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의 봉제 성시도 어느덧 지나가고 대망의 부활절이 또다시 알렐루야의 종소리와 더불어 우리 마음을 환희와 광명으로 포만시켜 준다.
우리 주님께서는 수난에 앞서 40일 간 광야에서의 엄재(嚴齋)와 악마의 유혹을 퇴치하심으로써 인류 구속의 광고(曠古) 대업을 준비하셨으며, 급기야 갈바리아 산상에서의 십자가 책형(?刑)으로 살신 제헌하심으로써 영광의 부활을 준비하셨다.
우리는 오늘의 부활절을 맞이함에 있어 엄재와 고공(苦功)이 없었으며, 통회와 희생이 없었음을 깊이 부끄러워하며, 아무런 선행의 준비도 없이 환희와 광명만을 탐하려는 자가 모순을 새삼스레 자각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주님의 수난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음과 부활 없이 신앙도 교회도 있을 수 없음을 깨달을 때에, 부활을 중심으로 전후 연계되는 일련의 연관성을 재음미함으로써 이에 내포된 교훈의 가지가지를 더욱 절실히 체득하게 된다. 우리 주님 자신께서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가 24, 26)고 하셨음과 같이, 괴로움이 선행되기 전에 영광이 있을 수 없는 만치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하여 빈한하고 천대받고 미움받던 자라야 후세에서 부요하고 고귀하고 사랑받는 자가 될 것이다.
주님을 위하여 이런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자면 우리 마음에 주님께서 상주하셔야 하며, 주님께서 상주하시자면 마치 주님을 모셨던 새 석총(石塚)같이 우리 심중의 모든 편정을 제거해 버린 깨끗한 새 마음이라야 할 것이다. 우리 선행 실천의 결심은 석총의 바위같이 견고해야 하며, 험한 바위를 다듬는 데는 고행과 보속의 끌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이 석총을 엄봉하고 수직하는 데는 오관(五官)을 삼가고 내적 관상에 전념해야만 되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비로소 수난의 우리 주님께서 거처하시기에 적합할 것이며, 우리가 주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신앙의 기본이 된다. 즉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라고까지 극언한 것으로 보아 가히 추지(推知)할 수 있다.
주님의 부활은 곧 우리 자신들의 부활을 상징하신 것이며, 문자 그대로 이것이 실현될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으로써 우리에게 가장 큰 희망을 주는 신앙의 자극적인 동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차후 영광으로 부활하리라는 희망 없이 무슨 가치 있는 신앙을 가질 수 있겠는가? 우리 신도 개인개인의 일상 생활이 이 희망의 교리, 안위의 교리인 부활에 일관적으로 결부되어 비로소 우리 일거 일동에 참된 의의와 가치가 발견되는 것이다. 우리는 죽어 버린 후의 부활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 개아(個我)의 영적 생활의 쇄신으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죄습(罪習)의 구각을 완전 탈피함으로써 생전의 부활을 기도할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사후의 영광스런 참된 부활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선행 조건인 것이다.
개아 부활의 집대성은 사회 부활을 성취시켜 사회악의 갖은 양심이 변모 정화될 것이며, 이로써 전인류 사회의 평화와 행복이 비로소 알렐루야의 찬가로 더불어 영속될 것이다.
(195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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