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3월 위기설’이니 ‘4월 위기설’이 있었지만, 이는 장 정권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사람과 어느 기자의 추궁에 넘어간 모(某) 인사의 발언을 기자가 왜곡 보도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모든 혼란이 종식되고 의욕적인 제2 공화국이 튼튼한 기반 위에 설 준비가 끝난 때였다.
5‧16 일주일 전에 나는 군 일부에서 군사 쿠데타 모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전에도 2‧3차 다른 부류의 쿠데타 모의가 있다는 미확인 정보를 입수하고 비밀리에 내사케 한 일이 있었다. 내사 결과 확실한 것이 아니라, 쿠데타 모의가 전연 없었는지 내사가 철저하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그전의 2‧3차 모의설은 불발이었다. 그러던 차 이것이 4번째의 정보였다.
나는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의 육군 참모 총장인 장도영(張都暎)을 불렀다. 내가 입수한 정보는 박정희(朴正熙) 소장을 주동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 모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입수한 정보를 장도영에게 전하고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내 말을 들은 장도영은 “천만에 말씀이십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는 태연한 대답이었다.
이것이 5월 초순경의 일이다. 장도영의 대답을 들은 나는 도시 안심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입수한 정보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구체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구 어느 중국 음식점에 몇몇이 모여 활약하고 있다는 내용도 알았다.
“염려 말고 안심하십시오”라는 말만 반복하는 대답이 불만스러워, 나는 정색을 하고 그에게 엄숙히 말했다.
“참모 총장이 먼저 알아서 나에게 보고해야 될 성질의 사건을 반대로 내가 참모 총장에게 지시하고 있으니 책임 지고 내사해 보시오.” 이러한 내 말에도 “알아는 보겠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라는 대답이 반복될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엄밀히 조사할 것을 단단히 부탁해 두는 한편, 이 사건에 관련된 민간인도 확인해 보라고 검찰에 명했다. 검찰로 말하더라도 그 무렵에 2‧3차나 그와 비슷한 정보를 입수하고 조사해 본 일이 있었다. 이렇다 할 단서가 잡히지 않아 정보 사기꾼에게 속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내 지시가 있은 지 며칠 후에 쿠데타 관련 민간인 혐의자 한 명을 체포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를 심문해 본 결과 끝내 만족할 만한 자백을 듣지 못했다 하여, 결국 또 하나의 사기꾼으로 여기고 있었다.
검찰측에서 장도영을 만나 이 사건에 대하여 문의해 보았던 모양이다. 이때에도 장도영 총장은 “군내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소. 공연한 염려니 국무 총리더러 안심하라고 하시오”라는 말을 하게 되어 흐지부지되고만 것이다. 군 책임자와 검찰측의 말이 염려없다는 것이었다.
육군 참모 총장과 검찰측의 말이 한결같으니, 더 이상 추궁하여 불신의 태도를 보일 수가 없었다. 군 내에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는 계속하여 들어왔다. 재차 내 추궁을 받은 장도영의 대답은 여전했다.
“모두 공연한 모략입니다. 아무 염려 마십시오. 제가 있는 동안에 절대 그런 일이 없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국방 장관,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에게 같은 말로 ‘안심하라’는 말뿐이었다. 5월 15일에도 나는 아무런 관심없이 당의 회의를 가졌다.
다음날 1961년 5월 16일 새벽 2시경이다. 장도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에게 직접 온 것이 아니고 경호실을 통한 보고였다. 그때 나는 반도 호텔 809호실에 있었고 경호실은 808호실이었다.
30사단에서 장난을 하려는 것을 막아 놓았고, 지금 해병대, 공수 부대가 입경하려는 것을 한강에서 제지시키고 있다는 보고가 아닌가.
“아무 염려 마시고 그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십시오”
여전히 무사하다는 말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한 주일 전에 내가 말한 그거 아닌가?”
“아니 별것 아닙니다. 염려 마시고 제게 맡기십시오.”
