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저술 및 저서 - 신앙백서

신앙백서 - 영적 지도 4. 한담 유벌



 “말을 삼가야 한다”는 정도는 누구나가 다 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이처럼 간단한 상식을 실천하기가 왜 그다지도 어려운가!

 
말이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몇 마디로 곧 그 사람의 전 인격을 척량할 수 있을 만치 그의 내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수구 여병(守口如甁)”이라는 격언도 있다시피 아예 입을 병마개 막듯이 꼭 막아 주는 것이 안전하다는 예로부터의 가르침이다. 전도서 3장에는 “입을 열 때가 있으면 입을 다물 때가 있다”고 말의 적시성을 가르쳤다.
다윗 성왕도 입을 지키기가 어찌나 어려웠던지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함을 깨닫고 “야훼여, 이 입에 문지기를 세워 주시고 이 말문에 파수꾼을 세워 주소서”(시편 141, 3) 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부르짖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경각심을 자아내는 말씀은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자신께서 친히 하신 아래 말씀이다.

 
“심판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될 것이다”(마태 12, 36). 즉 우리가 하는 말은 심판 때 한마디도 그저 넘기지 않으시고, 하나하나 엄하게 따지시겠다는 최고 심판자로서의 권위 있는 경고의 말씀이다. 한담이라면 반드시 악할 뿐 아니라, 불필요한 말까지를 포함한 것이매, 우리가 하루에도 몇 백 마디 말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마구 퍼붓는 그 숱한 마디마디가 하나 빠짐없이 주님의 엄하신 심판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우리는 얼마나 정신을 차려야 하겠는가? 더군다나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5, 22)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얼마나 두려운 말씀이냐?

 
이 문제에 대하여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야고보 사도의 다음 말씀을 깊이 간직하고 절실히 자기 반성을 해볼 일이다.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 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야고 1, 26). 즉 말조심은 아니하면서 자기 나름으로 신심이 두터운 줄로 자처하는 자가 있다면, 이런 자는 곧 위선자요 허망한 자라는 말씀이다. 야고보서 3장으로 내려가면 혀의 방자함과 그 해독에 대하여 극단의 말씀이 우리 가슴을 찌른다. 즉 “이와 같이 혀도 인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엄청나게 허풍을 떱니다. 아주 작은 불씨가 굉장히 큰 숲을 불살라 버릴 수도 있습니다. 혀는 불과 같습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부분이지만 온몸을 더럽히고 세상살이의 수레바퀴에 불을 질러 망쳐 버리는 악의 덩어리입니다. 그리고 혀 자체도 결국 지옥불에 타 버리고 맙니다. 인간은 모든 들짐승과 새와 길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을 길들일 수 있고 또 지금까지 길들여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휘어잡기 어려운 만큼 악한 것이며 거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이냐? ‘사람을 죽이는 독으로 가득 찬’ 혀를 함부로 놀리다가는 어떠한 결과가 닥쳐오는가? 그 조그마한 불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살라 버리고 급기야 자신까지를 지옥불에 사르게 된다는 어마어마한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한,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실에 틀림없는 이 말씀을 과연 우리는 얼마나 심각하게 새겨들으며 여기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있는가? 죄악의 세속 가운데 섞여 사는 우리는 혹 이 점에 있어서 너무나 등한하지 않았던가? 비록 악의는 없었다손 치더라도 불필요한 한담, 농담, 남의 말을 장시간 하고 나면 결국 무슨 소득이 있는가? 한담쯤은 예사로 알고 이런 말, 저런 말 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말려들어 가 나중에는 본의 아니었던 남의 비평을 하게 되고, 호기심에 끌려 남의 결점, 비밀을 캐내 보려 들고, 심지어 중상, 모략, 추측 판단, 거짓말, 악담까지를 서슴지 않아 급기야 습관이 되면 좀처럼 고치기 어려운 고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온갖 오해, 질투, 분쟁을 자아내어 개인은 물론 가정, 사회, 국가간의 큰 불행까지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일반 세속인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교우들간에도 이 점이 더욱 등한하여 아침 저녁 기도를 꼬박꼬박 드리고 영성체를 하면서도 여전히 말을 함부로 한다면, 이 얼마나 큰 자가 모순일까? 야고보 사도께서도 “우리는 같은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내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되겠습니다”(야고 3, 9-10) 하고, “같은 샘 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함께 솟아나오는” 모순성을 개탄하였다.

 
그러기에 완덕을 지향하는 영신 수련 방법으로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침묵으로 혀를 제어하는 것을 교회에서 권장한다. 각 신학교, 수도 단체에서 침묵 시간, 침묵 일, 피정 등을 정기적으로 여행하고 있으며, 트라피스트 수도원 같은 데서는 한평생 말을 아니하고, 침묵 생활로 일만 하는 철저한 혀의 제어를 실천하고 있다.

 
영적 진보와 향상의 비결은 침묵과 기도 중에서 조용히 하느님을 찾고 잠잠히 가르치시는 그 교훈을 받는 데 있는 것이지, 세속 잠념에 가득 차고 수다스럽게 입을 마구 놀리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차지하시는 자리가 마련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중심이 예수께 서 있지 않는 한, 확고 부동한 신념과 평화가 깃들일 수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야고보 사도는 또 말씀하시기를 “여러분은 마음속에 고약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을 품고 있으니 공연히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런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며 동물적이며 악마적인 것입니다”(3, 14-15)라고 하셨다. 무슨 욕망을 채워 보려고 자기 자랑에 도취하거나 이득을 보려고 잔꾀를 부려 거짓말을 하는 자는 다 마귀 장단에 춤추는 어리석은 자임을 알려 주신 말씀이다. 과연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3, 2)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혀 하나만 철저히 제어한다면 벌써 성인이 다 된 것이나 다름 없어, 고행거리라고는 거의 없을 만치 홀가분하고 자유스럽고 무척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원수의 조그만 혓바닥 한 조각이 어쩌면 그다지도 악착스럽게 사람을 마구 휘둘러, 너나할 것 없이 고해할 때마다 매양 똑같은 죄목을 되풀이하게 만드느냐 말이다. 이것은 다 우리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며, 하느님께 대한 의탁이 아직도 철저하지 못하다는 증좌이고 보니, 우리가 차제에 번의 대오 비상한 결심으로 종래의 타성을 박차고 일어나 이것 하나만은 기어이 극복하도록 겸손한 기도와 꾸준한 노력을 끝까지 계속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간구를 들어주실 줄 믿는다.

 
“나의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이 입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편 51, 15).

(196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