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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 및 저서 - 신앙백서

신앙백서 - 성 프란치스코 재속 제3회


위대한 성자 프란치스코


 
가톨릭 교회가 낳은 무수한 성인 중에도 가장 찬란한 업적에 빛나고, 가장 많은 제자들을 배출시킨 성인은 13세기의 위대한 성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방지거)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상식인 만큼 여기 새삼 거론할 여지조차 없다. 극단의 가난과 겸손과 고행으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문자 그대로 따라 복음의 산 표본으로, 속죄의 산 재물로,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 고향인 움브리아 일대는 물론, 전 이탈리아, 유럽 각지, 시리아, 팔레스티나 성지, 아프리카에까지 자신 몸소 또는 제자들을 파견하여 복음 선포를 통한 일대 영적 혁신을 일으킨 희대의 성자, 당시 위기에 빠졌던 교회를 권력 아닌 성덕의 위력으로 구출한 절세의 성웅 프란치스코는 비단 우리 교회 안에서만의 성인이 아니라, 비신도들까지도 추앙 절찬하는 위대한 관상 시인이며 사회 개혁자였다.

 
그리스도의 정신과 생애를 그대로 본뜨려는 그는 언덕(言德) 수련에 장애가 되는 일체의 세속 욕망을 포기하고, 오직 애주(愛主)에 불타는 기도와 고행에 전심하여 산 십자가로서의 궁행(躬行) 과정이 극치에 이르렀을 때 이를 이해 못하는 속인들은 그를 한 개의 광인으로밖에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초라한 기인 안에 잠재하신 그리스도의 참모습이 발견됨에 따라, 아직껏 그를 조소하던 대중이 드디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추종자 되기를 간청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그들을 흔연히 받아들여 우선 마구간에 수용하여 기거를 같이하다가 미구에 포르시웅클라의 분도회 성당으로 옮겨 가 엄격한 수도 생활을 영위하면서 열화 같은 설교와 신묘한 기적으로 속세 대중을 놀라게 하였다. 날로 늘어가는 문도(門徒)들을 거느린 그는 극단적인 정빈(情貧) 속에 집단 수도 규율을 세우고, 진두에서 사표(師表)다운 궁행으로 그들을 영도해 나가는 가운데 글라라를 중심으로 한 여자 수도회, 즉 프란치스코 제2회를 세워(1211년) 남자의 제1회와 더불어 프란치스코회의 2대 지주를 형성했다.


프란치스코 3회의 유래


 
성 프란치스코가 당면한 큰 문제의 하나는 그의 성덕을 추앙하는 나머지 결혼한 재속인들까지 가정 생활을 버리고 그를 따르겠다는 요청이었다. 결혼 생활의 부부 또는 재속 생활이 불가피한 사람들까지 가정을 떠나 수도원으로 집합한다면, 사회 질서에 혼란을 빚어낼 위험성이 있음에 비추어 그들이 재속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수덕 원의(修德願意)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재속 제3회 제정의 묘안이다.

 
그는 관상적이면서 활동적인 수도 생활을 각기 가정에서 영위할 수 있도록 따로 회칙을 마련하여 1, 2회와 혼연 일체의 프란치스코 대가족을 이룩하게 하였다. 최초로 3회의 수도복과 띠를 받은 입회자는 이탈리아 토스가니의 루게치오 복자와 그 부인 보나돈나였다. 이 부부는 상류의 모범 가정을 이루고 있었으나 수도에 뜻을 두고 가산을 처분하여 빈자에게 말끔히 시사하고 전력을 기울여 복음 전파와 이웃 돕기에 나섰다. 이 부부의 초인적 열성은 그 지역 일대에 영적 부흥 붐을 일으켜 많은 동지들과 더불어 “보속하는 형제회”를 조직하였다.

 
1221년 프란치스코가 제정한 수도복, 대소재, 기도, 월례회, 애덕 행위, 입회 자격 등에 관한 2회 회칙이 교황 호노리오 3세의 인준을 받고, 1226년 이래 동회가 본격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쳐 교황 니콜라스 4세와 레오 13세의 확인으로 오늘의 완전한 회칙을 갖게 되었다. 3회의 이 작은 겨자씨는 7백 년 동안 자라고 자라 드디어 오늘의 무성한 거수(巨樹)를 형성하여, 현재 4백여 만의 회원을 헤아리고 있다. 3회원은 그 대부분이 평신도이지마는, 그중에는 성직자도 적지 않다. 3회 창설 이래 오늘까지에 3회원으로서 교황의 위에 오른 분이 도합 20명이나 된다. 13세기의 그레고리오 9세를 비롯하여, 15·16·17·18세기의 여러 교황, 특히 19세기의 비오 9세 이래 오늘의 바오로 6세까지 8위 교황이 모두 3회원이다.

