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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 및 저서 - 신앙백서

신앙백서 - 미사 전례의 사적 소고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장 큰 첫 성과로서 우리는 1963년 12월 교황령으로 영포된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을 들 수 있다. 이 헌장은 실로 과거 4백 년 간 동결되다시피 고정되었던 거룩한 전례에 일대 개혁의 길을 터준 것으로서, 특히 모든 전례의 정점인 미사 의식에 새로운 인식과 양상을 지니게 한 점에서 우리는 환희의 감격을 금할 수 없다. 모든 개혁을 가하게 된 사적 경위를 잠시 고찰해 보는 것도 참고가 될 듯하여, 교회 전례학의 권위자이며 이번 전례 개혁을 뒷받침해 준 공로자로 알려진 예수회 회원 요셉 융만 신부의 지론을 중심으로 저간(這間) 발표된 바 있는 ‘미사 참례하는 하느님 백성의 역사’라는 소책자에 의거하여, 미사 의식의 진화 과정을 회고하며 이번 획기적인 개혁의 진의가 과연 어디 있는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는 너무나 거창한 과제이므로 가장 주요한 줄거리만을 요약해서 여러분의 참고로 제공하려 한다.

 
요컨대 이번 미사 전례 대개혁의 중점은 종래 사용해 오던 라틴어의 대부분을 모국어로 대체했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수난 전야 최후 만찬에서 “이는 내 몸이요, 너희를 위하여 주는 것이니 너희는 나를 기억하기로 이 예를 행하라” 하신 명령의 참뜻을 올바르게 준수하자는 데 있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특별하신 기적적인 보호 아래 홍해를 무사히 건너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새 생활에 들어갔음을 감사 기념하는 파스카를 대대 손손 오늘까지 지켜 왔다. 이 파스카에서 먹는 행위는 보통 식사 행위가 아니고, 첫번 파스카를 재신(再新)하는 엄연한 종교 행위인 것이다.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그리스도께서도 이 파스카 예식을 엄수하셨으되, 한 가정에서 가장의 자격이라기보다 전인류의 구세주로서 사도들을 거느리시고 먼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떡과 포도주로 당신 몸과 피를 이루는 대기적을 행하신 후, 곧 이어 “너희는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고 명령하셨다. 부활과 임종 후, 그 제자와 신도들이 기회 있는 대로 새 가족의 일원이며 부활하신 예수의 형제로서의 한 가족이라는 의식과 신념을 견지해 왔다.


교회 초창기


 
초대 교회에서는 항시 국법의 금단과 혹독한 박해 속에 떨고 있었던 시절인 만큼, 교우들이 미사에 한번 참례하려면 고요한 첫새벽에 빵 한 조각씩을 몸에 지니고 카타콤바 굴속이나 어느 부잣집에서 탁자 하나를 놓고, 중앙에 주교님이 서고 좌우에 평복 차림의 사제들이 배석하고 맞은편에 교우들이 늘어서서 극히 간소한 예식으로 미사를 지냈다. 동네 사람이 깨기 전에 예식을 마치고 돌아가야 하므로 짧은 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 예식 절차로는 주교님이 교우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사하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응답한다. 빵과 포도주를 탁자 위에 놓고 주교가 곧 이어 감사와 축성의 기도를 드리면 교우들은 “아멘” 하고 응답하여 주교의 기도가 교우들의 기도와 일치됨을 승복(承服)하고 성체와 성혈을 배령(拜領)한다. 이것으로 예식은 끝난다.


금단 해제 후


 
그 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입교하고 금단(禁斷)이 해제되자, 교회 전례도 점차 절차가 보완 정비되어 기원 300년대로부터 600년경 교황 그레고리오 재위 시에 이르기까지는 미사 성제 예식의 장엄한 공식 행사로 발전되어 제복과 행렬과 합송 기도와 성가 합창 등으로 기본 전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러나 신도들은 어디까지나 성체 성사 안에서의 공동체 의식에 충실하였고, 감사 기도와 영성체가 그 모든 신심 행위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때 쓰던 모든 기도문과 성가는 다 잘 알아듣는 자기들 모국어였고, 사제의 일거 일동은 신도들의 아멘의 응답으로 동의를 받았다. 즉 이 미사에 참례하는 사제와 신도는 각기 소임은 다를지언정 다 같은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한마음 한뜻으로 천상의 성부를 흠숭하였다. 전례 사가들은 이 시대의 미사 봉헌이야말로 그 정신과 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타당하였다고 논평하고 있다.


카를 대제 이후


 
기원 800년경 프랑크의 카를 치하로 접어들자 그는 지금의 독일, 프랑스, 북부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관하에 산재한 여러 방언(方言)을 쓰는 잡다한 종족들을 통틀어 단일 제국으로 편제하려는 의욕에서 우선 신앙부터 통일시켜 보고자 “이제부터는 모든 백성이 다 같이 가톨릭 의식으로 하느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포고하고, 당시 로마에서 사용하던 라틴어 전례문을 그대로 치하 각 성직자, 수도자 및 일반 서민에게까지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이를 선의로 해석해서 그는 자기 치하의 서민까지가 모두 구령하기를 바라는 조처라고 볼 수도 있으려니와 결과적으로는 로마 교회와 그 전례에 적지 않은 피해를 끼쳤다.

 
언어가 다른 이민족에게 외국어 전례문을 사용케 하므로 신도들은 그 뜻을 이해치 못하고, 미사는 오직 사제 본위의 독단 행사가 되다시피 하였다. 더욱이 그 후, 여러 가지 이유로 추가된 많은 경문과 복잡한 절차 때문에 미사의 진짜 핵심이 어디 있는지 분별하기조차 어렵게 되어 갔다.

