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있어서 전 영국 종교계와 사상계에 가장 큰 동요와 획기적 혁신을 일으킨 역사적 사상(事象)은 옥스퍼드 대학 교수의 일단(一團)을 중심으로 한 소위 ‘옥스퍼드 운동’이 곧 그것이다.
옥스퍼드 운동이란 뉴먼, 키불, 퓨시 등 당시 학계와 종교계의 쟁쟁한 거석(巨碩)들이 영국 감독 교회의 부흥, 즉 앵글리카니즘의 교의와 통치 제도를 가톨리시즘의 그것에 복귀시켜 근본적인 확청(廓淸)을 단행하려는 기도에서 나온 개혁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거금(距今) 100년 전, 즉 1833년에 옥스퍼드에서 키불이 교회 혁신의 필요를 통론하고, 동년 12월부터 동지 홍유(同志鴻儒)들이 ‘트랙트 총서’를 간행한 것으로 발단된 일련의 부흥 운동으로서, 트랙테어리언 중의 제1인자는 당시 옥스퍼드 오리엘 칼리지 교수요, 성 마리아 교회 장로이던 존 뉴먼이었다. 뉴먼은 19세기가 낳은 최대의 종교가요, 사상가요, 학자요, 문장가이며,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전 영국 종교계와 학계의 존숭과 흠앙을 일신에 독점하고 있던 만큼, 저의 혁신 운동이 선풍적인 기세로 당대 정신계를 풍미하여 영국 종교 사상에 획기적 신기원을 현출시킨 것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뉴먼의 활약은 다만 옥스퍼드의 트랙테어리언으로뿐만 아니라, 성 마리아 교회의 장로로서 매주일 교회 강단에서 앵글리카니즘의 혁신을 열렬히 절규하며, 가톨리시즘으로의 복구를 고조한 결과 매티우아놀드, 글래드스턴 등 당시 우수한 청년 학도와 유력한 종교가들의 지지를 얻어 드디어 구체적인 확청 운동을 실현시켰던 것이다.
이 확청 운동이 일부 인사의 절대 지지를 획득하는 한편, 종내 가톨리시즘을 증오하던 앵글리칸 전통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필연적으로 맹렬한 반대 운동의 전개를 보게 되었다. 앵글리칸측은 뉴먼에 대치하여 자가 옹호의 신학 팜플렛을 발간하고, 혹 설교로, 혹 강연으로, 회합으로, 혹은 국권과 폭력에까지 소(訴)하여 백방으로 대응을 꾀하였으나, 뉴먼은 끝내 1854년에 단연 영국 교회를 이탈하여 가톨릭 교회로 귀정하고, 그 동지들도 접종 개종하여 영국 교회에 치명적인 상흔을 주게 되었다.
옥스퍼드 운동의 동기와 그 발전 단계의 전 과정을 알자면, 그 중심 인물인 뉴먼 개인이 경험한 심경의 변천을 재음미함이 필요한 과제로 우리에게 부여된다. 이제 가장 순수한 앵글리카니즘으로부터 가장 완전한 가톨리시즘으로 전향한 뉴먼의 인식적 방면으로부터의 종교 개혁을 잠시 고찰하여 보려고 한다.
뉴먼은 유년기로부터 순영국 프로테스탄트 가정과 사회 환경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그도 로마 가톨릭에 대하여 많은 편견과 의혹을 가지고 언론과 문서로 여러 기회에 진지하고 솔직하게 저의 소신을 피력하였던 것이다. 즉 로마 교회는 그리스도 교의를 완전히 보지(保持)치 못하였고, 특히 초대 신경(信經)에 많은 추보(追補)를 가하였을 뿐 아니라, 외형적인 의식을 편중하여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를 전적으로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앵글리카니즘의 선입견으로 로마에 대한 강렬한 증오를 품고 있었으니, 1832년에 요우(僚友) 플러드와 동반하여 이탈리아 여행의 도상 로마에서 장시일을 두류(逗留)하며 여기저기 성당을 순방할 때, 그 나라 내에서 소위 개혁자들이 파괴시켜 버린 성시적(聖詩的) 정취의 매혹에 깊이 감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만 로마라는 단순한 이유로 증오의 정염을 억누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서 보고 들은 가톨릭 종교 의식의 신비성과 시적 감격에 커다란 감흥을 체험하였으며 불멸의 낙인을 받았었다. 외적 의식뿐 아니라 그가 영국 교회의 교의 조직의 경험을 가톨릭 교회의 완전함에 비교할 때 점차 심중의 불안을 의식하게 되어, 로마 여행 귀도에 배 안에서 천상의 광명을 구하는 기도라고 할 만한 유명한
“Lead Kindly Light” 시(詩) 한 편을 읊어 그 오뇌의 심경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간곡한 빛이여, 인도하소서. 둘러싸인 암흑 속에서 너는 나를 이끌어 나가소서. 밤은 캄캄하고 나는 본향에서 멀었나이다. 너는 나를 이끌어 나가소서.”