 특히 자신이 3회원인 현 교황 바오로 6세께서 10월 4일인 사부 프란치스코 축일을 택하여 평화의 사도로 만방의 대표들이 모인 유엔 총회를 방문하여 인류애와 평화를 호소하신 것은 평화의 성인 프란치스코의 뜻을 실천한 장기라고 본다. 그 외에 여러 추기경, 대주교, 주교, 신부들이 3회원으로서 재속 수도 생활을 하고 있다.

 
평신도 3회원으로서는 프랑스의 루이 성왕, 가스디아의 페르디난도 성왕, 헝가리의 엘리사벳 왕후, 포르투갈의 엘리사벳 왕후 등 왕족을 비롯한 고관 대작, 시성 단테, 예술계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영국 재상 토마스 모어, 평화의 사자 니콜라오, 샤를레, 기타 동정자, 순교자, 학자, 군인, 노비 등 각계 각층을 망라하여 실로 황홀한 기라성과 같은 장관을 이루고 있다. 3회원 중에서 성인품에 오른 분이 67명, 복자 114명, 계 181명으로서 1회원의 186명과 비슷한 숫자의 성자를 내고 있다.


3회의 목적과 사명


 
원래 재속 3회는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성좌의 인가로 제정된 회칙을 준수하며 세속 생활 중에서 완덕에 도달코자 노력하는 단체이니 만큼,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성화에 전력을 기울이고, 나아가서 이웃 사람의 성화와 그들에의 사랑의 봉사로 주님의 영광을 희구하여, 회칙 준수로 보속을 충실히 이행함이 그 목적이다. 회원은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형제애로 단결하여 공동 노력으로 평후도 사도직에 앞장서 복음 전파의 십자군이 되어야 하며, 경건한 수덕 수범(修德垂範)으로 도의 앙양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 적어도 각자의 가정과 직장 환경에서 복음적 표양으로 사랑과 평화의 사자 구실을 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다.

 
3회원의 존재 가치와 사명에 관하여 여러 교황이 격려와 찬사를 보낸 바 있거니와 특히 자신이 3회원인 비오 10세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재건하는 데 3회원이 주는 힘이 크다” 하였고, 비오 12세는 “제3회는 일반 신자의 평화적 군대 가운데서도 선발된 군단이며, 이제는 전에 없던 정도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사수하며 전세계에 확대코자 포진하고 있다”고 하여 교회 수호자로서의 큰 기대를 걸었다.


입회 자격·절차·서약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따라 자기 성화와 교회와 인류 사회에 공헌하기를 원하는 만 14세 이상의 견진받은 자로서 소속 본당 신부로부터 적격자라는 추천을 받은 자라야 지원서를 낼 수 있다. (기혼 여자는 남편의 동의서를 요한다.) 지원자는 최소 3개월간 교리,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및 3회에 관한 주요 사항을 교육받고 심의회의 심사와 착복식을 거쳐 정식으로 수련기에 들어간다.

 
수련 기간은 만 1년으로서 성복음과 사부의 정신, 3회의 본질과 목적, 회칙의 습득, 특히 회원의 의무와 사명에 관한 교육을 받고 일생을 주께 봉헌하는 서약을 준비한다. 수련기가 끝날 무렵 다시 한번 자격 심사와 피정 신공(避靜神功) 기도를 거쳐 장엄한 서약식의 예절을 통하여 정식 회원으로 입적한다.


의무와 특전


 
3회는 어떤 단일 목적을 위한 신심 단체가 아니고 의연한 수도회이니 만큼, 회원은 그의 생활을 전반적으로 규제하는 회의 규법에 따라야 한다. 그 기본 요령은 복음 정신의 실천, 특히 애주 애인(愛主愛人), 청빈, 절제, 겸비, 정결, 근로, 극기, 찬미, 봉사 등이며, 의무를 규정한 세칙 중 주요한 것은,

(1) 사치를 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모든 난잡한 유흥과 그 기회를 피할 것.
(2) 소정의 재(齋)를 지키고 적어도 매일 한번 고해 영성체할 것.
(3) 성무 일과 또는 대송을 외우고 될 수 있는 대로 매일 미사에 참여할 것.
(4) 소속 형제회 월례 회합에 참석할 것.
(5) 신심 깊은 일상 생활로 이웃에게 좋은 표양을 보이며, 특히 화목과 상부 상조에 노력할 것(빈자 구조, 병자 위문, 상장 기도 등 애덕 행위와 전교, 제성(提醒), 호교 등 사도적 선행).
(6) 소정의 성의(聖衣)와 띠를 항시 착용할 것 등등이다.

