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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채록 · 회고

회고 - 민주주의의 씨앗 (현석호)

현석호(玄錫虎, 전 국방 장관)


국제 신사의 면모


 장 박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어느 미국인이 인물평을 한 것을 먼저 적으려 한다. 그것은 장 박사가 서거한 후 외국인이 베푼 어느 파티에서였다.

 
“닥터 장의 정치적 역량은 외국인인 나로서는 어떻다 평하기 어려우나,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한국에도 그런 젠틀맨이 있는가 하고 놀랐습니다. 우리 미국에서도 그런 젠틀맨은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 미국인은 짧은 말로써 정확히 표현했다. 사실 장 박사는 국제적인 젠틀맨이었다.

 
그분이 서거한 후 많은 인사들이 “점잖은 분”, “인격자”라고 평했다. 나도 더없이 훌륭한 분이라고 한마디하고 싶다.

 내가 장 박사를 안 것은 민주당을 창당할 무렵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알기는 했었지만 직접 교분은 없었고, 다만 외교관으로서의 편모만 알았을 뿐이다. 내가 그분과 같이 일을 하여 온 것은 그분의 정치 역량보다도 그분의 고매한 인격에 끌린 때문이었다. 나는 그분과 정치를 같이하면서 성인다운 인격에 끌렸고,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고차적 의지와 신앙적인 진지한 인간미에 완전히 매혹되고 말았다.

 
장 박사의 외교관 시절에 있어서 특기할 것은 6·25 직후에 그분이 보여준 외교관으로서의 탁월한 역량이다. 조국이 풍전 등화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분은 조국의 운명이 쌍견에 지워져 있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주미 전권 대사로서 긴급 유엔 안보 이사회를 소집케 하고, 또 한편 트루먼 대통령을 움직여 유엔군을 급거 출동케 하여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운명을 건진 장 박사의 업적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큰 업적을 남기게 된 데에는 미국의 정부 요인이나 세계 각국의 외교관들이 그분의 평소의 인격을 높이 샀던 때문이었다. 장 박사의 정치적인 인격이 국내에서보다 오히려 미국을 비롯한 세계 무대에서 더 잘 알려졌던 것이다.

 
민주당 시절에 내가 조직 부장으로 일하면서 접촉이 잦았고, 4·19 이후 제2 공화국 수립 후, 공무로 매일 접촉하며 그분을 가까이 모실 수 있었다.

 
뜻하지 않은 5·16이 일어나고 초야에 묻혀 지내는 동안 나와 그분은 매일같이 만나 정담(政談)을 떠나 비로소 인생에 대한 화제를 서로 나누었다.

 
번창을 위한 문제 등이 대화의 중심이었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둑 같은 취미도 없는 분이었지만, 만나게 되어 낮이면 점심을 나누고 밤이면 저녁 식사까지 나누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주로 종교에 대한 토론을 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얘기다.

 
그분은 종교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피로한 줄도 모르고 정열을 다해 말씀했고, 자기의 뜻이 전달되지 않으면 몹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5·16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그분과 같이 지내는 동안 나는 많은 교리를 배웠고 종교인으로서 가지는 근본적 덕성도 몸에 배도록 교정이 되었다. 이제 나는 인생의 스승을 잃었다. 나의 인생을 올바르게 지도하고 이끌어 줄 분을 잃은 것이다.

 
“우리의 민족성은 신앙으로 고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만 이 혼란을 극복할 수 있어요”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평생 몰랐던 외도


 
천주교는 삼덕 중에서도 정결을 으뜸으로 친다. 장 박사는 참으로 정결한 분이다.

 
한번은 교리를 얘기하다가, 내가 “장 박사는 한번도 육계(肉係=外道)를 범한 일이 없소?”라고 묻자, 그분은 정색을 하며 “없지요”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하였다. 내가 육계를 범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느냐고 짓궂게 묻자, 그분은 조금 주저하는 것 같더니 솔직히 얘기를 꺼내 놓았다.

 
장 박사가 동성 상업 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얘기다. 당시 동성에는 입학하기가 몹시 어려운 때였다. 그때 종로 경찰서 고등 주임이 하루는 장 박사를 찾아와서 친지 되는 학생 한 사람을 입학하게끔 부탁을 했다. 귀찮도록 매일 졸라 대어 두고 보자고 해놓고 부탁한 학생의 시험 성적을 보니 커트라인에서 달랑달랑했다. 장 박사는 직원 회의에서 얘기를 하고 입학을 시켜 주었다.

 
일본인 고등 주임은 제 딴엔 몹시 고마웠던지 장 박사를 장충단 모 일류 요리집으로 모셔 한턱을 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술좌석 뒤엔 으레 여자가 따르게 마련이라, 고등 주임은 나까이(중간 심부름꾼)를 시켜 장 박사로 하여금 여자와 동침하도록 꾸몄다. 그것을 최대의 호의로 생각했던 것 같다. 전혀 술을 못해 탐탁치 않은 좌석에서 피곤을 느낀 장 박사는 나까이가 이끄는 대로 어느 방에 들어가 보니 성장을 한 게이샤(藝者)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은 너무도 어이없어 나까이를 불러 당장 택시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이튿날 이 소식을 들은 고등 주임이 백배 사죄했음은 물론이다.