 
물론 이렇게 경문과 예절이 추가되는 데는 몇 가지 이해할 만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그리스도의 천주성을 부인하는 아리안 이단설이 성행되었던 만큼,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참 천주(天主)시다’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미사 중 지존하신 천주 성자 그리스도 어전에서 자아의 비하를 고백하는 ‘고백 기도’를 몇 차례씩 외우며 가슴을 치게 하고, 성체를 봉안한 지성소에는 교우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도록 난간을 설치하여 성직자만이 출입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은 여파로는 일반 교우에게 ‘우리같이 비천한 죄인들이 어찌 감히 성체를 배령할 수 있느냐’는 송구감조차 갖게 하여 성체 영하길 사양하기까지에 이르러, 교회에서는 부득이 ‘지극히 적어도 매년에 한번은 영성체를 하라’는 규구(規矩)까지 제정하게 되었다.


기원 1000년부터 500년 간


 
이 시대의 많은 교우들이 미사 성제에 참례하는 양상이 마치 사제가 예수의 생애를 재연하는 비유극이나 관람하는 듯한 감을 갖게 하여 예수께서 성체 성사를 제정하신 본래의 의향인 공동체적 제찬 봉령(祭饌奉領)과 기도 행위와는 동떨어진 경향이 짙었다. 이렇게 된 원인의 하나로서는 당시 독일 황제들이 남방으로 로마에까지 침래하여, 독일에서 쓰고 있던 전례 규식을 도리어 로마 지역에 유포시킨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때의 일부 평신도는 사제가 성체를 봉헌할 때 다만 옆에 서서 면주(麵酒) 형상 안에 계신 예수님을 우러러뵈옵고 흠숭함으로써 족하다고 생각했다. 이 흠숭 위주의 기풍은 12세기에 이르러 당시 성체 실제의 교리를 부인하는 알비젠시안 이단설에 대항하기 위하여 더욱 조장되었다. 주교들은 관하 사제들에게 명하여 미사 중 축성된 면주 형상을 각각 한번씩 높이 거양케 함으로써 ‘성체 실제’의 신심을 더욱더 높여 주었다. 그 당시 일부 교우들의 관념으로서는 ‘거양 성체’의 순간이 곧 미사의 클라이맥스로서 거양되는 성체와 성혈을 쳐다보는 데만 정신이 쏠려, 거양 성체를 예고하는 종소리를 신호로 성당으로 달려가 거양이 끝나면 바로 나와서 또다른 성당으로 뛰어가 몇 번이고 거양에 참례한다는 등 빗나간 미사관에 사로잡혔고, 면형 속의 성체를 마음껏 오래 뵈옵겠다는 그들의 욕구를 채워 주기 위해서 미사 구조 이외에 성체 거양을 연장시키는 한 가지 방안으로 성체 강복식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종교 개혁 전후기


 
중세기 말 종교 개혁 직전에는 사목하기보다도 미사만 드리기 위한 사제 서품이 성행되어 무수한 사제들이 하루에도 미사를 여러 대씩 드렸고, 많은 교우들은 미사 참례 중에 무슨 은혜받기에만 급급하여, 참된 공동체적 성찬 제례의 본의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은 이런 풍조를 맹렬히 공격하던 나머지 드디어 사제직 자체까지를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트리덴티노 공의회에서는 여러 가지 시정책을 강구해 보았으나, 초대 교회 시절의 미사 전례에 관한 연구 부족과 소위 개혁가들의 지나친 파괴적 주장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미사 전례에 관한 철저한 개혁을 가하지 못하고, 다만 지나친 미사 다헌(多獻) 풍습을 지양시키고, 당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로마 미사 규식을 기준화하여 이를 엄격히 통일 고정시켰다. 용어는 라틴어로 한정하고 동방 교회는 예외 의식을 세밀한 부분까지 규제하여 우금(于今) 400년 간을 계속해 내려왔다.

 
미사 규식의 엄격한 통일은 좋지만 일반 교우들은 사제와 성가대가 외국어인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 중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공동 제헌 의식을 거의 망각하게 되고, 한때는 얀센 이단설의 악영향으로 영성체를 꺼리게 되어 태반이 제찬 봉령에 참여치 않았으며, 신심의 열성을 미사 이외의 신심 행위에, 즉 성심 공경, 9일 기도, 40시간 성시 기도 등에 쏟게 되었다.


20세기


 
20세기로 접어 들면서 미사의 공동체적 의식이 점차 고조되어 미사 중 회중 일동이 성가도 제창하고, 묵주 기도도 합송하고, 자국어로 번역된 미사 경본도 보급되고, 영성체도 자주 하게 되는 한편, 여러 전례 신학자들이 초대 교회의 미사 전례와 그 본의를 사적으로 깊이 연구하여 오늘날의 현실을 본연의 기본 자세로 복귀시키는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되어, 점차로 그 기운이 성숙되어 가던 중 1963년 12월 4일 일대 기적이 타났다. 즉 저 위대한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첫 성과로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이 반포되는 동시, 미사 규식에 대망의 획기적인 개혁이 단행되어, 예수께서 미사 성제를 제정하신 당초의 본의로 되돌아가고 있다. 못 알아듣던 라틴어를 우리 말로 대체하여 우리의 열성을 마음껏 표현하고, 피동적 위치에서 능동적 태세로, 개인적 참여에서 공동적 참여로, 사제와 더불어 그리스도와 함께 지존하신 성부께 제헌의 예를 드릴 수 있게 된 우리의 기쁨은 무엇이라 족히 표현할 수 있으랴.


(196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