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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6·25 동란과 워싱턴 - 1. 6·25 사흘 전 덜레스의 언약

6·25 사흘 전 덜레스의 언약

 
대한 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얻기 위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수석 대표로 참석, 외교계에 첫발을 내어디딘 나는 1949년 1월 5일 초대 주미 대사로 임명되어, 1951년 2월 3일 국무 총리 인준으로 사임하기까지 만 2년 동안을 재직했다. 이 동안에 6·25 동란을 겪은 나는 미국 및 유엔과의 외교 관계를 거의 혼자서 전담하다시피 했다.

 
6·25 동란과 워싱턴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6·25의 역사적 배경을 이룬 몇 가지 국제적 사건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6·25 한 해 앞서인 1949년 4월 4일, 워싱턴에서 나토(NATO) 조약이 체결되어 공산 침략의 위협에 대한 서방측의 집단 안전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날 조인식에 초청되어 이 역사적인 조인 광경을 목격하였거니와 나토의 성립으로 서방 국가들이 공산 침략에 대해 철석같이 단결한 안도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천만 뜻밖에도 당시의 미 국무 장관 애치슨 씨는 워싱턴 프레스 클럽에서의 연설을 통하여 “한국과 자유 중국은 미국의 방위권에서 제외된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국방과 관계되는 극동 정책을 밝힌 이 연설에서 이와 같은 청천 벽력의 발언이 튀어나오자 우리가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뜻밖의 발언에 대해 한국의 실망과는 대조적으로 공산측이 희희 낙락한 것은 물론이다. 남침을 꿈꾸고 있던 소련과 북괴는 이 발언을 계기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이 연설 내용을 즉각 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이어 국무성을 방문, 그 발언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애치슨 씨로부터 한국을 방위권 안으로 포함시키겠다는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그 밑의 국무성 관계관들도 내가 납득할 만한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어물어물하고 있었다.

 
그 후 나는 본국 정부와 협의한 끝에 태평양 지역의 자유 국가들도 나토와 마찬가지로 집단 방위 조약 체결을 추진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나는 이 대통령의 지시로 태평양 연안 국가에 대해 집단 안전 방위 체제의 체결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그해 4월 10일 대통령 특사 격으로 황창하(黃昌夏) 씨를 대동하고 워싱턴을 떠나 뉴질랜드, 호주, 필리핀 등을 역방했다. 필리핀의 퀴리노 대통령과 호주, 뉴질랜드 수상 등과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이들은 그 필요성은 절실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이구 동성으로 미국이 이 조약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의가 없다는 태도였다.

 
나는 각국 역방을 마치고 5월 9일 귀국하여 이 대통령에게 상세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태평양 연안 자유 국가의 방위 기구가 미처 구성되지 못한 채 6·25 동란이 터지고 말았다.

 
6·25가 터지기 한 달 전의 국내외의 정정(政情)은 소연했다. 5·30 총선거의 불꽃이 튕기고 있었는가 하면, 38선 부근에서는 북괴군의 산발적인 남침이 잦았다. 이 무렵, 나는 38선의 경비 상태가 궁금하여 최전선을 시찰했다. 강문봉(姜文奉) 장군의 안내로 38선을 돌아본 나는 너무도 허술한 경비 태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기도 별로 없는 병사들이 천막 몇 개를 쳐놓고, 더러는 파수를 보고 더러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였다.

 
초소를 둘러보고 본대가 있다는 후방으로 돌아오니, 거기에서 비로소 박격포 쏘는 연습을 하는 국군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실탄을 가지고 하는 연습이 아니라 그냥 빈 포를 가지고 맨손으로 발사하는 흉내만 내는 것이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미 고문관에게 물어 보니, 그의 대답이 “나도 잘 모르겠다. 실탄을 보급 안하는 이유는 고위층에 물어 보라”는 것이었다.

 
서울로 돌아오자 나는 이 대통령과 임병직(林炳稷) 외무 장관에게 38선의 경비 상태를 소상히 보고하고, 내가 미국에 돌아가면 무엇보다도 먼저 군비 공급을 교섭하기로 했다. 실상 나도 6·25가 발발하기 6개월 전에 이미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군에 필요한 군장비를 해주도록 호소한 일이 있었으나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이 무렵, 나는 덜레스 미 국무성 고문이 방한하리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미 대사관에 확인해 보니 그가 6월 17일경 방한하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파리 유엔 총회에서 덜레스 씨를 처음 만났으나 총회 기간 3개월 동안 거의 매일 만나 한국 승인 문제를 상의했고, 그 후 미국에서도 자주 접촉을 가진 관계로 꽤 친숙한 사이였다. 덜레스 씨는 자기가 대한 민국 탄생에 산파 노릇을 했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덜레스 씨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미국에서 만나 한국 정세를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여 부랴부랴 워싱턴으로 떠날 차비를 했다. 나는 워싱턴 향발에 앞서, 우리 정부 당국자에게 덜레스 씨가 한국에 오면 국빈으로 융숭한 대접을 하도록 당부하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38선을 시찰시키고 새 국회(제2대) 개원식에 초청하여 연설할 기회를 주라고 부탁했다. 덜레스 씨를 붙잡고 해야 할 워싱턴에서의 나의 외교 활동과 국내에서의 그것이 일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미리 우리 주미 대사관에 연락하여 덜레스 씨를 주빈으로 하는 만찬회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내가 워싱턴에 도착하자, 그날 바로 워드맨 팍 호텔에서 만찬회를 베풀었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 날인데도 초대된 미 국무성 고관들은 빠짐없이 참석해 주었다. 나는 주빈인 덜레스 씨와 나란히 앉아 한국을 다녀온 이야기를 나누고, 특히 38선의 경비 상태가 너무도 허술하다는 실태를 설명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덜레스 씨에게 방한 즉시로 38선에 몸소 가 볼 것과, 국회 개원식에 참석하여 유사시에는 미국이 한국을 즉각 지원하겠다는 언약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덜레스 씨는 나의 이 말에 “전쟁이 금방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처럼 서두르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에 가 보면 자연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만한 언약도 안할 바에야 한국에 가도 아무런 의의가 없으며 아무도 환영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덜레스 씨는 “내가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공식 직위에 있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이런 책임 있는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망설이는 태도였다. 그래도 나는 끈덕지게 한국의 사활 문제에 관한 부탁이니 꼭 들어 달라고 재삼 요청했다.

 
막상 덜레스 씨가 한국으로 떠나던 날 비행장까지 환송을 나간 나는 다시 한번 그 두 가지 부탁을 되풀이했다.

 
덜레스 씨 부처는 6·25가 발발하기 1주일 전인 6월 17일, 서울에 도착했다. 나는 그가 두 가지 부탁을 이행하는가 안하는가를 통신과 신문을 통하여 살피고 있었다. 덜레스 씨가 서울에 도착하자 즉시 군부의 안내로 임병직 외무 장관과 함께 38선을 시찰했다는 보도가 외신으로 들어오고, 6월 19일에도 국회에 가서 “한국이 어떤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받을 때는 홀로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연설을 했다는 통신 보도를 보고 나는 무척 기뻤다.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의 만족한 다짐은 아니라 하더라도 한국이 침략을 받았을 때 미국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은 강력히 시사한 연설이었다.

 
덜레스 씨는 한국에 3일 간 체류하면서 그야말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6월 22일 이한했다. 그가 서울을 떠난 지 사흘만에 6·25 동란이 터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