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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1. 한국 천주교 순교자 시복식 참석


조국 복음화의 꿈을 펼치다 : 신앙인과 교육자로서의 활약


 
운석 선생은 미국 유학생활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배우고 맛보며 더욱 나의 언행을 종교적 양심에 비추어 보고 행동하는 습성을 길렀으며, 일제 아래 국내에서 우리가 민족에 이바지하는 길은 민간 교육사업이 더욱 효과적이며 첩경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고, 민족 도덕을 양성시키기 위해서는 종교적 신앙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겠다고 깨닫게 되었다”한다. 따라서 선생은 귀국 후 일제 치하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의 장래를 위해 교육사업과 천주교 전파를 위한 교회활동에 몰두함으로써, 나라 잃은 민족의 정신적 독립 기반을 다지는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한국 천주교 순교자 시복식 천주교 청년회 대표로 참석


 
1925년 6월 20일 5년여에 걸친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운석 선생은 귀국 길에 오른다. 선생은 귀국에 즈음해 서울 교구로부터 로마에서 거행되는 “한국 79위 순교자 시복(諡福)식”에 한국 천주교 청년회 대표로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동생 발과 함께 7월 5일 거행된 이 행사에 참가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해 나가기 시작한다.

 
『친필 연보』에 의하면, 선생은 두이리오(Duilio)호를 타고 미국 뉴욕 항을 떠난 지 10일 만인 6월 30일 이태리 나폴리항에 도착해 다음날 먼저 로마에 와 있던 서울 교구의 뮈텔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 일행과 합류했으며, 7월 5일에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Pius Ⅺ)의 집전으로 거행된 시복식에 참석하였다. 다음은 선생의 시복식 참례 회고담. 

시복식

≪시복식≫




 “1925년 6월초에 마침 미국에서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려고 할 즈음 본국 경성교구로부터 로마에서 거행되는 시복식에 교우대표로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A아 콜롬비아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를 하고 있는 아우(루수) 장발과 같이 뉴욕서 나폴리 배를 타고 이태리로 떠났다. 6월 말에 배가 나폴리 항구에 닿았을 때는 이미 한국의 대표단 일행이 도착하여 있었다. 이 일행에는 경성교구의 민[Mutel] 주교, 대구교구의 안[Demange] 주교와 불인 신부 베드로 진 신부, 한인 신부 바오로 한기근(韓基根) 신부 등이었다. 그곳에 있는 파리 외방 전교회 로마주재 사무실에서는 이미 수개월 전부터 시복될 복자들의 행적을 불어, 이태리어로 쓴 책자를 수천 권씩 발간하고 복자들의 상본도 수만 장 인쇄하였으며 백, 청, 홍으로 1, 2, 3등의 입장권도 수만 장 인쇄하고 있었다. 입장권을 얻으러 오는 남, 녀 교우들 때문에 사무실은 늘 혼잡을 이루었고 사무원들은 밤을 새우며 일하고 있었다. 백색 입장권은 원래 복자의 친척에게만 분배되는 것인데 사실 복자의 정말 친척은 한 명도 없어 진 신부, 한 신부와 우리 형제가 이를 대표하여 제대 좌우편의 제일 가까운 상석에 앉게 되었다.