이 시는 뉴먼이 각인한 지적 생명의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다.
1833년 7월 영국에 되돌아왔을 때 뉴먼은 당시 발효한 정치 문제, 즉 영국 정부 조령에 의한 일부 네덜란드 감독교 법의 폐지 문제로 조야의 여론이 소연한 정경에 직면하였다. 이 문제가 영국 교회에 일대 위해를 배태한 것을 간파하고, 그 대책으로 동료 성직자들의 각성을 촉구하여 그들 본래의 사명을 의식시키기 위하여, 즉 교리와 교권의 수호를 목표로 트랙트의 간행을 결의케 되었다.
동년 12월 발간된 최초의 트랙트에는 전혀 사도 전래의 교의를 전개하고 영국 교회가 그리스도 교의의 충실한 수호자가 되는 소이를 현현(顯現)코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트랙트 총서 중에는, 혹은 교의상 특질에 관하여, 혹은 실천적 특질에 관하여 다각적으로 논술된 바 있어 그 수가 90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중에도 사도 전래 문제는 항시 그 주요한 테마였다.
그는 심각하고 통렬한 어조로 성직권이나 국가에서 발생하지 않고 오직 사도로부터 끊임없이 역대 주교에게로 계승된 초자연적 권력임을 강조하여 성직자들로 하여금 종교의 초자연적 물질을 규지(窺知)시키려 했다. 그러나 정부의 장중(掌中)에 파악되지 않기 위해서는 영국 교회도 결국 그 전래의 역사성과 사도 전래성을 강조하며, 그 기원에 가서 추소(追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국가의 교회 성직권 침범에 대항함에는 초대 교회사를 연구하는 것이 그에게 유일한 방안이었다. 그는 당시의 감회를 아골노지아에 요약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와 같이 분열하고 위태를 배태하며 너무나 자기 역량에 무지한 영국 교회에 저 초대 교회의 생기 있는 능력을 비교하였다. …앵글리카니즘에는 혹종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그 대책으로는 우선 영국 교회 자신을 오류에 빠지게 한 속권에의 굴복을 폐기하고, 특히 그 초자연적 제반 권한의 회복을 꾀하는 동시에 그 기원과 신적 사명에 대한 긍지를 고양시켜야 한다”고 갈파하였다.
또 뉴먼은 소위 중도(中道, Via media)의 이론을 조직적으로 이 총서 중에 전개시켰다. 즉 가톨릭 교회에서 그 교의 원리와 성사 원리를 채입하는 한편, 소위 로마적 부패를 배척하고, 타면으로는 해석 난용의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에 통격을 가하는 동시에 가톨리시즘의 교의상의 무류성에 도전하였다. 즉 그는 진심으로 로마 가톨리시즘과 독일 프로테스탄티즘과의 중간의 엄정한 중도를 발견한 것과 같이 확신하고, 자기 영국 교회적 제창의 연마에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뉴먼은 자기의 제창을 일층 유력하게 보증하기 위하여 교회 제(諸)교부, 특히 초대 제교부 등의 특종 연구에 착수했다. 이를 위하여 일종의 도서관까지 창설하고 1839년부터는 기독 일성론자(一性論者)의 이단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제반 문서를 조사 중 돌연 그의 머리에 일대 의념(疑念)이 떠올랐다. 즉 자기가 소속한 영국 교회도 필경은 대(對) 로마 관계에 있어서 여러 동양 제(諸)이단과 같은 교의적 입장에 서 있지 아니한가라는 의문이었다. 이것은 영국 교회의 견실성에 대한 그의 최초의 의념이었다.
