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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0. 맨해튼 대학 입학


 구한말 이래 1920년대까지 미국에 유학했던 한국 학생은 100명에 미달하였으며, 운석 선생이 유학한 당시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유학생은 10명 미만이었다. 선생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측 성직자들의 조언을 받아 미국 내에서 교육을 사명으로 하는 유명한 남자수도회(Christian Brothers) 소속 수사들이 경영하는 규모는 작지만 내실 있기로 정평이 난 뉴욕 소재 맨해튼 대학(Manhattan College)에 1921년 9월 19일에 입학해 1925년 6월 4일 학사학위(B.A.)를 받았다. 당시 선생은 일종의 “근로장학생”으로 학비 일부를 지원 받았지만, 모자라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간을 쪼개 육체노동에 나서야 했다. 선생은 언어장벽과 고학의 어려움으로 인해 1923년 8월에는 성 빈센트 병원(St. Vincent's Hospital)에서 탈장 수술을 받고 2주간 입원하는 병고를 겪기도 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향학열을 불태웠다. 다음은 어려웠던 유학 시절에 대한 운석 선생의 회상.

 “익년(翌年) 9월 뉴욕 맨해튼 대학에 등록을 했다. 교실에 들어가 아직도 모르는 술어(術語)가 태반이나 되어 따라가기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집에서 학자(學資)를 별로 못 보내는 형편이므로 숙식을 위하여 일을 해야 하고 또 학교에서는 수업료 기타 요금을 못 바치는 대가도 또한 일을 해야만 하게 되었다. 언어는 부자유스러워 노상 포켓사전을 찾아보아야 하고 따라서 이 장벽을 극복하느라고 다른 공부를 제대로 따라가기가 극난(極難)하였으며 하루에도 몇 시간씩 육체노동 때문에 피곤과 시간부족으로 몸은 언제나 쇠약의 일로를 걷고 있었다. 어떤 때는 전차비 5전이 없어서 도보로 걸어다닌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언어장벽, 신체 피로, 학비부족, 시간부족과 항시 싸우며 고학을 계속하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는 한인 유학생이라고는 전 미국 내에 불과 십명 이내가 아닌가 한다. 따라서 한국에 대한 인식은 거의 전연 없었고 더군다나 한인학생을 위한 스칼라십이란 얻어 볼 수도 없었다. 오늘 같이 한국이 널리 알려져 있고 동정도 많고 여러 가지 장학금이 풍부한 호화판 시대와는 별천지였다. 이렇게 늘 피곤하게 지내다가 하기 휴가가 오면 1년간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또 다른 데로 일을 구하여 나가는 것이었다. 휴가라고 휴식은 고사하고 학비 한푼이라도 더 벌어 보려고 몸이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맨해튼 대학 전경

≪맨해튼 대학 전경≫

[운석 선생은 고학의 어려움을 딛고 선 유학 생활이 자신의 성장에 밑거름이 된 "금쪽" 같은 체험이었다고 자부한다. "이런 역경에서의 부단한 인내와 노력의 투쟁은 드디어 나로 하여금 타력(他力)에 의존치 않고 자력으로 건투해 나가는 기백을 기르게 하였고 자기 학급에서 상시 우등권 내에 들게 하였으며 소시(少時)의 이런 노고가 오늘의 조그만 성공이라도 가져오게 한 것을 생각할 때 나는 그 때의 노고가 후일을 위하여 금쪽 같이 귀한 체험의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가끔 유쾌한 회고에 잠기곤 한다."(출처 : 장면, 『나의 학창시절 회고』)]


 
이처럼 선생에게 있어 맨해튼 대학에서 공부한 4년간은 교육의 완성을 이룩한 결실의 기간이자 앞으로 선생의 삶의 방향에 좌표를 제공한 계기이기도 하였다. 그는 대학시절에 무엇을 얼마나 잘 배웠을까. 그가 택한 과목과 여기서 거둔 성적을 통해 그가 이룩한 지적 성장의 궤적을 알아보자. 선생은 1학년 때 종교학(97점, 91점), 영문학(79, 75), 불어(83, 86), 역사(87, 80), 물리 및 실험(93, 93), 수사학(80, 80)을, 2학년 때 종교학(82, 94), 화학 및 실험(86, 98), 영어(72, 79), 대중연설(85, 87), 영문학(78, 78), 불어(72, 79), 역사(88, 90), 그리고 3학년 때 종교학(100, 100), 영어(95, 95), 철학(100, 95), 철학(95, 93), 교육학(94, 94), 불어(78, 80), 사회학(76, 92)을 택했다. 운석 선생은 1학년 85점, 2학년 83점, 3학년이 92점, 3년 평균 87점의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화학실험 노트

≪맨해튼 대학 재학시의 화학실험 노트≫




 
성적표를 세밀히 관찰해 보면, 선생은 종교학(94), 철학(96), 교육학(94) 등 인문학 분야와 물리 및 실습(93), 화학 및 실습(92) 같은 계량적 분석적 학문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역사(86), 사회학(84), 수사학(80), 영문학(78), 영어(85), 불어(80), 대중연설(86), 수사학(80)에서도 비교적 좋은 성적을 올렸다. 또한 선생이 언어의 장벽을 호소했던 영어 과목의 성적이 1~2학년 간에는 저조했으나 3학년 때에는 95점의 높은 성적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선생의 노력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불어와 영어를 매학기 수강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당시 조선 교회를 주도하던 파리 외방 선교회와 한국 진출을 준비하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 소속의 성직자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필수 과목으로 매일 1시간씩의 교리를 배우기는 하였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따로 교리·교회사·호교학(護敎學) 등을 자습하면서 여러 신부님께 개인지도를 청하여 거의 무제한 질문으로 신부님들을 괴롭혔다” 한다. 이 때 확보한 교리나 교회사 관계 지식들은 선생이 뛰어난 신학 이론가로서 활발한 저술·번역 활동을 펼치는 데 활용되었다. 또한 선생은 역사를 4학기 동안 이수한 것을 비롯해 철학, 사회학, 교육학 등 다양한 인문 과목을 학습하였는데, 이를 통해 확보한 지식은 이후 문필가로서 선생이 출중한 업적을 남기는 데 기여한 지적 자산이었다. 


맨해튼 대학 재학시 성적표

≪맨해튼 대학 재학시 성적표≫



 
성적표의 기록이 3학년에 그친 이유는 운석 선생이 탈장 수술 이후 오랜 고학 생활의 결과로 얻은 신경통 등 심신쇠약으로 인해 1924년 6월 이후 롱아일랜드에 있는 요양소(Medford Sanatorium)에서 요양생활에 들어간 관계로 출석 수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과제 수행과 논문제출로 결손 수업을 메우기로 대학 당국과 합의했기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마도 대학 당국에서는 그가 이미 수원농림학교(Souwon Agricultural College)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이와 같은 결정을 한 듯하다.

서한

≪4학년 성적이 누락된 사유를 해명하는 대학 당국의 서한≫



동양인 유학생들과 함께

≪맨해튼 대학의 동양인 유학생들과 함께≫

 
 
1925년 맨해튼 동기생들과

≪1925년 맨해튼 대학 동기생들과 함께≫.

[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가 운석 선생. 후일 사제가 된 동기생들 중 몇 사람은 제3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얻는 과정에서 운석 선생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학위기

≪학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