함께 도열한 국무위원들》





《1961년 1월 1일 국무위원 시무식 기념》





 《1960년 9월 6일 내한한 고사카 외상 편에 이케다 수상에게 자개상을 선물하였다》





《1960년 11월 24일 일본을 방문할 문화사절단과 함께》



 제 2공화국의 대일정책을 연구한 정대성은 이렇게 평가한다. “장면 총리를 비롯한 장면 정권하의 정치가들은 결코 공리공론만으로써 허송세월한 것은 아니었다. 국회에서의 논의를 5․16을 자초한 파벌․당파싸움의 장으로만 간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식민지를 거치고 냉전시대에 태어난 신생 약소 국가의 행정부치고는 노련한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과 베버(Max Weber)주의로써 정국을 운영하려는 훌륭한 근대적 정치가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반(半)봉건적 한국 정치를 근대적인 모습으로 한 단계 발전시킨 공적이 있다. 또 제2공화국의 대일 정책결정 과정에는 ‘민족 정기’와 ‘국리민복’을 잊지 않고 ‘국민감정’에 배려한 ‘신중’성이 인정되며 모든 문제를 자유로운 토론으로 풀어나가려는 민주적 성향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장면 정권은 보나팔티슴(Bonapartisme)적 성격을 띠고 더 발전할 터였고, 적어도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너그럽게 ‘친일적’이면서도 냉철하게 ‘지일(知日)적’이고도 만만찮게 ‘극일(克日)적’인 끈질긴 절충을 꾸준히 추구할 수 있었던 ‘미발(未發)의 계기’가 내재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5․16은 그 가능성을 폭력으로 횡령했을 뿐더러 그 속에 잉태된 민주지향성은 압살시켰다. 그리고 군사정권은 사태 수습과 법통성 확보를 위해 그야말로 졸속적으로 한일 교섭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단적인 예가 ‘보상’적 성격을 띤―설령 ‘배상’이 아니었다한들―‘청구권’ ‘8억 5천만불 이상’이라는 눈물겨운 타협의 ‘독립축하금’ ‘3억불’(무역적자를 공제하면 불과 ‘2억 5천 4백 27만불’)이라는 공범적 저자세로의 둔갑이다. 하지만 돈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2공 때의 저 ‘한알의 밀’의 아픔을 그대로 안은 채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한일조약 및 제협정의 재체결을 통일 전에 할 것인가 후에 할 것인가를 신중하게 또 과감하게 선택․타진․입안해야 할 엄숙한 역사적 전환점에 와있다”고 말이다.

이상 살펴 본 제 2공화국의 시정 방안은 하루아침에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제 정책들은 운석 선생이 정계진출이후, 특히 부통령 재직 기간에 “불안으로부터 해방”과 “궁핍에서의 해방”, 그리고 “고립으로부터의 탈피”를 위해 꾸준히 모색․제안해온 정책들이 기반이 되어 결실을 맺은 것으로 우리 헌정사에 있어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였지만 민주주의 황금시대를 구가하게 한 토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