후일, 그가 아폴로지아(Aplogia) 중에 영국 교회 가치에 대한 최초의 의념에서 발생한 공포를 말하기를 “나의 성채(城砦)는 상대(上代)에 있었다. 나는 초대 세기의 역사를 주시하고 그 가운데 완연히 경중(鏡中)의 반영과 같이 앵글리카니즘의 충실한 반영을 발견하였으나, 홀연 나는 영국교도야 말로 참으로 기독 일성론자인 것을 발견했다.”
다시 2년이 지난 뒤 같은 의념은 한층 더 강렬해졌다. 이것은 아리아니즘 문제 연구 중의 일로서 그는 순(純) 아리우스교도가 독일 프로테스탄트요, 반아리우스교도가 영국교도임에 반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세기를 통하여 영구 불변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그 지론인 중도설에 일층 공고한 근거를 주고자 제종(諸種)의 신론거(新論據)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영국 교회의 정상화를 꾀하여 보았다. 특히 그는 가톨릭 교회가 원시 신경(Credo)에 많은 신교의를 덧붙여 온 데 대해서만 의념을 가졌었다.
1841년 2월에 간행된 유명한 최후의 트랙트 제90호에 그는 신기하고도 대담한 테마를 공안(公眼)에 전개시켰다. 즉 그는 그로써 앵글리칸 신경의 39개조는 가톨릭적 견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려 했던 것이다. 이 트랙트 제90호는 영국 교회 내부에 있어서 장기적인 풍파를 일으키는 한편, 뉴먼의 교의 진화에 새로운 전기를 준 것이었다. 이로써 뉴먼은 기독교 교의의 진리성은 역사성만으로 측단할 것이 아니라, 전 교회의 결정에 의하여 판단되는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즉 로마 교회가 사도 교의를 부연 발전시킨 것은 다만 신기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재론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 아우구스티노가 도나티스트 이단 논쟁에 제(際)하여 “전 교회의 결정함에는 오류가 없느니라”는 규정에 의하여 단을 내리고, 실례대로 로마 교회가 교의상 어느 한 점을 취사하거나 부연한 것은 항시 각 지방 교회의 전적 협찬에 의한 것임을 명확히 의식하게 되었다. 즉 뉴먼이 우금 로마 교회를 비난하여 원시 교의의 부패라고 믿어 오던 선입견도 여기 와서 비로소 사도 교의의 정당한 발전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실로 그는 초대 그리스도 교회사의 광명으로 인하여 유일한 교회만이 원시 시대의 완전한 자태를 보존하여 왔다는 확증을 파악하였다. 이 유일한 교회야말로 곧 로마 가톨릭 교회요, 모든 시대의 지식에 적합한 수단으로 영원히 그리스도의 성교(聖敎)를 전할 생생한 전통의 보유자였다.
진리의 광명을 발견한 그는 그 전혼(全魂)을 광명을 향해 광개(廣開)하였다. 광명은 점차로 풍부히 흘러 들어, 그는 마침내 진리를 위한 자아 희생을 결의하고 끝까지 그 소신을 향하여 매진하기로 했다. 후일 그가 “나는 아직까지 광명에 대하여 죄를 범한 일이 없었다”고 단언한 것은 참으로 진실한 고백이었다.
트랙트 제90호가 출간되자,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각계에서 강경한 반대가 늘어나고 세론이 효효(??)하여 모든 의념과 증오는 뉴먼의 일신에 집중케 되었다. 당시 옥스퍼드 감독(Bagot)은 분연히 트랙트 총서의 간행의 중지를 명하고, 일반 교도들은 뉴먼을 일종의 모반자로까지 간주케 되었다. 그 가운데 교격한 분자는 뉴먼의 제의로 영국 교회 내에 들어왔던 모든 로마적인 색채를 띤 성화, 성상, 제단 등을 파괴하여 단연 그의 로마 전향에 도격(挑擊)하는 기세를 보였다.