 
3회원에게 허락된 영적 특전은 너무나 풍성하여 다른 어디서도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프란치스코회의 대주보가 무염 원죄 성(聖)이시고, 사부가 오상 받은(아마 사상 처음으로) 희대의 대성인이요, 1·2·3회 무수한 성자의 공로 보고가 활짝 열려 있는 만큼, 3회원들이 분배받는 은전은 과분한 감조차 느끼게 한다.

 
아마 1년 간에 받을 수 있는 전대사, 한대사의 수는 기백을 헤아릴 정도며, 은총 지위에 있는 자가 열심히 소정의 칠락 묵주 기도를 바치면 하루 몇 번이고 매번 전대사를 얻게 마련이다.

 
물론 이런 은전은 3회의 목적일 수도 없으며, 다만 이를 통해서 ‘보속을 위한 회원’이 되도록 신도를 초대하는 방법의 일단이다. 회원은 교회 공식 예절이 있을 때 수도복 착용이 허락되고, 사후는 수도복으로 매장될 수 있다. 또 죽은 회원을 위한 1, 2, 3회 형제들의 모든 미사와 기도의 한몫을 영구히 받는다. 3회원은 엄연히 프란치스코회 대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회와 한국


 
프란치스코회와 한국과의 관계는 먼저 370여 년 전 임진 왜란 때까지 소급하게 된다. 임진 왜란 후 일본으로 잡혀간 한국인 포로 중 그곳에서 입교하였다가 순교한 21명 가운데 9명이 1867년 7월 2일 비오 9세에 의하여 복자로 선언되었고, 그중 2명 바스칼 보스와 가이요 지에이몬(1627년 나가사키(長崎)에서 화형 순교)이 프란치스코 3회원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근래의 전래 경위로는 1937년 당시 서울 교구장 원 주교의 승낙으로 캐나다 관구의 데귀에(都) 신부와 벨로스(斐) 신부 두 분이 내한하여 대전의 목동에 자리 잡고 수도원을 개설한 데서 시작되었다.

 
한국 최초의 형제회인 ‘서울 형제회’는 1939년 1월 3일 서울 혜화동 본당 오기선 신부의 주도로 창설되었고 당시 수도의 중견 지성인을 망라한 이 형제회는 자못 희망에 찬 발전상을 보여주었다. 소위 대동아 전쟁의 여파로 일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해방 후 재기하였으나, 6·25 동란으로 다시 정지 상태로 들어갔다.

 
그 후 또 한번 재기하여 꾸준히 운영을 계속해 오던 중 1962년 2월 프란치스코회 주동 책임자 아폴리나리스 총대리 신부의 현지 시찰을 거쳐 그분이 한국 총책임자로 임명됨에 따라 일대 서광이 비치게 되었다. 그는 동회(同會) 수도원과 신학교 및 3회 본부를 위한 대건물을 건조할 원대한 계획하에 이미 기지를 확보하였고, 현하 급속도로 팽창하는 교세에 발맞추어 외국 출신 신부들의 한국어 습득을 위한 교육 기관을 개설하여 명도원(明道院)이라는 명칭하에 현재 서울 정동 소재 신축 사옥에서 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재속 형제회는 1961년에 대전 목동, 인천, 부산, 김제, 1962년에 대전 대흥동, 부여 그리고 대구에, 그 후 연달아 당진, 운산, 규암, 예산, 평택, 춘천, 청주, 이리, 광주, 전주(준비 중) 등지에 조직되어, 현재 1,759명의 형제 회원과 단독 회원을 합하여 2천여 명을 포용하고 있다.

 
지난 9월에 개최된 전국 대회에는 230명의 각 지방 대표 및 일반 참가 회원으로 성황을 이루었으며, 다사 다난한 현 시국하에 회원들이 일치 단결하여 복음 정신의 선양으로 국민 도덕 앙양과 공동선을 위한 사회 봉사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였다. 금차 대회의 주제는 ‘3회원의 사도직’이었고, 앞으로의 성과는 활동적인 지성 청장년층의 노력에 기대하는 만큼, 유능한 청년들의 입회를 크게 환영할 것이다. 3회에 관한 일체 사항은 안 베다(선호) 신부님이 지도하고 있다. 안 신부님의 주소는 서울 특별시 서대문구 정동 17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이다.

(196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