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天主)께 기구하는 운석 선생
능력과 덕이 없는 사람이 나라 일을 맡았다는 것에 스스로 도의적 책임을 느끼는 바이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잘해 보려고 있는 힘을 다 써 보았으나 결과가 이쯤 되고 보니 할말도 없다.
민주당의 집권 이래 모든 악조건하에서도 온 정력을 다 바쳐 가며 치적을 올리려 노력한 흔적은 1961년 초에 발표한 ‘중점적인 정부 시책 7개 항목’과 그 다음 발표된 ‘정치 백서’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와서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나는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 또 보복하려 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어떻든지 하느님이 이 나라를 버리지 말아 주시기만 바랄 뿐이다.
내가 국민 앞에 저지른 잘못은 속죄의 심정으로 사과할 뿐이다.
8개월이라는 기간 국정을 맡았다가 무능하다는 말을 들으며 물러나 앉은 나로서, 지금 새삼스럽게 절감되는 것은 만사가 인력만으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 집안을 다스리는 것도 수월한 일이 아니지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하느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없이는 힘들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나의 덕이 모자라고 신앙이 부족하여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으니 하느님께 사죄하고, 나로 인하여 이 나라 백성이 입은 피해를 하느님과 국민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앞으로도 정치인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그 뜻을 받들게 되어야 이 나라가 행복스럽고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만약 하느님을 무시하고 적대시하여 시속(時俗)을 따르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울 것이다.
그래서 다만 한 사람이라도 더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복종하도록 그 복음과 계명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다.
제2 공화국의 각료로 있던 사람 중 대다수가 독실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분들도 허탈감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나머지 어딘가 마음을 정착하고, 참된 구국의 지표를 모색하던 그들이 반성 끝에 성실한 구도의 노력으로 얻은 신앙이다.
현석호(玄錫虎), 조채천(曺在千), 김영선(金永善), 박찬현(朴讚鉉), 박재제(朴在濟), 한통숙(韓通淑), 김판술(金判述) 제씨가 그들이다. 이분들 외에도 당시의 차관급 여러 인사들과 국회 의원들이 신앙을 갖게 된 것도 같은 경로와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안다. 신앙인에게는 구원의 길이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이다.
정치를 떠난 나로서 정치인들에게 할말은 없다. 다만 정치인이 되기 전에 옳은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을 모르거나 무시하고서는 그 누구도 정치를 옳게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고 싶다.
새로운 세대를 창조하는 젊은이들도 자신의 앞날을 개척하고 더 나아가 국가 민족과 세계에 공헌하려는 뜻을 가졌다면, 인간의 종착점이 어디 있으며 인간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를 안 후에 그 길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이 길을 벗어나서는 모든 노력이 헛되는 것이다.
이 길은 오직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성실한 신앙에서만 찾을 수 있다.
전후, 가장 유력한 정치 지도자의 한 사람인 서독의 명재상 아데나워 씨가 정계에서 은퇴할 때, 그의 일생을 통한 정치 경험의 총 결론으로 아래와 같이 선언한 그의 정치 철학은 내게 깊은 공감을 준 바 있다. 그는 말하였다.
“나는 신이 정한 원리에 따라 국가를 다스려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사실을 확신해 왔다. 독일을 재건할 때 그리스도 정신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한 것도 그 때문이며…, 나의 가톨릭 신앙과 음악, 미술, 꽃에 대한 나의 취미는 바쁘고 고통스런 세상살이에 균형을 유지하게 했다.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요한 싸움은 그리스도교적 견해에 입각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적인 물질주의와의 대결이다. 이 싸움은 훨씬 더 오래 계속될 것이지만, 나의 견해로서는 그리스도교 원리에 바탕을 둔 개념이 승리하지 못할 때는 평화와 자유는 끝까지 달성하지 못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전세계에 계속적으로 번져 가고 있는 분쟁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과 공산주의와의 싸움이다.”
즉 그리스도교 원리만이 세계 평화의 바탕임을 역설한 것이다.
(196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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