오해와 증오의 선풍이 뉴먼 일당을 중심으로 전 영국을 풍미할 때, 뉴먼은 이미 각오한 바 있어 추호도 동요함이 없이 가장 명랑한 마음으로 그의 소신을 향하여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제90호를 최후로 트랙트 총서의 간행을 중지하고, The Brithish Critic의 주필을 사임하고, 1843년 9월에는 옥스퍼드 주임 장로의 직을 축기하고 ‘리틀 모어’ 별장에 은퇴하여 고행과 기도 속에 오로지 가톨리시즘으로서의 귀정을 준비하며 주의 시일을 고대하였다.
저는 한층 더 면밀한 주의로 우금 자기가 가톨릭 교회를 비난해 오던 신(新) 도그마(敎義)가 과연 생생한 교의의 상태적 발전이냐 아니냐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귀정을 성취시킨 것은 곧 이 연구였으니, 10월 2일 그는 그 기독교 교의의 발전에 관한 고찰의 결론을 탈고하고, 1845년 10월 9일 ‘리틀 모어’ 소성당에서 이단 폐기서에 서명하고, 고난회 사제 모미닉 신부 주제하에 입교식을 거행하여, 그의 다년 간의 숙망이던 로마 가톨릭 교회로 단연 귀정하였다. 그 이듬해 10월에 그는 로마에서 사제(신부)에 서품되고, 1879년 5월 12일에 교황 레오 13세로부터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뉴먼의 귀정에 대하여 글래드스턴은 “이는 영국 사상 일대 획기적인 신기원이었다”고 했고, 그 후 데슬네리는 “이 개종은 정지 없는 동요를 영국에 준 것이다”라고 갈파했다.
이 양자의 단언은 진실하였으니, 이는 상금(尙今)까지 성행되는 옥스퍼드 귀정 운동의 역사가 확증해 준다.
뉴먼이 준 지대한 영향의 유래는 곧 그 개인의 완전한 진지성, 즉 대(對) 로마적 편견에 있어서의 진지성과 회의 시의 진지성, 특히 결정적으로 귀정할 때의 진지성과 그의 고결한 기독교적 생명의 이상과 실천이 곧 그것이다.
실로 뉴먼의 생활은 부박성(浮薄性)의 미진(微塵)도 볼 수 없는 오직 진리 연찬에 일신 정력을 경주한 고귀한 학도적 생활이었다. 그의 깊은 신심과 완전한 청렴과 결향(潔向)한 생애가 그 고제(高弟)들과 일반 구도자들의 정신을 얼마나 고양시켰는가를 추지할 수 있다.
뉴먼의 최초의 제자들이 가톨리시즘으로의 개종을 준비하게 된 것도 실로 그의 고결한 인격과 ‘리틀 모어’에 은처할 때 엄숙한 종교적 분위기의 영향이 막대하였음에 기인한 것이다. 그의 고제 달겐스(Dalgains), 세인트 존(St. John), 산톤(Santon), 페이버(Fabeh) 등은 모두 당시 쟁쟁한 인물로서 그 대부분은 대학 출신 또는 성직 계급의 인사들이었다.
뉴먼 개종 후에 3백여 명이 뒤를 이어 개종했고, 이 가톨리시즘으로의 개종 운동은 해마다 계속되어 끊임이 없었다. 근년에 와서는 옥스퍼드 대학 안에 뉴먼 클럽이 창립되어 가톨릭 대학생들의 맹렬한 선전과 호교 운동으로 수년 내에 영국 교회로부터 개종하는 자가 매년 만 명 내외로 헤아리게 되었다.
옥스퍼드의 최초 개종자들이 다만 고상한 생활 이상으로, 확고한 신념이 요구하는 모든 희생으로 도덕 생활의 고결한 품위로 유도한 위인이었으며, 그의 사업은 가톨리시즘만이 실제의 정통으로 그리스도의 진정한 성직을 계승하여 왔다는 사실을 기백만 구도자에게 인식시켜 준 일치에 있어서의 부흥의 사업, 즉 진정한 그리스도 교회에 절대로 요구되는 교의적 합류일 뿐이었다. 저들이 가톨릭 교회로 복귀할 필요를 인식케 된 것은, 전혀 가톨릭 교회가 항시 도처에서 동일한 교의를 선포하고 유일한 수장(로마 교황)에게 순종하여, 동일 불변한 교회로서 존속하며 신적 기원의 비인을 보존하여 온 사실에 감하여 대오한 바 있음에 기인한 것이다.
(1934.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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