 
시복식이 거행되는 7월 5일 아침 10시가 되자, 베드로 대성전 정문으로 추기경 6위께서 시종을 데리고 입장하고 그 다음에는 대주교, 주교, 고급성직자 행렬이 뒤따르고 마지막 행렬에는 대례미사를 거행하실 주교께서 복사들을 대동하시고 입장하였다. 대성당 안에는 외국 사절, 귀빈 등을 비롯하여 입추의 여지없이 교우들로 꽉 찬 가운데, 제대 좌편에 마련된 높은 강론대에 고위성직자 한 분이 오르시어 교황 성하의 칙령을 낭독하였다. 이 칙령은 교황께서 한국 치명자 79위를 복자로 반포하신다는 장황한 내용이었다. 시복될 치명자들의 그림을 5개로 그려서 하나는 제대 뒤 벽상에 2개는 제대에서 한참 나와 양편 기둥에 그 다음에는 성전 정문 위와 성전 정문 위와 성전 문 강복대 위에 걸어 놓았는데 시복칙령이 낭독되기 전에는 모두 포장을 가리었다가 칙령이 선포된 후에 모두 포장을 벗기니 그 상본들은 모두 전등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교 대례미사가 시작하는데 높은 성가대에서는 풍금에 맞추어 성가가 들리고 사방에는 휘황찬란한 장식에 둘러싸여 오로지 황홀한 분위기에서 미사를 참례하였다. 하오 6시에는 떼·데움 강복식이 있었는데 교황 비오 11세께서 친히 참석하시는 고로 신자들은 더욱 몰려들었다. 시복식에 거행되는 강복식에는 교황께서 집전하시는 것이 통례인데 특별히 민 주교에게 집전하는 것이 허락되어 한 신부는 이 강복식에 시중을 들어 재대 가까이에서 참례하였다. 떼·데움[Te Deum, 찬미가] 강복식에 참석코저 교황 비오 11세께서 연을 타고 성당에 들어오시니 나팔소리가 들리고 이에 호응하여 신자들은 모두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성하께서 제대 앞에 당도하시자 모두 조용해졌다. 성체를 제대상에 봉안한 후 교황께서는 어좌에서 제대에 오사 두 번 다 향을 드리셨다. 민 주교께서는 제대 좌편에서 성광을 들고 강복하시는데 강복식도 여기서 보통 우리가 드리는 것보다는 아주 복잡하고 장엄하였다. 불과 100년도 못 되어 베드로 대성전에서 우리 선열들의 성해를 모시고 교황께서는 그 앞에 꿇으시어 열심히 기구하시는 광경은 친척도 아닌 우리 한국인 3인만이 참석하여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고적하고 쓸쓸하며 한편으로는 애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리에 복자들의 유가족이 참석하였던들 그 영광이 어떠하며 그 감격인들 어떠하랴. 그러나 진리와 정의는 최후에 승리한다는 말씀이 떠오르며 이 시복식에 외국인 사절들, 또 외국인 신자들이 한국 복자들을 위하여 이렇게 많이 참석한 데 대하여 다만 감격할 따름이었다.

 
성체 강복이 끝난 후, 한국 주교 2위와 파리 외방전교회 총장 광 주교와 여러 신부들은 아름다운 성해대, 책화환 등을 성상께 드렸다. 시복식이 끝난 후 예수회의 성당에서 7, 8, 9일 3일간을 매일 상오 10시에 주교님들이 번갈아 감사미사로 최대 장엄미사를 드렸는데 이 성당 내에 장식된 귀귀묘묘한 전등과 화려한 장식품들로 복자들의 감사미사는 한층 훌륭하였다. 그리고 이 3일간 하오 7시에는 매괴경, 강론, 성체강복 등도 있었다. 수속이 복잡하여 한참 기다렸다가 지휘에 따라서 25명이 원형으로 둘러 서 있는데 성하께서 들어오셨다. 키가 별로 크시지 않은 퍽 인자하신 모습이었다. 성하께서는 불어로 말씀하시면서 하나하나에게 악수하시며 강복을 주셨다. 이곳에서도 신자들이 많이 참석하여 열심히 기구하여 주었다.

 
시복식이 있는 이튿날 정오에 교황께서 한국대표들을 따로 접견하셨다. 그래 우리 대표들은 4위 주교, 여러 신부들과 우리 형제 등 25명이었는데 교황 알현에 나도 성하와 악수하였는데 성하께서는 어느 나라 말을 할 줄 아느냐고 물으시어 영어라고 대답하였더니 성하께서는 곧 영으로 말씀하시며 나에게 "네가 지향하는 모든 것에 강복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교황 알현이 끝난 후 우리 일행은 복도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이 79위 시복식을 행함에 있어 불란서의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보람이었고 또 이 회에서 설립한 순교자 기념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각국에 파견된 회원들이 순교한 이가 남긴 유물, 유해들이 안치되어 있다. 우리 복자 안드레아 김 신부님의 필적으로 쓰여진 편지들도 많이 이곳에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