“염려 말라는 말만 말고 내게 곧 와줘. 와서 직접 자세히 보고를 하게. 매그루더 사령관에게도 보고했나?”
“네, 했습니다.”
“그래, 곧 좀 왔다 가게.”
“곧 가겠습니다.”
경호원을 호텔 현관에서 대기시키고, 불안과 초조속에서 장도영을 기다렸으나 종내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후에 총성이 요란하게 들렸다.
신변의 위험을 느꼈다. 이성을 잃은 군인들이 무슨 짓을 못하랴 싶었다. 사세 부득이 그 자리를 피했다. 반도 호텔에 군인이 들어오기 전 불과 10분 앞서였다.
가야 할 목적지를 정하고 나선 것은 아니다. 우선 길 건너 미 대사관으로 가 보려 했으나 문이 절벽으로 잠겨 있었다.
무교동 골목으로 빠져 청진동으로 달려가, 한국 일보사 맞은편 미 대사관 사택의 문을 두드렸다. 어떤 엄명이 내렸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길에서 방황할 수도 없어 일단 안전한 곳에서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몸을 피하기로 했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작정은 없었다. 잠시 피신해 정세를 보기 위해서 아무도 짐작 못할 혜화동의 수도원으로 가 보았다. 내자가 전부터 친교가 있던 원장에게 사정을 말하고 허락을 받아 방 하나를 얻었다. 혹자는 겁에 질려 꼭꼭 숨어만 있던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그런 것만은 아니다. 거기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므로 보류해 둔다.
이때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다. 무슨 까닭으로 이런 변을 당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16일이 밝아 왔다. 시민들의 얼굴은 무표정 그것이었다. 군사 쿠데타의 절실한 필요를 느껴 이 박사 하야 때처럼 호응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쿠데타에 가담한 일부 사병들도 영문을 몰랐으리라.
이것으로 봐도 이 쿠데타가 군 전체의 의사가 아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쿠데타가 지난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장도영이 양다리를 짚지 않고 처음부터 굳세게 나갔거나 매그루더를 만난 윤 대통령이 진압할 뜻을 표시했다면 5‧16 정변은 결코 성공되지 못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기를 바랐던 바이고, 먼저 내통을 받았을 때에도 기대하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에 ‘올 것이 왔다’는 말을 하게 되지 않았던가. 윤 대통령의 이러한 심사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민주당 덕분에 대통령이 되고 같은 제2 공화국의 원수요 총리라면 도의상으로라도 운명을 같이해야 옳을 일이지, 어서 정부가 전복되기만 바라고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으로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사퇴 순간의 모습
5월 18일, 나는 정식으로 사임을 발표했다. 내가 사임을 결정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윤 대통령의 태도를 알았기 때문이다. 쿠데타를 지지하는 태도를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17일경에는 알게 되었다. 미 대사관으로부터 윤씨의 태도에 대한 연락을 받았다. 윤씨가 그렇게 나오는 한 자기들은 별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군 쿠데타를 지지할 뿐 아니라 쿠데타 진압을 방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음을 알았다.
대통령의 김모(金某) 비서를 1군 사령관 이한림(李翰林)에게 보내어 쿠데타 진압을 저지하도록 했다. 국군 통수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의 태도가 이러한 것을 알고는 쿠데타가 진압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윤 대통령뿐만 아니라 장도영까지도 쿠데타에 가담하게 되고 보니, 총리 사임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이 후에도 여러 가지 수난이 계속되었다. 헌병과 특무대원 10여 명이 6개월 간이나 나를 연금 상태에 머물게 해놓고 24시간 감시하였다. 나중에는 소위 ‘임시 특별법 위반, 혁명 과업 방해죄, 국가 보안법 위반, 반국가 단체 구성 혐의’라는 죄목으로 구속, 투옥까지 당했으니 더 할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군사 혁명재판 관계 소송 기록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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