 
자고로 영웅 호색이라 하여 외도하는 것은 무슨 미덕이나 되는 것처럼 자랑하지만, 독실한 신자인 그분에겐 너무도 거리가 먼 얘기들이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얘기는 장 박사가 천주교 사업 관계로 일본 경도에 간 일이 있었다. 20대의 홍안 미소년인 그분은 경도 관광차 마침 대기 중인 인력거를 타고 관광을 마쳤는데, 관광 안내를 끝낸 인력거꾼이 “좋은 여관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면서 경도에서 유명한 유흥 지대인 기온(게이샤 집결지)에다 내려놓았다. 무슨 영문인 줄고 모르고 내리는 20대의 발랄한 미청년인 장 박사를 본 게이샤들이 그분의 매력에 반해서 우루루 몰려와 서로 환영하여 맞으려고 일대 직업적인 경쟁을 벌였다. 잠시 어리벙벙해 있던 장 박사는 비로소 자기가 지금 어디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진땀을 흘리며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분은 웬만한 성직자보다도 오히려 많은 교리를 알고 있었으며, 또한 성직자 못지 않게 엄격하고 정결된 신앙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분은 교리에 금지된 행위는 절대로 범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대개 있을 법한 외도를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그분의 정결하고 고귀한 인품을 상기해 볼 때 저절로 머리가 수그려짐은 당연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장 박사는 서거하기 전에 결혼 50주년 기념인 금혼식을 넘겼다. 그분의 가정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모범된 가정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분의 결혼이 애초부터 현대적인 것은 못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결혼 풍습은 대개가 결혼 당사자들이 배우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결혼을 하는 게 상례였다. 모든 것은 부모들의 주관에 의해서 혼사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장 박사는 수원 농림 학교 2학년 재학 중인 18세에 결혼했다. 인천 해관(海館)에 다니신 엄친 장기빈 씨와 모친에 의해서 본인은 규수의 얼굴을 식장인 중림동 성당에서도 보지 못한 채 결혼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결혼을 하였지만, 금혼식을 맞는 50년 사이에 평화스런 가정을 누리어 왔던 것은 부인의 인덕어린 내조의 힘도 컸겠지만, 장 박사 자신의 인간성이 어질고 인품이 높은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비록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평범을 초월하여 성자처럼 인생을 살아가신 분이다.


교직 생활 17년


 
장 박사는 숙원이던 미국 유학을 갔다. 수원 농림 학교를 졸업한 그분은 영어를 더 배우기 위하여 YMCA 청년 회관에서 영어 강습을 받는 한편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3년 남짓 교편을 잡은 그분은 1920년에 유학을 간 것이다.
보통 유학을 간다면 출세의 길을 닦으러 가는 것인데 그분은 출세의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톨릭을 좀더 연구하고 자신의 수련을 쌓는 한편 일제의 피압박 민족이 된 이 나라 국민들에게 참된 교육을 시키는 한편, 후일에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톨릭을 전교하기 위해서 태평양을 건너간 것이다.

 
장 박사는 6년 간이나 교육학을 연구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가톨릭 계통 학교의 교장 신부 집에 기숙하면서 신앙을 쌓고 교리 공부에 전념하기도 했다.

 
장 박사가 귀국한 후에 그분에게 신앙적 지도를 해준 신학교의 교장 신부가 메리놀회의 결의에 의하여 우리 나라 평양의 교구장으로 부임했다.

 
교장 신부는 우리 나라에 오기 전에 장 박사에게 “당신이 나를 도와 주지 않으면 나는 한국에 안가겠소” 하고 협조를 간곡히 부탁한 바 있었다.

 
이분이 바로 방 바드리시오 주교였다. 장 박사는 쾌히 승낙한 터이다. 그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성의껏 보좌해 주었다.

 
장 박사가 미사 예식이나 가톨릭의 모든 의식에 성직자 못지 않게 밝은 것도 그 당시 방 바드리시오 주교를 보좌하면서 직접 체득한 영향이었다.

 
평양 교구에서 일을 보던 장 박사는 갑자기 교육계에 몸을 던졌다. 그분이 미국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기도 했지만, 그 무렵 서울 교구에서는 동성 상업 학교의 운영을 인계 맡고 있어 그분은 부교장 겸 서무 주임으로 모신 것이었다. 서울 교구의 간청을 받아들여 취임한 뒤 얼마 안 있다 교장이 되었다. 그분이 해방 직후까지 교육계에 봉직한 햇수는 17년이나 되었다.


내일의 씨앗


 
장 박사는 정무에 바쁜 중에도 처음 만나는 사람이면 “교회에 나가십니까? 나가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나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십시오” 하고 으레 말할 정도로 전교에 열성이었다.

 
그분은 내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주당 창당 시절부터 자주 만날 때마다 교회에 나갈 것을 종용했지만 나는 정무에 바쁜 나머지 차일 피일 미루다가 5·16 이후에야 비로소 입교하게 되었다.

 
그분의 거룩한 인간애는 곧 민주 정책에도 크게 반영되었다. 그분은 참된 민주 정치를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분의 그런 정책이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에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분은 민주주의의 최고 신봉자로서 노력을 했지만, 한국의 민주적 역량이 그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정치 풍토가 맞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집권 당시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자기의 소신껏 꾸준히 밀고 나갔었다는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분은 이 땅에 민주주의란 것을 개화시킨 분이시다. 이것은 도저히 소홀히 평가할 수 없는 커다란 업적이다.

 
해공 선생 같은 이는 계몽 시대에 나서 이 나라 민주의 계몽을 위해 싸운 분이다. 그러나 장 박사는 같은 계몽 시대를 거쳐 이 땅 위에 처음으로 참된 민주주의를 실천한 단 한 분이다. 하지만 이 나라의 정치 풍토는 그 참된 개화를 옳게 받아들이지 못해 하루 아침에 피었다가 진 꽃처럼, 빛나던 그분의 민주 개화는 불행하게도 오래 피어 있지 못하고 낙화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떨어진 씨는 이 땅속에 묻혀 헛된 썩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개화에서 떨어져 굳힌 보람은 크다. 그 씨앗은 차츰 움트고 자라, 후일에 보다 아름답고, 보다 힘찬 한 떨기 꽃을 피우게 할 것이다.